228. 태어나지 않은 존재
진리의 문, 그리고 천상이라고?
당황스러운 이름이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잘못 들었을 리도 없었다.
“왜, 네가 열쇠를 갖고 있기라도 하느냐?”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훑는 가라앉은 황제.
그는 계속해서 ‘당연한 것’을 묻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고 있었다.
심연의 주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으니.
하물며 내가 ‘열쇠’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라앉은 황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잡아먹으려 들 것이었다.
“그럴 리가.”
하여 나는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가라앉은 황제도 껄껄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그렇다. 멸망이 아닌 이상에야 모든 별과 열쇠를 지녔을 리가 없지.”
······ 멸망이 아닌 이상에야.
그 말이 묘하게 걸린다.
오직 멸망만이 13개의 히든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멸망이 아니다.
인간이다.
세계를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기사왕 빌헬름의 캐릭터가 삭제되고, 보유하고 있던 가치가 160만 소울 포인트(SP)로 전환되어 모든 재능을 최대치로 찍었을 뿐.
그리하여 13개의 히든 특성이 해금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소울 포인트와 재능. 그것들이 히든 특성과 관계가 있다는 의미인가?’
몇몇 재능에 따라 해금되는 히든 특성들이 있다.
예컨대 오대원소 재능에 각각 3천 포인트를 투자하면 열리는 허(虛) 속성.
그 허 속성에 다시 5천 포인트를 투자하면 히든 특성인 허무(虛無)를 얻을 수 있다.
재능이 재능을 낳는 히든 피스인 셈.
하지만, 안다고 해서 아무나 얻을 수는 없다.
소울 포인트의 획득이 굉장히 난해하기 때문이다.
‘유일등급 무구를 지니고 죽어야 고작 7에서 8만 소울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지.’
유일등급 무구를 삭제시켜야 해금할 수 있는 히든 특성은 고작 한, 두 개.
그러나 ‘허무’는 가장 얻기 쉬운 히든 특성 중 하나였다.
나머지 히든 특성을 찍으려면 더 많은 소울 포인트가 필요하다.
‘그래도 160만 소울 포인트면 기존의 재능들을 모두 최대치로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소울 포인트는 각종 퀘스트나 균열의 탑을 돌아도 얻을 수 있지.’
물론,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균열의 탑 1층을 클리어했을 때도 얻은 소울 포인트는 고작 7만가량.
하지만 그렇게 어찌저찌 160만 소울 포인트를 모으면, 13개의 히든 특성을 개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모으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깝긴 하지만, 0인건 아니지 않나.
고로, 멸망이 아니어도 13개의 히든 특성을 개화시키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이론’ 상으론 말이다.
내가 멸망이라서 13개의 히든 특성을 지닌 게 아니라.
다만, 걸리는 건 있었다.
‘······ 천상.’
13개의 히든 특성 중에선 나조차도 모르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식가, 대현자, 그리고 천상.
대식가는 ‘탐욕’이 되었으며 대현자는 ‘진리의 눈’이 되었다.
오직 하나.
천상만이 그대로다.
그리고 그 천상의 다른 이름이 ‘진리의 문’이라면······.
‘나는 진리의 문을 본 적이 있다.’
칼날여왕 하나가 용신의 업을 탄생시키고 있었을 때.
하나와 연결된 나 역시 ‘진리의 문’을 마주했다.
그건 내 안에 있었으며, 거대한 눈과 입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선물이라며 대현자 특성을 ‘진리의 눈’으로 바꿔준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 게 여럿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놈들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신격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도 차원이 달랐으므로.
한데, 그 눈과 입이 ‘천상’이란 말인가?
‘플레이어는 뭐지?’
더욱 이상한 건 플레이어다.
플레이어는 오직 판게니아 대륙을 지키고자 여신에 의해 소환되었다.
당연히 심연과는 크게 관계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소울 포인트로 히든 특성을, 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마치 심연의 존재 같지 않은가.
“헌데, 은둔한 것치곤 꽤 짙은 ‘심연력’을 지녔구나. 몇 개의 영역을 다스리는 지배자 같이. 왜 은둔을 깨고 이곳으로 온 게냐?”
잡념을 지웠다.
지금은 이곳에 집중할 때였다.
현재 내 모습은 어둠을 피우는 자이고, 끔찍한 흉조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영역을 나온지 얼마 안 됐다.”
“얼마 안 된 놈이 ‘신의 섬’을?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내 본체가 아닌 이 모습으로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거라.”
“네 본체는 지금 그 모습과 다른가?”
가라앉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다. 아주 많이 다르지. 지금 이 모습은 먼 옛날의 나를 투영한 모습에 지나지 않아.”
“먼 옛날에 인간이었나?”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기억도 잘 안나는군.”
가라앉은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
억지로 되짚어도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먼 기억이었기에.
“다만··· 한 가지는 생각난다.”
“뭐지?”
“최초로 대륙을 일통한 황제. 그게 나였다.”
가라앉은 황제.
그는 먼 옛날, 대륙을 일통한 황제였다.
······ 태고용신이 내게 언질한 내용과 같았다.
말인 즉, 그 역시 ‘태고용신의 보물창고’를 들어갔다가 나온 존재라는 것.
역시 이 녀석은 태고의 존재가 확실하다.
나는 짧게 함축하여 말했다.
“감상적이로군.”
“으음. 본체를 움직일 수 없어서 그런가? 인간일 시절의 감정이 약간이지만 돌아온 것 같다.”
가라앉은 황제는 다소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연의 지배자가 되며 잃어버린 감정.
하여간, 이 정도면 됐다.
‘밤이다.’
어느덧 해가 뉘웃뉘웃 기울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밤이 찾아오고 있다.
어둠.
아니······ 심연이.
더 많은 참가자와 원정 대결을 펼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그들도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뜻 아닐는지.
“슬슬 이동하지.”
괜히 더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그러니, 안전하게 밤을 지낼 곳부터 찾아야겠다.
*
【‘밤의 악령’이 ‘신의 섬’을 찾아왔습니다.】
【‘밤의 악령’은 참가자들을 찾아 떠도는 악령입니다.】
【‘밤의 악령’은 공격력 500과 체력 500을 지녔으며, ‘밤의 악령’에게 패배하여 빼앗긴 ‘가장 소중한 것’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습니다.】
【72시간 이상 ‘원정 대결’을 펼치지 않으면 ‘밤의 악령’이 100% 확률로 찾아옵니다.】
【또한, ‘밤’의 시간 동안 원정 대결은 불가능합니다.】
【참가자간 전투를 벌일시 ‘밤의 악령’이 찾아옵니다.】
섬이 어둠에 가라앉자 떠오른 문구.
새로운 규칙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살벌하군.’
공격력과 체력이 무려 500이다.
걸리면 무조건 진다고 봐야했다.
다만 의외인 건 대결불가다.
모든 전투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밤의 시간 동안 아군을 늘려라. 그런 뜻인가?’
이 시간에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괜히 전투를 벌였다가 ‘밤의 악령’이 찾아오면 모두 잃게 되니까.
사이좋게 대화라도 나누면서 아군을 늘리라는 의미인지.
“머물 곳을 찾는 거 아니었나? 괜히 돌아다녔다가 밤의 악령과 마주하면 큰일날터인데?”
나는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계속해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특히 저 문구를 본 뒤로는 더욱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첫째날부터 습격해오진 않을 거다.”
“······? 무슨 근거의 자신감이냐?”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공포게임과 비슷하다.’
흔히 말하는 공포게임 류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게임을 배우는 첫째날부터 습격해오는 귀신은 없다.
설혹 나오더라도, 겁만 줄뿐 게이머를 죽이진 않는다.
아니면 피하기 매우 쉽게 해놓거나.
‘분명히 지도에 위치는 나타나있는데 없는 별빛들이 있었지.’
새로 등장한 별빛들.
막상 지도에 적힌 위치로 가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등장하는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 ‘밤’일 가능성이 꽤 높았다.
진짜 별빛은 밤에만 보이는 법이니까.
‘빙고.’
······ 예상대로다.
바닥에 박힌 채 주홍빛으로 반짝이는 별빛.
아침에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스윽. 스으으윽.
그때였다.
등 뒤로 무언가가 쓸려가는 소리.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눈을 감고 절대로 등을 돌리지 마라.”
가라앉은 황제가 경고했다.
대체 등 뒤에 나타난 게 뭐기에?
확실한 건 소름끼치도록 어두운 존재라는 점이다.
수많은 강적과 마주하고 대결해봤지만, 이런 종류의 소름은 처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스윽. 스으윽. 스으으윽.
30초가량이 지나자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됐다. 지나갔다.”
가라앉은 황제가 숨을 내쉬었다.
그만한 존재가 이 정도의 반응이라니.
“뭐지?”
“··· ‘태어나지 않은 존재’다.”
지금 등 뒤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지나갔다는 말이다.
허나 의아했다.
“어차피 전투는 불가능할텐데. 굳이 눈을 감을 필요가 있나?”
“놈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다. 애초에 ‘가장 소중한 것’이 없는 놈이니까.”
“······ 그럼 사기 아닌가?”
“아아, 적어도 이 게임에선 절대적인 우승 후보겠지. 녀석은 그저 마주한 것을 삼키고, 파괴하며, 승리로 향할 뿐인 그런 존재이니.”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다.
처음 원정 대결에서 패배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꽤 많은 걸 아는 듯했다.
가라앉은 황제가 마저 말했다.
“아무튼, 저 괴물과는 부딪히지 말거라.”
부딪히면 죽을 거다.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차라리 원정 대결을 펼쳐서 패배한 뒤 ‘별의 감옥’에 이감되는 게 낫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날 도운 거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쟁자 한 명을 지울 기회였다.
내가 그를 도왔다고는 하나, 그는 심연의 존재이지 않은가.
필요에 의해서 협력할뿐 은혜를 갚는 자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가라앉은 황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지금 내가 인간의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허나 내 ‘본체’와 만났을 때도 이런 도움을 바라진 말거라.”
“눈물 나게 고맙군.”
“그나저나······ 뭘 찾은 거지?”
“별빛이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별빛이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별빛이, 가라앉은 황제에겐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아직 조건을 해제하지 않아서일까?
나는 궁금해하던 질문을 마저 던졌다.
“가라앉은 황제여. 이곳에 있는 ‘별빛’들은 최초로 심연에 떨어진 12개의 ‘별’들의 이름인가?”
“그건 아닐 거다. 각자가 가진 ‘별의 기억’을 따라가는 게 규칙인 듯싶으니.”
“각자가 가진 별의 기억?”
“네가 보유한 별의 이름을 가진 별빛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히든 특성을 보유했다.
오직 나만이 모든 별빛을 소유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허나 그것들을 모두 모았을 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최초의 기억에 따라 순서를 다시 배열했을 때 변화가 생겼지.
‘히든 특성을 얻고, 진화시킨 순서대로 모아야 한다는 소리로군.’
다음에 내가 얻은 게 뭐였지?
‘분명히 크람델로 향하던 길목이었지. 거기서 시체 까마귀의 핵을 삼키고 대식가가 진화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화라고 하긴 어렵다.
대식가의 특성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철혈군주의 심장이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진화했을 때가 첫 진화인데.’
틀림없이 막심을 죽였을 때였다.
와이저 후작가 ‘기사의 정원’에 쳐들어온 막심이, 대원정을 모욕하고 함께했던 기사들을 지우려 하자 나는 순수히 분노했다.
그리하여 ‘히든 특성 퀘스트 : 철혈군주’가 시작되었다.
막심을 죽인 뒤 클리어하자 ‘철혈군주의 심장’은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진화했고.
‘영원군주의 별빛을 찾아야한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놓인 별빛은 ‘영원군주의 별빛’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녔던 다른 진화한 히든 특성의 이름도 아니었다.
‘이건······!’
별빛을 확인한 순간, 절로 미간이 좁혀지려는 걸 나는 애써 인내했다.
【유일황제의 별빛 ★★★★★】
【공격력 30, 체력 30】
【‘유일황제의 기억’이 담겨있는 별빛입니다. ‘유일황제’가 보유할 시 모든 별빛의 공격력과 체력이 5 증가합니다.】
【해당하는 등급의 별빛은 오직 한 개만 보유할 수 있습니다.】
············ 이게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