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모든 히든 특성을 지닌 자
별의 원정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별의 감옥’에 하루 동안 이감된다.
천마와 같은 태고의 존재마저도 이동시키는 강제성.
이 게임을 만들고 유도한 자의 격이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임을 뜻하는 게 아닐는지.
‘별빛이 없으면 자동으로 패배 처리된다.’
확실한 건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별빛을 모아 공격력과 생명력을 높여야만 한다.
패배했다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때문이다.
천마가 남기고 간 이 한 자루의 도(刀)처럼.
‘천마도.’
손에서 느껴지는 거친 반발력.
마치 야생마를 탄 기분이다.
그저 쥐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내가 지닌 지고의 유일급 검인 ‘겨울(최후의 황혼)’과 비교하더라도 결코 그 격이 떨어지진 않을 듯싶었다.
‘이게 천마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
하지만 의외였다.
천마가 지닌 많고 많은 것 중에 이 도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등급의 규격이 높은 이유만은 아닐 터인데.
그는 태고를 아는 존재.
등급의 규격만 따지자면, 이와 비슷한 보물을 몇 개는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으으, 불결해! 무례해! 이 더러운 녀석 좀 치워주면 안 될까?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
한동안 잠잠하던 ‘겨울’이 입을 열었다.
자아를 지닌 검.
녀석이 천마도를 쥐자마자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새침데기 같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천마도를 혐오하는 감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불결하고 무례하다? 천마도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나?’
하지만 내용이 의아하다.
쥐고 있을 뿐이건만 무례하다니.
무례라는 단어는 실례했을 때나 쓰는 말 아니던가.
-저 말이 안 들리니? 더러운 입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리잖아. 탈각(脫却)하고 멸각(滅却)하여 수라를 엿본 자만이 ‘천마신공’을 대성할 수 있다. 하지만 오롯이 순수한 마기(魔氣)를 쌓는 건 인간의 심법(心法)만으로는 불가하며······ 뭐라는 거야 진짜?
안 들린다.
하지만 겨울은 들을 수 있다.
녀석의 말을. 천마도에 새겨진 저주를.
‘심득(心得)이다.’
겨울을 통해 전해 들은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겨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건 심득, 즉 깨달음이었다.
누군가가 체득한 깨달음을 상세하게 검의 의지로 입혀놓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의 나는 도달하지 못한 아득히 먼 공부를!
단순히 심득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까지 적어놓았다.
이건······.
‘대박이다.’
그냥 대박도 아니고, 초대박도 아니며,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
심 봤다.
단순히 천마도만 빼앗았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이 있어 천마도에 새겨진 심득을 알 수 있었다. 보물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자에게만 빛난다 하였던가.
‘천마가 이 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알겠군.’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터였다.
제대로 별빛을 모으지 않은 것을.
하루가 지나면, 목숨을 걸고 찾으려고 들 테지.
하지만 하루면 충분하다.
심득을 외우고 정립하는 데에는.
뿐만인가.
하루가 지난다 한들, 천마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이 ‘신의 섬’에서 일어나는 별빛의 원정은 진정 나를 위해 짜인 판이니까.
‘이러한 보물이 여덟 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정도의 흥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태고의 갑옷을 얻었을 때만큼이나 나는 집중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앞으로의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이름난 심연의 지배자들.
그리고 태고의 존재들.
그들을 이기고 그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강탈할 방법에 대해서.
“······ 뭐냐, 네놈은.”
노인.
천마에게 호되게 당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적대적이지만 반대로 경계도 하고 있다.
천마를 한 번에 날려버렸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라앉은 황제’인가?”
하여 나는 물었다.
노인은 천마와 싸우던 도중 분명히 ‘가라앉힌다’고 했다.
마침 참가자 중에선 ‘가라앉은 황제’가 있었으니, 어림짐작으로 꺼낸 말이었다.
“······! 나를 아느냐?”
“맞나보군.”
“설마··· 네놈도 그놈과 한패더냐?”
“그놈?”
“‘태어나지 않은 존재’ 말이다······!”
부르르르!
한차례 분노로 몸을 떠는 노인.
그러고 보니, 시작하자마자 ‘별의 원정’을 펼친 놈이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
설마 놈이 펼친 원정이라는 게, 가라앉은 황제와 관계가 있는 걸까?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한패가 아니다.”
“··· 아니라고?”
“그래. 한데, ‘태어나지 않은 존재’와 대결을 펼쳤나?”
“원정 말이냐?”
고개를 끄덕이자, 가라앉은 황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적대감은 조금 지워졌지만 여전히 거리는 있는 모습.
그래도 한패가 아니라는 말에 다소 경계는 풀린 듯했다.
“강제로 원정인가 뭔가를 진행하더군. 빌어먹을 놈······!”
“졌는데 ‘별의 감옥’에 이감되지 않은 건가?”
“··· 이 몸은 내 본체가 아니다.”
아아, 어쩐지.
너무 형편없이 천마한테 깨진다 싶더라니.
별의 감옥에 이감되는 건 본체에 한정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꽤 중요한 정보다.
‘정보를 더 캐낼 수 있겠군.’
나보다 먼저 원정 대결을 펼친 자다.
게다가 이곳 참가자들에 대해서도 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조건이 만족되어 게임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던 자였으니까.
‘어차피 본체가 아니면 원정 대결은 펼칠 수 없다.’
천마와 대치할 때와 반대로, 지닌 별빛들이 잠잠하다.
본체가 아니어서 대결을 펼칠 수 없거나, 이미 한 번 패배하여 하룻동안 대결을 펼칠 수 없는 상태가 된 건 아닐는지.
‘이 게임은 숨겨진 조건과 규칙을 찾는 게임이다.’
단순히 별빛을 모으는 게 끝이 아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정보를 유추하고 알아내야만 했다.
상황을 정리한 후 나는 ‘가라앉은 황제’에게 말했다.
“우린 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친구 먹자고.
*
【‘무덤의 주인’과 ‘란돌프’가 ‘별의 원정 대결’을 펼칩니다.】
【‘무덤의 주인’의 공격력과 체력이 0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패배했습니다.】
【원정에 성공했습니다!】
【‘란돌프’가 ‘무덤의 주인’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합니다.】
【‘아이의 무덤’을 강탈했습니다.】
고오오오오오.
무덤의 주인.
흙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골렘이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하루동안 ‘별의 감옥’으로 이감됩니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천마와 마찬가지로 별의 감옥으로 이감된 것이다.
이후 내게 남겨진건 작은 구릿빛의 동전 하나였다.
웬 무덤이 그려진 싸구려 동전.
이게 ‘무덤의 주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니.
딱히 다른게 숨겨져있거나 하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시작하자마자 두 괴물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이보다 더 좋은 출발은 없으리라.
“······ ‘신의 살갗 혼종’이 묘한 걸 만들어냈군.”
가라앉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섬을 뒤지길 수 시간.
몇 시간 안 되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가까워진 상태였다.
나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는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고, 그와 반대로 나 역시도 그에게 많은 걸 케낼 수 있었다.
이런걸 상부상조라고하나?
“이 ‘신의 섬’은 ‘신의 살갗 혼종’이 만들어낸 건가?”
내가 묻자 가라앉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심연은 분명히 ‘신의 살갗 혼종’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참가자 중에서 ‘신의 살갗 혼종’은 보이지 않았다.
이 섬의 주인이 놈이고, 판 자체를 놈이 짰다는 방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낸 건 아니다. 이 섬은··· 심연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그것도 모르고 있던 거냐?”
아무래도 ‘가라앉은 황제’는 나를 심연의 주민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알아야할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다.
알아서 오해하고 있는데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을 터.
도리어 이 의심을 이용해야만 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 영역에서 잘 나오질 않아서.”
“은둔자인가······, 하긴 그런 놈들도 많지.”
심연의 지배자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놈들이다.
심연의 지배자들조차도 심연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기 영역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교류도 없을 테니 그야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게 납득한 가라앉은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신의 살갗 혼종’이 별빛을 구실로 내가 지닌 ‘별의 기억’을 읽으려 하는 건줄 알았다. 하지만, 진행을 보아하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군.”
“별의 기억을 읽는다라······ 그런데 왜 별이라고 부르는 거지?”
별의 기억.
별빛은 모두 히든 특성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히든 특성 13개를 들고 시작했을 때, 그때의 기억대로 별빛을 배치하자 ‘별의 기억’이 완성됐다는 말과 함께 잠겨있던 기능이 해금됐다.
한데, 왜 그들은 ‘히든 특성’을 ‘별’이라고 부르는 걸까?
내 물음을 들은 가라앉은 황제가, 나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은둔자라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특이한 놈이로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심연은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장소다.
라이가도 심연에서 사냥만 했을 뿐, 이런 정보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가라앉은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최초로 심연에 가라앉은 12개의 별. 그 별들은 ‘문의 너머’에 있으며, 심연은 그 문의 틈에서 흘러나온 별의 기운에 의해 오염된 것이다. 네가 가진 ‘특성’들도 모두 별의 영향을 받은 거다.”
······ 잠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설마 12개의 별이라는 게, 히든 특성을 말하는 건가?
심연의 지배자들은 히든 특성을 별이라고 부르는 거고?
“문의 너머는 어디에 있지?”
“기존 12개의 별은 이미 멸망한 자들의 것. 하여,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문’을 만드는 자들이 나타났고, 그중 하나가 나인 것만은 분명하지.”
자신의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았다.
12개의 히든 특성.
그것들은 모두 ‘멸망한 종족’이 지닌 근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추가된 히든 특성은 고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지닌 ‘영원의 란돌프’나, ‘마혈종의 신’처럼.
가라앉은 황제 역시 새로운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13개의 히든 특성을 지니고 시작했다.
그런데 왜 12개라고 하는 거지?
“최초로 떨어진 12개의 별. 그걸 모두 갖고 있는 자도 있나?”
“하하!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절대적인 부정.
저 비웃는 태도로 보아하니 심연의 지배자들 중에서도 없는 모양이다.
모든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자가.
하지만 가라앉은 황제도 심연의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니다.
그가 모르고 있을뿐, 어딘가엔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작게 혀를 찬 가라앉은 황제가 다시금 언급했다.
“다만, ‘멸망’은 그 모든 걸 갖고 있는 자일 것이라고 하더군. ‘열쇠’와 함께 12개의 별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열쇠?”
멸망에 대한 언급.
그리고 열쇠!
미치도록 궁금하여 되묻자 그가 입을 열었다.
“열쇠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두 가지다.”
나는 가만히 집중했다.
멸망의 실체에 관해선 거의 들어본 바가 없었으니.
하물며 이건 멸망이 지닌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어, 가라앉은 황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진리의 문’, 혹은 ‘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