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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23화 (223/317)

223. 정령왕을 소환하다

“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잠겨있는 신의 손이 무엇이던가. 

수많은 신의 손으로 말미암아 신격을 거머쥔 악신이다. 

저것은 교만이 만든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며, 그 가공할 마력은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아가게 만드는 권능과도 같은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럴진대. 

‘타오르고 있다고?’ 

··· 상식 밖의 일이다. 

절대로 탈 수 없는 재료에 불이 붙었다. 

단순한 불이 아니다. 

저 아이는 불 그 자체인 존재. 

처음에는 ‘지옥의 불’이라 여겼다. 

몇몇 지옥의 군주, 혹은 심연 속 강자들이 사용하는 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도 거리가 멀다. 

아니, 감히 지옥의 불 따위로는 저 불을 설명할 수 없다. 

저건 그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것이었다. 

더욱 근원(根源)에 가까운······. 

“태초의 불?” 

······ 아서라. 

교만은 부정했다. 

태초의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그야말로 이야기일 뿐이다. 

태초, 처음으로 옮겨진 불이 이 세상의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악을 멸하고, 멸망조차도 피해가게 만든다는 그러한 불이 감히 실재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 천만 분에 하나, 저 불이 진정으로 최초로 옮겨진 불이라면. 

‘그냥 상성이 아니다. 극상성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신과 악마는 천적이다. 

그러나 천적관계인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하지만 저 불은 악마인 자신은 감히 가까이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과도 같을지니. 

-그만! 제발 멈춰라아아악! 

잠겨있는 신의 손은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그 가공할 마력은 빠르게 연소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놀라운 장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화륵! 화르륵! 

수아아아아악! 

남자아이의 등 뒤로, 거대한 원형의 워프가 생성되었다. 

워프는 불에 타고 있었으며, 

불의 워프를 통해 소환된 그것은 교만 역시 익히 아는 존재였다. 

“어, 어떻게······!?” 

그걸 본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은 처음으로 기함하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도 그럴 게 절대로 소환될 리 없는 게 소환되었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기억보다 더 완전해진 상태로. 

-······음??? 

심지어 소환된 당사자조차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잘 해내고 있겠지?” 

용맥의 안. 

하나는 입구를 서성대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왕님.” 

“두 오버로드께선 잘 해내실 것이옵니다.” 

칼날용신 하나. 

그녀의 곁으로 수많은 마혈족이 집결했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 일만을 넘었고, 모습 또한 예전과는 달라진 상태였다. 

이제는 인간의 형태에 가깝다. 

아예 인간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들의 주신이자, 여왕의 의지 때문에 산란소가 마혈족의 형태를 아예 바꿔버린 것이다.

비록 알에서 태어나고 신체구조도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외형만큼은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래. 루카리아는 몰라도 이세라는 똑 부러진 아이이니······.” 

“주신께서 ‘최초의 불’을 머금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악마 따위는 감히 이세라님의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다. 

이세라. 

마계(魔界) 초열지옥의 군주이자, 망자왕 아흐람을 이어 두 번째 침공을 개시한 총사령관었던 자. 

돌연변이 용신임과 동시에 멸겁의 불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세라는 칼날용신 하나에게 죽었고, 그 심장은 산란소에 먹혀 ‘오버로드’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는 같은 이름을 하고 있으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하물며 주신 란돌프는 이세라의 탄생을 기념해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본래 이세라가 사용했던 지옥의 불 따위는 우스울 정도의 불을. 

최초의 불을 말이다. 

‘아직 최초의 불을 완전히 다루진 못하고 있지만······.’ 

그 불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다면 악마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으리라. 

하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주신께서 맡겨놓은 일들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지구에 터를 잡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올리버라는 자와도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형태가 된 마혈족들은 지구에도 터를 잡기 시작했다. 

이 또한 란돌프의 의지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올리버를 도와서 영국을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진행중이다. 

‘시스템은 우리를 판게니아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전 성녀 세아가 침략의 워프를 통해 지구로 넘어와, 올리버의 심장병을 치료했을 때. 

그때도 시스템은 세아를 ‘적’이라 규정하고 멸하려 했으니까. 

그러나 마혈족은 다르다. 

처음부터 지구의 용맥에서 탄생해서 그런지, 지구로 향해도 시스템은 마혈족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태어난 건 지구의 것이다. 시스템의 허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가?’ 

칼날여왕 하나는 천상의 알에서 부화할 때 진리를 맛보았다. 

하여 ‘시스템’에 관해서도 깨닫고 있었다. 

더불어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도 말이다. 

아니면······ 완벽하지 않아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거나. 

‘어쩌면 평범한 지구인들도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지구인의 계급은 둘로 나뉘어있다. 

판게니아를 오고가는 각성자, 디맨션 워리어. 

그리고 일반 지구인들. 

당연히 일반 지구인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디맨션 워리어의 숫자는 지구인의 0.1%도 채 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각성자의 숫자로 계속되는 침공을 막는 건 말이 안 되니.’ 

고작해야 수십만. 

이번 이세라 침공 때 모습을 보인 각성자도 20만이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그 숫자로 끊임없이 펼쳐질 마계의 침공을 막는다? 

불가능하다. 

분명히 그것을 염두에 둔 안배가 있을 터. 

‘주신께서 말씀하신대로 일반 지구인을 각성시킬 방법을 찾는다.’ 

란돌프는 거기까지 꿰뚫어보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시스템. 

아직 등장하지 않은 안배들. 

그것들을 잘 이용하면, 또 다른 각성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게 가능해진다면 지구에선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나저나······.’ 

고개를 좌우로 턴 하나가 다시금 용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세라를 걱정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정령왕 아그니스의 힘은 제대로 휘둘러야할텐데······.’ 

정령의 탑. 

그 탑의 정상에, 정령계를 좌지우지하는 정령왕들이 있다.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도 그중 한명. 

“태평해보이는군, 아그니스.” 

“이퀘렐. 오늘도 시비를 걸 셈인가?” 

물의 정령왕 이퀘렐이 요양 중인 아그니스를 찾아왔다. 

아그니스는 현재 펄펄 끓는 불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상태. 

“어차피 물은 다 증발하고 없는데 어떻게 그게 온천이지?” 

“역시 시비를 걸 셈이었군.” 

“아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다. 아그니스.” 

“이런걸 ‘기분을 낸다’라고 하는 거다. 이퀘렐.” 

“······ 받아라. 불을 억제해줄 거다.” 

물의 정령왕 이퀘렐이 천으로 된 수건 한 개를 넘겼다. 

그걸 본 아그니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수신(水神)의 수건? 이건 네 보물 중 하나 아니던가?” 

“누가 준다고 했나? 빌려주는 거다.” 

“왜?” 

“계약자가 죽은 뒤로 상심한 듯 보여서 말이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아, 이건······.” 

아그니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이 온천은 천상에서 흘러온 오염원을 모아둔 곳이다. 

너무 오랫동안 오염원이 쌓여있어서, 겸사겸사 그것들을 치워버릴 겸 아그니스가 몸을 담근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다. 

게다가 ‘수신의 수건’으로 진짜 온천욕을 즐겨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고맙군.” 

“그리고 온천욕은 무장을 해제하고 즐기는 행위다. 나의 아름다운 물의 정령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천에 몸을 담그곤 하지.” 

“그런가?” 

“야만적인 불의 정령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즐겨보거라. 오랜만에 중간계에 나가서 즐거웠을 텐데, 그 상실감도 백분 이해한다.” 

온천이 상실감을 치유해줄 것이다. 

물의 정령왕 이퀘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실감이라. 

딱히 그런 건 없었지만, 아그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퀘렐. 그녀와 말싸움을 해서 이긴 적이 없었으니. 

스팟! 

아그니스의 전신을 두른 무장들이 해제됐다. 

이어 ‘수신의 수건’을 허리에 두르자, 치솟던 불길도 잠잠해졌다. 

동시에 근육질의 몸매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모든 불을 제어하진 못했지만 이정도면 온천의 물을 전부 증발시키진 못하리라. 

예상대로 증발했던 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으음.” 

“어떠냐, 아그니스. 온천에 몸을 담가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래. 불의 정령들은 평생 꿈에도 못꿀 안락함이다.” 

“불의 정령들은 용암 온천을······ 음?” 

“응?” 

그때였다. 

화르륵! 

갑자기 불의 워프가 등장하며 아그니스를 빨아들이기 시작한건. 

이어 순식간에 아그니스가 워프의 안으로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온천. 

이퀘렐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 강제소환?” 

정령왕을 강제소환하다니! 

정령탑이 세워진 뒤로 전례가 없던 일이다. 

일전 돌연변이 이세라의 소환도 거절하던 아그니스 아니던가. 

믿기지 않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대체 누가?’ 

머리가 불로 타오르는 나신의 남자. 

수건 하나만 허리에 두른 채로 아그니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왜 자신이 강제소환을 당했단 말인가. 

불의 정령왕이 된 뒤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강제로 소환된 정령왕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강제로 소환하려면 정령왕을 뛰어넘는 속성 친화력을 지녀야 하는데, 근원 속성의 주인들보다 더한 친화력을 가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설령 불의 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한데. 

“······ 왜 나신?” 

“저 아저씨 이상해.” 

두 아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에 고개를 돌린 아그니스는 그제야 자신을 강제소환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너는······ 그렇군. 이세라의 계약을 계승했구나. 

더불어 왜 자신이 소환됐는지도 알게 됐다. 

물론 여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지옥의 군주 이세라의 계약이 저 붉은 소년에게 계승된 건 확실해보였다. 

더불어 계약의 힘이 훨씬 더 강화됐다. 

‘어이가 없군.’ 

정령은 중간계로 소환되었을 때 힘이 약화된다. 

지옥의 군주 이세라도 자신의 힘을 고작 2할밖에 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다르다. 

최소 5할.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느냐? 

이런 소환자는 처음이었다. 

하여 아그니스가 물었다. 

그러자 이세라는 루카리아의 눈을 손으로 가린 채,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옷을 좀 입어줬으면 좋겠어. 루카리아의 정서에 좋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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