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천마
쏴아아아!
쏴아아아아아!
파도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
문을 넘자, 그곳은 대해(大海)였다.
‘섬?’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섬과 바다.
나는 모래사장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심연이 맞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품에서 ‘텔레포트 북’을 꺼내 들었다.
《워프 사용 불가 지역입니다.》
······ 역시나.
워프를 사용할 수 없는 곳.
아무래도 이 바다와 섬은 심연의 어딘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심연에는 이런 공간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거라면 이처럼 자연스러울 수도 없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왔으니까.
‘아직 침식당하지 않은 심연의 구역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이미 침식당해서 심연 속에 가라앉은 구역 아니었던가.
그 순간이었다.
【모든 참가자가 ‘신의 섬’에 도착했습니다.】
【‘별 찾기’가 시작됩니다.】
【참가자는 섬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별빛 중 13개의 ‘별빛’을 모은 뒤 ‘별의 원정’에 올라야 합니다.】
【‘별빛’은 모두 각기 다른 효과와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알맞게 조합하여 ‘별빛 원정대’를 꾸리고, 원정에 도전해야 합니다.】
【‘원정’은 여러 번 도전할 수 있으나, 원정 실패 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참가자 전원에게 ‘별빛의 지도’가 주어집니다.】
【모든 ‘별의 원정’에 성공하면 ‘신의 섬’의 주인이 되고, ‘거룩한 별’을 소유하게 됩니다.】
한 장의 종이 위에 떠 오른 글자들.
마치 게임 같은 설명이다.
‘별빛 원정이라.’
규칙 자체는 간단했다.
13개의 별빛을 모아, 원정에 오르면 끝.
하지만 별빛 원정대를 제대로 구성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반대로 성공하면 이 섬과 별을 가질 수 있다.
‘별빛만 모을 수만 있다면, 굳이 부딪히지 않아도 된다.’
나를 제외한 여덟 명의 참가자.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은 감히 경천동지(驚天動地)라 칭할 만했다.
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오르는 강자들.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삶을 장담할 수가 없을 터다.
하지만 규칙을 따른다면 굳이 그들과 부딪힐 필요가 없다.
별빛만 잘 모으면 그만이었으니.
‘이게 지도인가 보군.’
허공에 떠오른 종이 한 장.
규칙이 적혀있던 종이의 뒷면을 살피자 그곳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 곳곳에 반짝이는 부분은 아마도 ‘별빛’이 있는 위치인 듯싶었다.
‘······ 엄청나게 많군.’
내 주변 반경을 기준으로 반짝이는 별빛들.
당장 보이는 것만 따져도 150개가량이다.
비슷한 숫자가 섬 전체에 분포되어 있다면, 이 섬에 있는 별빛은 모두 수천 개가 넘는다는 말이었다.
그중 열세 개를 모으면 그만인 일.
굳이 다른 지역을 탐색할 필요조차 없이, 내 주변에서만 모아도 충분히 13개를 달성할 수 있을 터.
‘구역마다 별빛의 특성 같은 게 미묘하게 다르겠지. 그것들을 최상의 상태로 조합해서 원정대를 꾸리는 게 목적일 거고.’
허나, 그렇게 쉽게 돌아갈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함정이 있다.
이 규칙을 다른 여덟 명의 절대자가 따를지도 의문이거니와.
‘영원군주의 심장이 발동하지 않는다.’
······규칙 하나를 제거하는 영원군주의 심장 역시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영원군주의 심장만이 아니다.
모든 히든 특성이 발동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별빛 하나.
땅속에 박혀 빛을 내는 그 별빛을 주워 든 순간.
【‘철혈군주의 별빛’을 찾았습니다.】
【공격력 3, 체력 5】
······ 어쩐지 익숙한 이름의 별빛.
이건 분명히 히든 특성이었다.
영원군주의 심장이 진화하기 전의 이름이 바로 ‘철혈군주의 심장’이었으므로.
‘모든 히든 특성이 별빛으로 변한 건가?’
가만히 턱을 쓸었다.
처음 시작할 때 지녔던 13개의 히든 특성들.
혹시 몰라 찾아보자, 다른 별빛 역시도 그 히든 특성들의 이름을 계승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기본적인 히든 특성은 13개다. 하지만 내 히든 특성은 진화하고, 추가됐지.’
내가 보유한 히든 특성은 총 15개였기 때문이다.
영원의 란돌프와 마혈종의 신이 추가된 상태.
그것들도 이 섬 어딘가에 별빛으로 존재하는 걸까?
하지만 나만 히든 특성이 진화하고 추가됐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곳에 모여있는 여덟 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들.
그들 역시도 다수의 히든 특성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모든 히든 특성이 별빛으로 화했다면, 이 게임을 이기기 위해선 평범한 히든 특성이 아니라 진화하고 추가된 것들 위주로 모으는 게 맞는 방향이겠지.’
문제는 그게 어디 있느냐는 점이었다.
쉽게 찾도록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던 찰나.
고오오오오오오오-!
고막을 강타하는 거대한 존재의 울림.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의 진원지인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친.’
그리고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고래 한 마리를.
세계의 축을 부순 고래, 저놈이 바로 천축의 고래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뿐만이 아니다.
등장한 즉시 놈은 거대한 꼬리를 들고, 섬을 향해 휘둘렀다.
커다란 운석이 다가오는 기분이 이러할까.
섬 자체를 파괴할 목적으로 천축의 고래는 축을 뒤흔들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콰아아아아아아앙!!!
······ 귀를 막았다.
미칠 듯한 광음.
그러나 섬은 파괴되지 않았다.
섬 전체를 두른 푸른 보호막이 저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천축의 고래는 이 게임을 규칙대로 진행할 생각이 아예 없다.’
저걸 본 즉시 알았다.
세계의 축을 부순 존재.
말마따나 규칙 따윈 저 고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13개의 별빛을 모아 ‘별의 원정’을 시작합니다.】
······ 잠깐.
벌써?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13개의 별빛을 모아 원정에 오른단 말인가.
성공할 리가 없다.
실패의 리스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폭풍의 배율자’가 120개의 별빛을 지웠습니다.】
【‘폭풍의 배율자’가 200개의 별빛을 지웠습니다.】
【‘폭풍의 배율자’가······.】
······알았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이놈들. 정상적으로 게임을 할 생각이 없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 재밌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단 말인가.
나 같은 놈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그럼 이런 놈들 틈바구니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더 미친놈이 돼야지.’
이놈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의 미친놈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놈들 사이에서 가장 제정신이 아니게 보이는 법은.
‘정석대로 간다.’
진짜 규칙대로 게임을 하는 것.
*
【‘허무의 별빛’을 찾았습니다.】
【공격력 4, 체력 4】
【해당하는 ‘허무의 별빛’을 보유/제거 할 수 있습니다.】
【‘손재주의 별빛’을 찾았습니다.】
【공격력 2, 체력 8】
【해당하는 ‘손재주의 별빛’을 보유/제거 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인기척을 지운 채 섬을 탐색해나간다.
별빛은 많지만, 역시나 ‘특별한 별빛’은 찾을 수가 없었다.
‘조건이 있나보군.’
특별한 별빛을 찾거나 만들기 위한 조건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는지.
이 정도로 찾았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조건이 뭘까.
전부 비슷한 능력을 지닌 별빛들.
이것들이 조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보유해야 되는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니면 공격력과 체력을 일정 비율로 맞춰야 하는 건가?’
···아니다.
별빛들을 굳이 조합하거나 맞출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일정 비율의 공격력과 체력을 보유하면 이길 수 있는 게임일 수도 있다.
별빛마다 다른 공격력과 체력이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해나갔다.
같은 이름의 별빛을 모아도 보고, 종류별로 하나씩 보유도 해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
그때 불현 듯 든 생각 하나.
혹시 순서인가?
처음 판게니아에 떨어졌을 때 보유했던 13개의 히든 특성들.
그것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지?
처음 칼츠만 사막에 떨어져, 양손이 묶인 채 히드라곤을 마주했을 때.
‘기억난다.’
떠오른 순서대로 다시 별빛을 배치해보았다.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천상(天上)】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이 순서대로 별빛을 배치하자.
【‘별의 기억’이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별빛의 공격력과 체력이 1 상승합니다.】
【도합 60의 공격력과 60의 체력을 보유했습니다.】
【숨겨져있던 ‘별빛’이 지도상에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빙고!
나는 즉시 지도를 살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점들.
저게 바로 숨겨져있던 별빛이다.
정해진 순서대로 별빛을 모아서 일정한 공격력과 체력을 보유하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 맞는 듯싶었다.
꽈릉!
그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폭음.
촤르르르!
필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소리다.
원활한 게임의 진행을 위해선 무시하고 떠나는 게 상책이리라.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신기한 술법을 사용하는구나. 기문둔갑 같은 게냐?”
그러나 궁금했다.
이름 높은 심연의 지배자들과 태고의 존재들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는지.
이에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자.
“가라앉혀주마!”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한 노인과 흑색의 무복을 입은 남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특히 남자가 인상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눈.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로 휘두르는 한 자루의 도(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은데 노인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 아무렇게나 휘둘러지는 도의 경로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쯧. 짐승이 따로 없군.”
이내 실망한 듯 혀를 찬 남자가 발을 굴렀다.
쿵!
그러자 미끄러지듯 날아간 노인의 육체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손짓 하나, 발길질 하나,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은 게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압도적이다.
그 상태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천천히 그늘 바깥으로 나왔다.
더 이상 숨어있는 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런 나를 보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눈치는 있는 아이로구나.”
가만히 숨어만 있었으면 죽이려 했다는 듯한 말투.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노인공격을 하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노인공격?”
“한 수 배우마.”
“배운다? 본좌를 상대로?”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확실히, 남자는 강했다.
정면으로 맞붙어선 승기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이건 기회였다.
천재일우의 기회!
나는 즉시 13개의 별빛을 허공에 수놓았다.
그러자.
【‘천마’와 ‘란돌프’가 ‘별의 원정 대결’을 펼칩니다.】
【‘천마’의 공격력과 체력이 0입니다.】
【‘천마’가 패배했습니다.】
【원정에 성공했습니다!】
【‘란돌프’가 ‘천마’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합니다.】
“음······?!”
천마의 눈빛이 흔들린다.
······ 역시 이놈들, 제대로 게임을 할 생각이 없다.
아예 아무런 별빛도 보유하지 않았을 줄이야.
모든 별의 원정에 성공하면 섬의 주인이 된다는 말.
예상대로 그건 도전자들과 대결해 승리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도합 8명의 도전자들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면 된다는 의미다.
“네놈······!”
그리고 천마의 가장 소중한 것.
그의 손에 있던 도 한 자루가, 어느덧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천마는 분개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하루동안 ‘별의 감옥’으로 이감됩니다.】
슈웅!
천마의 신형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