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대원정은 실패한 게 아니다
라이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암흑.
모든 게 멈춰있는 듯 바람 한 점 없는 곳.
“위치변환 계라.”
심연은 그곳을 점거한 주인에 따라 특성을 달리한다.
이곳은 입장한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놓는 위치변환의 계(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특성을 보유한 심연의 주인들은.
‘5등급 심연. 파편 보유자치고는 형편없군.’
수많은 심연을 정복하여 그곳의 주인들을 말살해온 라이가는, 그 나름대로 심연의 등급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5등급은 가장 낮은 측에 속한다.
입장자를 나눠놓는 건 그만큼 주인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었으므로.
다만, ‘멸망의 파편’을 보유한 괴물이 5등급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파편을 보유했다고 모두 강한 건 아니다만······.’
그렇다면 파편을 갖게 된 지 얼마 안 된 놈일 가능성이 크다.
파편의 힘을 온전하게 흡수하고자 이런 특성을 심어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망이 크다.
이래서야 사냥할 맛도 안 날 터인데.
‘최소 3등급 심연은 될 줄 알았거늘.’
3등급부터는 상당히 강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괴물들이 보통 3등급에 속했다.
예컨대 수련자의 산에서 등장했던 바알.
놈은 심연을 만들자마자 수십만의 사람들을 모아두었다.
껍데기에 불과하고,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한데 모아둔 채 생명을 흡수하려고 했다.
바알의 껍데기라면 마땅히 3등급 이상으로 측정할 수 있으리라.
그억.
그어어억.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묘한 신음.
고개를 돌리자, 두 다리로 서 있는 거대한 ‘눈’이 있었다.
“혼종?”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곳은 심연의 안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심연 안에 ‘혼종’이 있는 건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떠돌이 괴물 따위가 용케 심연을 지배했군.”
심연 안을 떠돌아다니는 괴물들.
혼종 역시 그중 하나였다.
새롭게 입장한 ‘생명체’들이 심연의 독에 오염되어 변화한 게 바로 혼종이다.
저 거대한 외눈은 심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고.
지능이 퇴화하고, 힘도 약하기에 그저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가장 흔한 괴물들.
혼종이 이렇게 다수로 나타난 걸 보면, 이 심연의 주인 또한 혼종인 모양이었다.
제대로된 사냥을 할 수 있나 싶었는데 고작 혼종이라.
쯧.
작게 혀를 찬 라이가가 말했다.
“너희가 과연 나의 ‘가호’를 뚫을 수 있을까?”
가호.
그것은 라이가를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것.
파편의 오염도 감히 라이가를 어찌할 수 없는 이유다.
고작 혼종 따위로는 가호의 단단한 벽을 뚫을 수 없다.
‘궁에선 사용하지 못했다만, 이곳에선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쿠릉.
순간 라이가의 신체가 격동했다.
잘게 떨리며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팔가의 수련장에서 ‘염소’와 대결할 땐 사용할 수 없었던 힘.
그 힘을 개방하면 궁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직 ‘멸망의 파편’을 사냥할 때만 사용하겠다고 약조했기에, 이곳이 아니면 쓸 수 없다.
만약 염소와의 대결에서 이 힘을 사용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여 그 봉인된 힘을 라이가는 풀어헤쳤다.
5대에 걸친 5문(門)의 봉인.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 중문(中門) 중 첫 번째 문인 동문!
“··· 최대한 빨리 끝내자꾸나.”
*
스악!
카칵!
암기가 빗발치는 소리.
펑!
숨겨둔 독주머니가 터지고, 빛과 같은 속도로 상대를 절단내려 해보지만.
‘······ 통하지 않아?’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샬라.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숱한 전장을 돌아다니며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도륙 낸 그녀였다.
그녀가 마음먹고 죽이지 못한 인간은 없었으며, 성인이 될 즈음엔 이미 전장에서 ‘죽음의 이리’라 불리었건만.
“아······.”
모든 걸 쏟아부었음에도 멀쩡한 세렝게티를 보며 샬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샬라는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단순히 무력의 강함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올곧다.
저 눈은 너무나도 올곧았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순백의 여인.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저 여자는,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어쩌면 그 이상의 전장을 누빈 기사였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Knight).
그들은 멍청하다.
생명이 오가는 전투에서 명예 따위를 중요시하는 자들이었다.
발란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압둘라도 독을 상상치 못한 것처럼, 안일하기 그지없는 바보들에 불과했다.
수많은 기사를 만나고, 죽여봤지만, 그들은 모두 비슷했다.
자신이 여자라서 무시하다 명을 달리한 기사들도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다르다.
‘한 치의 틈이 없어.’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누르는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틈을 주지 않는다.
모든 수를 읽고 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기사라면 샌님처럼 수련장에서 정직하게 검이나 휘두르는 족속 아닌가?
“모든 수가 얄팍하군.”
“······ 뭐?”
“너의 검에 담긴 감정. 그건 얄팍한 증오심에 불과하다. 혼자서만 지옥을 헤쳐왔다고 생각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헤쳐온 지옥은 진짜 지옥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렝게티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다른 기사와 다른 이유.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 너는 그럼 진짜 지옥을 겪어봤다고?”
샬라는 비웃고 말았다.
자신 역시 지옥에서 살았으니까.
어린 여자아이가 전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 자체가 지옥이다.
프리드릭 왕은 그런 자신을 구원한 구원자였다.
삶과 힘을, 그리고 이름을 주었다.
뭘 안다고 지껄이는가.
강렬한 살기 속에서 세렝게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기사왕의 옆에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우리 ‘원탁의 7기사’는 기사왕과 함께 지옥을 헤쳐나갔다.”
······ 원탁의 7기사들.
사실 정식 명칭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불렀을 뿐이지.
기사왕의 최측근이며, 기사왕만을 보필하였던 일곱 명의 기사들.
세렝게티도 그중 한 명이었다.
비록 가장 강했던 건 아니지만, 그 믿음과 신뢰만큼은 누구보다도 강렬했기에.
끝내 마지막까지 기사왕 빌헬름을 보필할 수 있었다.
“기사왕께서 이룩한 수많은 과업들. 그 하나하나가 지옥이 아니었던 것은 없었지. 허나, ‘대원정’만은 실로 지옥이라 부를 만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데없는 이야기.
이에 샬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원정이 지옥이었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세렝게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당초 샬라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들어라. 우리가 상대할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배신의 틈바구니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오는 괴물과 대적해야만 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인고의 시간이었지.”
사방이 적이었다.
누가 배신할지 알 수 없었고, 죽은 자로 변신해서 공격해오는 괴물도 있었다.
잠을 자면 몽마(夢魔)가 괴롭혀왔으며 눈을 뜨면 옆에서 자던 동료가 죽어있다.
시간의 흐름도, 사고의 흐름도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마계.
그곳의 여덟 지옥은 정말 지옥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진정 대원정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
세렝게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와 기사들을, 귀족과 사이엔 공작을, 왕을.
그들 모두가 대원정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들만이 아닌 세상의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 기사왕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다르다.
틀렸다.
이제는 잘못된 이야기를 바로잡아야할 때였다.
“기사왕께선!”
하여, 세상을 향해 세렝게티는 목놓아 소리쳤다.
“지옥의 왕을, 마왕을 죽였다!”
“······!!!”
일순간, 모두가 어깨를 움찔했다.
기사왕 빌헬름이 마왕을 죽였다니!
이는 알려진 사실과 완전 반대의 것이었다.
대원정은 끝내 실패했다고 알려졌으니까.
그러나 세렝게티는 마계의 대원정을 직접 겪은 기사다.
기사왕의 최측근인 그녀가 거짓을 말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세렝게티의 기백에 압도된 탓이다.
“‘마도의 탑’의 현자들과 한때 ‘8영웅’이라 불리었던 놈들의 배신 속에서도, 수많은 용병과 병사들의 이탈 속에서도, 기사왕께선 묵묵히 여덟 개의 지옥을 뚫고 나가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었다.”
마도의 탑의 현자들.
그리고 8영웅들.
그들은 대원정에 참가한 이후 더 크게 세를 부풀린 자들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대원정이 실패했다고 여겨지게 만든 이들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소문들이 거짓이었단 말인가?
사실은 배신자였다고?
모두의 두 눈에 혼란이 가득찼다.
이어, 세렝게티는 젊은 사이엔 공작을 바라보았다.
“실패했다고? 소모되었다고? 그리하여 발란 왕국이 약해졌다 말했나?”
“······.”
움찔!
사이엔 공작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대한 짐승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또한 왕의 앞에서 가장 크게 대원정이 실패했다고 말한 사람이 그였으니.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모두가 은연중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렝게티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발란 왕국의 용맹한 기사들은 모두 끝까지 헌신적으로 기사왕을 보필하였느니라. 헛된 희생 따윈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기상은 아직도 발란 왕국을 수호하고 있다. 그러니!”
이어 세렝게티가 시선을 옮겨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을 바라보며.
“그러니 지금부터 보여주마. 기사왕과 우리가 어떻게 지옥을 헤쳐나가 마왕을 죽였는지.”
검을 겨눴다.
*
‘재밌군.’
프리드릭 왕은 이곳 발란 왕국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재미’를 느꼈다.
세렝게티가 샬라를 압살하고 쓰러트려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녀의 영혼이 프리드릭 왕을 들뜨게 만들었다.
‘마치 신의 영혼처럼 밝게 빛나지 않느냐.’
갖고싶다.
저 영혼을.
어째서 그녀가 ‘순백의 기사’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만큼 올곧은 자는 좀처럼 찾기 힘들 테니.
하지만 그래서 더욱 궁금한 건.
‘··· 기사왕, 빌헬름이라.’
저런 기사가 따르는 자.
기사왕 빌헬름에 대해서다.
대체 어떤 자였을까.
얼마나 찬란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쉽다.
탐욕인 줄 알고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거늘.
아닌 줄 알았다면 직접 찾아가서 영혼을 회수했을 텐데.
“끄억!”
··· 단말마와 함께 또 한 명의 기사가 꺾였다.
파죽지세.
그의 기사들은 세렝게티를 막지 못했다.
“네가 나서야겠구나.”
“예, 폐하.”
프리드릭 왕이 옆에 선 자에게 말했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기사라면, 한 명뿐이다.
자신이 직접 완성시킨 괴물.
원래부터 최강이었으나, 수많은 신들의 신체를 먹여 더욱 강해진 기사!
왕살해자 야잠.
그라면 저 세렝게티도 무릎을 꿇으리라.
‘······ 한데.’
순간 프리드릭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가 계속해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 게 섞여있군.’
뭐지?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묘한 게 좌중 속에 섞여 있다.
있어선 안 될 것이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교만의 악마도 처음 보는 것.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심지어 그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뭐냐, 저 꼬맹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