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왕
이른 아침.
판게니아로 로그인한 한국 영웅연합의 연합원들 전원이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정말로 이곳이 한국의 거점도시란 말인가요?”
“룬델라가 한국의 거점이 되다니······!!”
“흐흑!”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는 사람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연합장 박태우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우리도 거점도시가 생겼다.’
유적 도시 룬델라!
이세라와의 전쟁이 끝나자 ‘오주력’은 약속대로 유적도시 룬델라를 양도한 것이다.
이후 거점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모든 준비를 끝낸 연합이 마침내 도시로 입성한 것이었다.
《‘룬델라’의 영주 ‘박태우’님이 입장했습니다.》
《신비 ‘룬델라의 지배자(활성화 시 모든 능력치+1)’를 획득합니다.》
《시민들에게 도시의 영주가 되었음을 선포하십시오.》
《315,779명의 시민이 새로운 영주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현재 세율 35%》
《미확인된 발굴된 유적 550점이 존재합니다.》
《도시의 주인만이 ‘유적던전’을 열 수 있습니다.》
《정식으로 등록된 ‘영웅 연합원’은 도시 내에서의 모든 세금이 면제됩니다.》
······ 설마 싶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오직 도시의 주인만이 볼 수 있는 내용들.
“연합장님, 우십니까?”
“야야, 넌 눈치도 없냐. 조용히 해.”
“빌어먹을. 이제야 한국도 기 좀 피고 살 수 있겠네.”
박태우가 슥슥 눈물을 닦아냈다.
참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으니까.
‘앞으로 한국이 무시당할 일은 없을 거다.’
거점도시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나 강자의 유무보다 훨씬 중요하다.
현재 국가의 국력은 판게니아에 ‘거점도시’가 있느냐, 없느냐로 나뉜다.
거점도시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성장 차이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이세라가 침략해올 때, 거점도시가 있는 국가들을 위주로 다크스타가 도움을 주려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성장 가능성.’
세금을 걷고, 골드로 더 좋은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
도시의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치와 보상을 보장한다.
덕분에 레벨이 낮은 초보자를 안정적으로 육성할 수 있으며, 한계레벨이 올라간 지금은 더더욱 중요해진 게 도시의 던전이었다.
뿐만인가.
‘도시의 주인들만이 알 수 있는 진짜 노른자 정보들. 도시 단위의 거래, 협상. 병사를 육성하고 여태껏 꿈도 못 꿨던 대단위 던전 공략을 시도할 수도 있지.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여태껏 하청만 줄줄이 맡아온 한국이다.
다른 도시의 주인들이 특별한 ‘레이드 보스’를 사냥할 때, 고용되어 돈 몇 푼 받는 게 전부였던 나날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주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골드도 많고, 받쳐줄 병사도 있으므로.
“그런데 연합장님. 아니, 영주님. 6영웅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쩌겠어. 오주력이 주인으로 있을 땐 아무것도 못 하던 놈들이.”
연합원들이 중얼거렸다.
이전 룬델라의 주인이 마스터였던만큼, 그가 속해있던 ‘영웅회’가 가만히 있겠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룬델라를 ‘오주력’이 차지했을 땐 아무것도 못 하던 영웅회였다.
오주력이 정식으로 이전한 도시를 과연 영웅회가 건드릴 수 있을지.
“오주력과 동맹을 맺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래.”
박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적으로 맺은 동맹은 아니지만 오주력은 단순히 도시만 양도한 게 아니다.
“그 증거는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결국 6영웅회가 움직이긴 할 텐데요.”
이 역시 당연한 물음이었다.
거점을 얻어서 기쁘긴하지만,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이에 박태우가 미소지었다.
“워프 연결지를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워프 연결지요? 어디······.”
급히 워프로 다가간 연합원들은 기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6영웅회와 관계된 워프는 전부 끊겨 있었지만,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컥!”
“미친. 실화냐?”
“‘미궁 도시’······ 가 있네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서로의 도시가 워프로 연결되어있다는 건 양쪽이 합의했다는 소리다.
동맹을 맺었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워프를 확인하면 영웅회도 감히 마음대로 굴지는 못하리라.
백왕 산하의 주력이자, 심연 미궁에서 아무도 처리하지 못했던 ‘검성 라일리’를 처단한 게 오주력이었으니.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 거물을 쉽사리 건드릴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궁금해서 참았습니다만, 영주님. 오주력과는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맞습니다. 선뜻 도시를 내어줄 정도라면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이쯤 되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합원들 전원의 눈빛이 박태우에게 향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박태우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다.”
“예?”
“형 뭐요?”
박태우의 발언은 모두를 당혹게 만들었다.
실제 박태우도 오주력을 직접 본 적은 없다.
허드슨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전부.
그러나 굳이 관계를 정리하자면, 왠지 모르게 형님이라 부르고 싶었다.
“··· 우리가 전적으로 따라야 할 분이시다. 이세라의 마성에서 한국을 구한 것도, 이 룬델라를 주신 것도 모두 오주력님이시니.”
그 은혜는 목숨을 몇 개나 바쳐도 부족하다.
하지만 오주력의 아우를 자청하기에 지금 자신은 너무 볼품없다.
더 빠르게 강해져야만 한다.
필사적으로 힘을 얻어야만 약간의 은혜라도 갚을 수 있을 터.
‘이 도시 하나로 끝낼 생각은 없다. 판게니아의 정세는 혼란하기 그지없지. 이 난세는 우리가 힘을 쥘 절호의 기회가 될 거다.’
비상(飛上).
하늘을 날아올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서리라.
다시는 과거와 같은 굴욕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한국도, 연합도, 자신도.
정점에 서리라.
그리하여 은혜를 갚으리라.
꽈아악.
박태우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박태우를 바라보며.
‘역시 인간은 재밌구나.’
일곱 번째 지옥의 군주, 최강자 바사라가 미소를 지었다.
현재 그녀는 각성자의 몸을 빼앗아 인간으로 위장한 상태.
한국의 연합에 잠입하고, 지구의 몸을 빌려 판게니아로 ‘로그인’하는 것조차 성공했다.
그래서일까.
여신이 율법으로 새겨놓은 차원 간의 간섭력에 대해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이게 가능한 건 바사라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더 파고들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딱히 흥미가 일지 않았다.
‘조금 도와줘 볼까?’
지금은 그보다 이 상황이 더 재밌었으니까.
오주력 란돌프는 이세라를 죽인 용신의 주인이자, ‘빌헬름’의 전신이다.
그를 ‘형님’으로 부르고 따르는 박태우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과연 아우를 자처할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재질 자체는 나쁘지 않아.’
한 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물론 이것도 빌헬름을 정식으로 만나기 전까지의 여흥거리에 불과하다.
빌헬름이 그녀가 바라는 곳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시간떼우기 말이다.
빌헬름을 떠올린 바사라의 뺨에 약간의 홍조가 일었다.
‘어차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다, 빌헬름.’
*
발란 왕.
그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건너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 하나로 인해 주변의 모든 기사와 신하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아이언 왕국의 주인, 프리드릭 왕.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벌써 두 개의 국가를 멸망시킨 괴물!
그의 다음 타겟이 바로 이곳, 발란 왕국이었으니.
‘광인이라는 소리는 들었다만, 고작 여섯 명으로 입성하다니······.’
간이 배밖에 나온 건가?
아니면 발란 왕국을 무시하는 건가.
프리드릭 왕은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의 인원으로 발란 왕국에 발을 들였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 다섯과 함께 말이다.
여기서 놈을 죽이면 전쟁은 종식될 거다.
그러나······.
‘두렵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발란 왕은 백전노장이다.
수많은 강자들과 어울리며 전쟁에 몇 번이나 참가해봤다.
하지만 여태껏 저런 자는 없었다.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숨도 못 쉴 것 같은 자는.
“······ 항복을 권유하러 온 건가?”
“하하! 그런 재미없는 짓을 하러 짐이 직접 온 것 같나?”
툭.
프리드릭 왕이 탁자 위로 두 발을 올렸다.
“저, 저런······!”
“예의없는 자를 보았나!”
발란 왕의 가신들이 애써 목소리를 높였지만, 발란 왕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아이언 왕국과 발란 왕국의 차이는 현격하다.
영지의 숫자도, 병사의 숫자도, 국력 자체가 비교가 안된다.
그럼에도 먼저 공격해오지 않고 직접 왕국을 찾아왔다.
“그럼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가, 프리드릭 왕.”
“바라는 건 없다. 다만, 기회를 주려는 게다.”
“기회?”
교만, 프리드릭 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발란 왕국은 예로부터 기사들의 왕국이라 불린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다섯과 짐의 기사 다섯이 싸우는 거다. 목숨을 걸고.”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건?”
“너희가 과반으로 이긴다면, 그래. 숨 쉴 자유를 보장해주마.”
“······ 숨 쉴 자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아니다.
저건, 항복을 받아주겠다는 소리였다.
진짜로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발언.
“짐과 제대로된 ‘내기’를 하기엔 발란 왕국은 걸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군. 그러니- 숨 쉴 자유라도 보장해주려는 게다.”
“··· 우리가 지면 무엇을 내놔야하지?”
“내놓는다? 방금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걸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다고.”
프리드릭 왕이 씨익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너희가 지면, 그 순간 멸망이다. 인간 한 명,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쑥대밭으로 만들어주지.”
“말도 안 되는 요구로군.”
“아아, 이 정도의 은혜는 실로 말이 안 되지. 허나, 이 대결이 짐의 흥미를 일게 한다면, ‘침략’은 없던 걸로 해줄 수도 있다. 때마침 괜찮은 자질들도 둘 보이니.”
프리드릭 왕의 시선이 발란 왕의 건너편으로 향했다.
다른 인간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저 두 명만은 달랐다.
“―대원정에 참가한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리고 죽었다고 알려진 세아 성녀라. 제법 준비했군.”
“우리를 공격하면 여신교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프리드릭 왕.”
“여신교? 하하! 이빨 빠진 여신교가 짐을 적으로 돌릴 것 같나?”
여신교는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대종교다.
판게니아 전역에 손을 뻗쳤으며, 그 힘은 제국과 비견된다 할 정도였다.
감히 프리드릭 왕은 그런 여신교를 ‘이빨 빠진 곳’으로 비하하며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두렵지 않고,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대결은 내일 정오에 개시한다. 부디, 짐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마.”
*
심연.
가장 깊고, 어두운 곳.
그곳에서 거대한 존재가 눈을 감은 채 몸을 움찔거렸다.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가 침범해온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누군가가 침범해 왔더라도, 이 괴수가 움직일 일은 없다.
수많은 심연의 주인들을 먹어치우고, 다수의 심연을 보유해 ‘심연왕’이라 불리게 된 존재가 바로 이 괴수였으니.
그러나.
침범해온 자들 중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는 코를 찌를 정도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쿠우웅.
하여 심연왕은 거대한 동체를 들어올렸다.
하아아아!
스아아아아아!
심연왕이 움직이자 심연 역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연왕은 감겨있던 눈을 떴다.
《‘신의 살갗 혼종’이 당신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