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성운을 마시는 별
화르륵!
전신무장을 완료한 아그니스가 불의 창을 들었다.
불의 창은 이전만큼이나 거대하지도 않고, 타오르지도 않았지만.
‘극에 달할수록 평범해 보인다.’
아그니스는 알고 있었다.
이 창의 위력은 자신이 여태껏 중간계에서 펼쳐낸 그 어떤 무력(武力)보다도 강할 것이라고.
자신을 강제소환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소질을 가진 아이.
아이가 지닌 ‘최초의 불’은 아그니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불의 정령왕.
단 한 번도 소환자에게 압도당하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건만.
-사라지거라.
후욱!
창을 던졌다.
느릿하게 날아간 창은, ‘잠겨있는 신의 손’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크아아악!
그러자 ‘잠겨있는 신의 손’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머리 부분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검은 손들이 아이들을 부여잡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화아악!
닿기도 전에 타서 재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이,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사라진다.
그야말로 소멸하고 있다.
존재 자체를 말소시키는, 근원 자체를 지우는 부정의 창.
‘중간계에서 휘두른 건 처음이로군.’
먼 과거 자신을 소환한 자들도 이룩하지 못하였던 일.
이 부정의 창이야말로 아그니스가 지닌 무력의 근간이다.
하여 흥미가 일었다.
소년에게.
자신이 이처럼 누군가에게 흥미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나는 신이니라!
아그니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신이라.
정말 저딴 걸 정말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의 정령왕인 아그니스는 저것의 실체를 순식간에 파악해버렸다.
‘과분하군.’
신이 아니다.
오염된 명예로 말미암아 태어난 기생충과 같은 것.
벌레에 불과하다.
이름부터 ‘잠겨있는’ 신의 손이지 않은가.
거짓되고 부정된, 신을 흉내 낼 뿐인 벌레 따위에게 쓰긴 아까운 창이지만, 아그니스는 보여주고 싶었다.
소환자인 소년에게, 자신의 힘을 말이다.
-나는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 만물의 근원을 다루는 왕일지니.
이윽고 아그니스는 시선을 돌려 악마를 바라보았다.
교만의 악마.
아마도 방금 자신이 멸한 벌레는 저 악마의 작품이었을 터.
-꺼져라.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계가 변했다지만, 악마는 악마였다.
감히 악마 따위가 신성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더러운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고한다.
감히 범접하지 말라고.
악마는 악마답게 바닥이나 기라고 말이다.
“······.”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의 표정은 더없이 굳었다.
스아악.
이내 그는 등을 돌려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저 악마도 처리해주는 거 아니었어?”
이세라의 물음에 아그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과는 엮이지 말거라.
처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악마와는, 특히 교만과는 엮여서 좋을 게 없다.
또한, 신성과 빛으로는 저 악마를 완전하게 죽일 수 없다.
그건 놈이 지닌 어둠보다 더 극한의 어둠을 지닌 자만이 가능한 일.
무엇보다 교만의 본체인 심장은 이곳에 없었다.
이윽고 상황이 정리되자, 루카리아가 검지를 들어 아그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타는 변태 아저씨!”
-······.
*
부들부들!
교만은 몸을 떨었다.
이런 치욕을 당할 줄이야.
아무리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최초의 불과 아그니스······!’
절로 이가 갈렸다.
발란 왕국은 그에게 있어서 농락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설마 이런 약소한 왕국에 저런 괴물들이 있으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만약 알았다면 발란 왕국으로 발을 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정 천상의 수호자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 능력만큼은 능히 천상의 수호자와 비견할 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천상의 수호자가 중간계에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천상이 움직일 정도의 일은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내가 아니거늘.’
교만의 악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양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신격을 마주한 악마의 본능이다.
먼 옛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게 악마였으니.
교만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희가 무섭지않다. 두렵지 않다.”
젠장할.
입밖에 꺼낸 말과 몸의 반응은 정반대다.
뼛속 깊이 박힌 기억은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고, 그들보다도 더 강한 힘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무섭고 두려운 모양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처럼 등을 보이고 도망치진 않았을 테니.
‘탐욕이여. 네놈은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한거냐?’
재미없는 놈이라고 멀리했으나 진심으로 묻고싶었다.
놈은 이 본능적인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고 신들과 매번 전투를 벌인건지.
하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을 지닌 소년.
마음만 먹었다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었을진대.
‘둘만 있었다면 그랬겠지.’
최초의 불을 머금은 소년과 아그니스.
그 둘만 상대한다면 크게 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접하지 못한다면 접하지 못하는 대로, 은밀하게 유혹하여 타락시키면 그만.
그게 악마의 본분 아니던가.
허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곳엔 그 둘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여자아이······.’
여자아이의 눈을 떠오른 교만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 섬짓했으니까.
‘대체 뭐지, 그 여자아이는?’
*
“으음······.”
세렝게티는 눈을 떴다.
그리곤 즉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왜 잠든거지?’
왕 살해자 야잠.
녀석의 목을 베자 나타난 ‘잠겨있는 신의 손’을 상대하던 와중 기억이 끊겼다.
이후 눈을 뜨니 이곳이고.
‘왕성의 침실······.’
왜 이곳에 누워있는 걸까?
그 괴물은 어떻게 된 거지?
“오오, 승리의 여신께서 눈을 뜨셨다!”
“오오오오오!”
승리의 여신?
한, 두 명이 외치는 소리가 아니다.
성의 내부와 외부 전부가 시끄럽다.
환호의 외침에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였다.
“깨어났느냐?”
이윽고 침실의 안으로 와이저 후작이 들어왔다.
그 옆에는 발란 왕도 함께하고 있었다.
“······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음, 기억이 나지 않나? 하긴, 그 정도의 격렬한 싸움이었으니······.”
발란 왕이 흰수염을 쓸며 이어서 말했다.
“그대는 홀로 프리드릭 왕의 모든 기사를 꺾었다. 세렝게티, 순백의 기사여. 그대가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데 이견이 있는 자는 이제 없을 것이야.”
“예?”
“원하는 게 있는가? 우선 작위를 수여하고 영지를 내어줄 생각이다만······ 그걸로는 부족할 테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들어주지.”
“··· 발란 왕이시여. ‘잠겨있는 신의 손’을 제가 꺾었다는 말씀입니까?”
“잠겨있는 신의 손? 그게 뭔가?”
뭔가 이상하다.
그 괴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제야 세렝게티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들!’
······ 아.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뭐지?
어디로 간 거지?
“으음. 아직 심신이 안정되지 못한 모양이군. 편히 쉬게.”
“그런 게 아닙니다.”
“괜찮네. 살짝 치부를 보이긴 했네만, 그걸 나무랄 자는 없을 것이야. 있다면 왕인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 치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성할 때를 말하는 게야. 전신이 불타며 옷과 갑옷도 함께 타버렸으니······ 괜찮네. 괜찮고말고.”
“······ 예?”
뭐가 타?
옷과 갑옷이 불에 탔다고?
그럼 자신의 속살을, 그 많은 병사들이 다 봤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기억은 일절 없었다.
누군가가 단체로 기억을 조작한 게 아니고서야.
“하하. 승리의 여신이라. 우리 발란 왕국에 크나큰 복이로군. 와이저 후작,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폐하.”
뭘까, 이 분위기는?
어안이 벙벙해진 세렝게티는 눈을 깜빡였다.
“승리의 여신 만세!”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만세!”
“진짜 순백의 기사 만세!”
그러거나 말거나, 바깥에선 계속해서 군중의 열화와 같은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
프리드릭 왕이 물러났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파죽지세로 동대륙을 정벌하던 아이언 왕국.
그곳의 왕이 한 발 뒤로 물러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그것도 약소한 발란 왕국을 상대로 말이다.
대륙 전체가 발란 왕국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 빌어 처먹을!”
쿵!
영웅회의 회의실.
다크스타가 책상을 발로 찼다.
“발란 왕이 미친 거냐?”
······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으니까.
프리드릭 왕이 물러간 이후, 발란 왕은 정식으로 공표했다.
-마도의 탑. 그라고 영웅회! 그들의 배신이 없었다면 대원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기사왕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나 발란 왕은, 발란 왕국은 분개하노라! 군중이여, 도망친 배신자들의 거짓말에 속지마라! 그들은 영웅이 아닌 규탄 받아 마땅한 겁쟁이고 비겁자이니! 우리 발란 왕국은 그 거짓된 영웅들을 공적으로 선포하겠다!
대원정의 배신자들로 ‘마도의 탑’과 그들 ‘영웅회’를 입에 담았다.
미친 건가?
진짜로 미치지 않고서야!
평소라면 개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발란 왕 따위가 발언해봤자 그들의 힘은 영웅회에 미치지 못하므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 발란 왕국은 프리드릭 왕을 물릴 정도의 저력이 있는 곳이 됐다.
“세렝게티······ 순백의 기사가 부활했다니! 무슨 불사조도 아니고!”
그것도 고작 한 명.
세렝게티에 의해서 말이다.
다크스타가 열변을 터트리자, 가만히 듣고있던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세렝게티만이 아니다. 성녀 세아도 있다. 둘이 함께 있으니 발란 왕의 말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대원정에서 죽었다 알려진 둘.
그 둘이 부활해서 돌아왔다.
기사왕의 측근으로 활동한 그 둘이 발란 왕의 옆에 있으니, 판게니아의 모두가 발란 왕의 발언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기사왕의 배신자로 낙인 찍힌 것이다.
적극적으로 부정해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더이상 그들의 거짓말을 믿어줄 사람은 판게니아 어디에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다크스타는 다리를 떨며 손가락을 마구 깨물어댔다.
“무슨 수를 내야 돼.”
“······ 여신교는 모든 지원을 철회한 채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왕국들과의 교류도 끊기고 있고, 거대 상회들도 우리와의 거래를 꺼려하고 있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발란 왕의 발표 직후 영웅회는 고립됐다.
판게니아에서 설 자리를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수를 내기는커녕 이대로가다간 판게니아에 발 붙이고 있는 것도 불가능해질 판국이었다.
당장 여신교의 배상건만 처리해도 재정은 파탄날 테니.
뿐만인가?
동맹관계를 유지하던 왕국들이 하나, 둘 워프를 차단해갔다.
거래하던 상단들은 모든 인력을 빼내고, 거래를 중지했으며, 판게니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사한다.
말라 죽게 생겼다.
살 수 있는 방법을, 답을 찾아야만 했다.
‘답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보지만 마찬가지다.
그러자 불현 듯 모두의 머릿속에 든 생각.
······ 그건 도저히,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짓된 영웅들.
그들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꿈이다.
그래, 꿈일 것이다.
쿵!
다크스타는 다시 한 번 책상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이런 개같은! 빌어 처먹을······!!!”
*
심연의 깊숙한 곳.
이자벨라와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걸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성운을 마시는 별’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뭐?
순간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성운을 마시는 별.
그건 내가 가장 찾아 마지않던 별이자, 빌헬름을 대표하는 최강의 별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