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벌레들이여, 고개를 조아리거라
화아아아아악!
세렝게티의 전신을 솟구치는 순백의 검기.
그 찬란함과는 반대로 세렝게티는 깊은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하다.’
네 명의 기사를 꺾고, 마침내 남은 마지막 기사.
왕 살해자 야잠!
그는 명성만큼이나.
아니, 명성 이상으로 강한 자였다.
여태껏 세 명의 왕을 죽이고 그 목을 프리드릭 왕에게 바쳤다지.
수많은 기사의 보호를 단독으로 뚫고 나가 왕의 목을 베었다는 건 그의 검술이 극에 다다랐다는 방증.
“누구한테 검을 배웠지?”
“······.”
그리고 세렝게티와 마찬가지로, 왕 살해자 야잠 또한 제법 놀라는 중이었다.
인간계에서 자신의 검을 이 정도로 받아내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별을 먹기 이전의 문제다.
세렝게티의 순수한 검술.
그 자체가 여태껏 전전한 전쟁터의 끄나풀들보다 훨씬 고차원이었으므로.
야잠은 쉬지 않고 검을 단련한 달인이다.
이름난 검의 명장들도 야잠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스승이 제법 검을 다룰 줄 알았나 보구나. 허나, 잘못 배웠다.”
“······.”
“무언가를 따라 그리고는 있지만 조잡하다.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친 스승의 문제인가, 아니면 배우고도 따라갈 수 없었던 제자의 문제인가?”
야잠은 고개를 갸웃했다.
초고차원의 검술임은 분명할진대, 그 형태나 틀이 이상하리만큼 조잡하다.
마치 배우다 만 것 같다.
평범한 자가 검을 맞대면 당연히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자신 같이 볼 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단번에 문제를 잡아낼 터였다.
‘보통 이런 경우는 스승이 문제이지.’
스승의 욕심에 의해, 혹은 스승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게 티가 나는 것이다.
쯧쯧.
야잠은 가볍게 혀를 찼다.
“누가 스승인지는 모르겠다만······.”
“배운 게 아니다.”
“그럼?”
“나 스스로 따라 그렸을 뿐.”
세렝게티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휘두르며 그리고 있는 검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빌헬름의 검, 천지개벽(天地開闢)을 그저 따라 하고 있을 뿐임을 말이다.
“남을 따라 하는 것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단다, 아이야.”
야잠은 안타까운 목소리를 입에 담았다.
검을 맞대어보니 알겠다.
세렝게티의 잠재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강해질 여력이 있다.
그걸 누군가가 끌어내 줄 수만 있다면, 창공으로 훨훨 날아갈 인재.
야잠이 여태껏 못 본 부류의 천재였다.
스스로 따라 한 것치곤 그 틀이나 형태에 대한 이해를 제법 하고 있지 않나.
‘이런 부류의 천재는 같은 부류의 천재를 만나야 더 강해질 수 있지.’
자신은 아니고, 아마도 그녀의 스승 또한 아닐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조를 파악하고 전체를 펼쳐낼 수 있는 종류의 천재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면······ 그녀의 천재성으로 보건대 지금쯤 자신을 훌쩍 뛰어넘지 않았을는지.
“자,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어울려보자꾸나. 서로가 죽고 죽이는 거다.”
야잠이 검을 쥐었다.
재능은 아쉽지만, 전쟁터에서 만난 이상 죽여야만 한다.
그게 전쟁이니.
*
“······.”
“······.”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일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음에도 숨 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몰두하고 있었다.
세렝게티와 야잠의 싸움을.
두 빛이 쇄도하는 장면을.
도저히 같은 인간의 싸움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마치······.
“신들의 싸움······.”
신들이 대결을 펼친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
세렝게티는 승리의 여신이었다.
연달아 패배한 발란 왕국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여신!
“······ 와이저 후작.”
발란 왕이 작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압도되고 있었으나,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 예, 폐하.”
“미안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발란 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발란 왕국의 최강자는 사이엔 공작의 기사인 바투스도, 자신의 직속기사인 압둘라도 아니었다.
세렝게티였다.
처음부터 세렝게티를 내보냈다면 어땠을까.
그럼 바투스가 죽거나 압둘라가 팔을 잘리는 부상을 당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들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이 보는 눈이 없어서 생긴 일이었으므로.
“아, 아닙니다, 폐하.”
와이저 후작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잘못 본 건 발란 왕만이 아니다.
세렝게티가 무력을 선보인 뒤로, 젊은 사이엔 공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예 고개를 내리깔고 시선을 피하는 중이다.
바투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
바투스 백 명을, 천 명을 데리고 와도 세렝게티 하나에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를 생색낼 수도 없다.
와이저 후작도 그들만큼이나 자신의 딸을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발란 왕국은 기사왕에 대한 입장을 달리할 것이다. 대원정은 실패한 게 아니며, 마도의 탑과 그 영웅들이 가짜임을 밝힐 것이야.”
“······ 괜찮으시겠습니까?”
와이저 후작이 심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마도의 탑과 현자들.
그리고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는 영웅회.
뿐만이 아니다.
대원정의 실패를 발판삼아 급성장한 세력은 한, 둘이 아니었다.
만약 발란 왕국이 대원정의 전모를 파고든다면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발란 왕의 표정엔 결의가 가득했다.
“그들은 거짓된 소문을 뿌리고 대원정과 기사왕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폐하.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기사왕의 싸움은 항상 그러했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어.”
쉬운 건 없다.
발란 왕은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이다.
기사왕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 프리드릭 왕과 전쟁을 벌이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
“이겼······ ?!”
그 순간이었다.
하나, 둘 들려오는 단말마들.
대결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부러진 검을 쥐고 있는 세렝게티가 보였다.
“저건······?”
하지만 세렝게티는 패배한 게 아니다.
틀림없이 야잠의 목을 잘라냈다.
한데, 야잠의 목을 잘라내자.
-대단하군.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 텐데.
꿀렁.
꿀렁.
잘려나간 목에서 검은색의 기름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그 검은 기름의 속에서 수많은 손이 튀어나와, 잘려나간 얼굴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겨있는 신의 손’이다. 여신의 기사여, 다시 싸워보자꾸나.
저게 신의 손이라고?
저건 아무리 봐도 신이 아닌 악마에 가깝다.
가공할 마력.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독기!
“전부 물러나라!”
세렝게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화아아아아악!
이후 그녀는 별의 기운을 해방하며 독기에 맞섰다.
*
잠겨있는 신의 손.
그 정체를 알아본 순간, 세렝게티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신격을 지녔던 신들의 손······!’
대체 몇 개의 손이 저 안에 있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확실한 건 모두 일전 신이었던 자들의 손이라는 것.
수많은 별을 야잠의 안에 꽉꽉 눌러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잠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잠겨있는 신의 손’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프리드릭 왕.’
세렝게티가 싸늘한 눈빛으로 프리드릭 왕을 노려보았다.
저런 괴물을 섞어놓은 이유가 무엇이겠나.
처음부터 프리드릭 왕은 발란 왕국을 멸망시킬 작정이었다.
애초에 정해진 결말이다.
그는 단지 발란 왕국의 발악을, 게임을 즐겼을 뿐이고.
‘뭐 하는 거지?’
하지만, 이상하다.
게임을 즐긴 자 치고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설마 잠겨있는 신의 손이 튀어나오리라 예상 못 한 건가?
‘다른 변수가 나타난 거다.’
그게 뭘까.
대체 무엇이기에, 프리드릭 왕은 굳어있는 것인가.
하지만 생각을 이어갈 여유 따윈 없었다.
“크읏······!”
야잠.
아니, ‘잠겨있는 신의 손’은 미치도록 강했으니까.
저 괴물은 닿는 즉시 생명을 앗아가는 독기를 마구 뿜어대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왕성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갈 터.
그 독기를 막는 것만으로도 세렝게티는 한계였다.
“멈추거라.”
······ 그때였다.
그녀의 눈앞에, 웬 붉은 머리를 한 남자아이 한 명이 나타난 건.
그 아이는 뒷짐을 진 채로 ‘잠겨있는 신의 손’ 앞에 당당하게 나섰다.
순간, 세렝게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렇게 눈에 띄는 아이가 섞여 있었다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졸음이······!’
그런 의문을 가지자마자, 깊은 수마가 쏟아졌다.
곧이어 세렝게티는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이후 힐끗 잠든 세렝게티를 쳐다본 붉은 머리의 남자아이는, 다시금 ‘잠겨있는 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고개를 조아리거라.”
-무엇이냐, 너희는?
“어허. 어디 악마 따위가 신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느냐.”
-신?
“우리는 세상의 균형자들. 너희 같은 벌레들을 멸하는 용신이니라.”
엣헴.
양쪽 허리에 손을 얹은 이세라가 가슴을 쭉 편 채로 미소를 지었다.
*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은 전장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세렝게티가 야잠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야잠을 죽여봤자 ‘잠겨있는 신의 손’을 불러들일 뿐이었으니.
수많은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괴물을 인간이 감당할 수는 없다.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린 뒤로 프리드릭 왕은 좀처럼 이 게임을 즐길 수가 없었다.
발란 왕국의 발악을 지켜보며 그들을 몰락시키고자 하였거늘.
‘신격이다.’
그제야 저 두 아이가 ‘신격’을 지닌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악마인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존재는 신격밖에 없다.
그러나 의아한 일이다.
‘한 번도 못 본 신격이다.’
판게니아의 모든 신격을 알고 있다 자부하는 교만이었다.
하지만 저 두 아이와 같은 형상의 신격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아이의 형태를 유지하는 신들이 있기는 했지만 저 둘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뭘까.
확실한 것은, 신과 악마는 상극이라는 것이다.
먼 과거 신들의 전성기에 악마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들을 제지할 신들은 모두 소멸하거나 힘을 잃었다.
마지막 남은 여신조차도 죽지 않았나.
하물며 그때보다 악마들의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
‘그나마 나를 막아설 수 있는 존재는 투신 카라스와 용신 아인하사르뿐이지. 하지만 그 둘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도 빠듯할 터.’
신격을 회복했으나 아직 영역을 벗어날 정도로 여유롭진 않다.
말 그대로 신격만 회복했을 뿐, 그들이 향유하던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
그럼 누굴까.
의아해하며 프리드릭 왕은 두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 용신?”
그리고 깨달았다.
정체모를 신격.
저 두 아이가 용신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 세계의 용신은 아니다.
판게니아를 수호하는 용신들은 그도 꿰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천상의 수호자들인가?’
프리드릭 왕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만약 저 용신들이 천상의 수호자들이라면, 이 일은 결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리 그래도 잠겨있는 신의 손을 쉽게 처리하진 못······.’
-크아아아아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