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째 성좌
“······.”
“······.”
적막이 맴도는 방.
라이가 기사단장과 나는 나란히 앉은 채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왜 찾아온 거지?’
잠깐 대화 좀 나누자며 먼저 다급하게 찾아온 건 라이가였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은 뒤로는 별말이 없다.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왜 찾아왔느냐 묻는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젯밤의 일로 찾아온 건 분명해 보이는데.’
팔가의 수련장에서 한판 붙은 일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고의 절망’이 발동한 뒤의 기억은 나도 없었다.
분명한 건 둘 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외관상 큰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겉보기엔 말이지.’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나만 하더라도 온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실낱같은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 부러진 오른팔은 아직도 감각이 없다.
그리고 그건 라이가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 다 멀쩡한 척 연기하고 있을 따름.
‘태고의 절망으로 인해 전투가 중지됐다. 결국 라이가는 후퇴했고, 그와 관련된 일을 묻고자 나를 찾아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그렇다면 라이가가 침묵을 유지하는 이유도 얼추 알 것 같다.
어제의 일을 내가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떠보기 위함이겠지.
솔직히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겠지만, 그렇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티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턱을 괴며 말했다.
“어제의 결착을 내자는 건가?”
······ 필시 결판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판이 났다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테니까.
말 그대로 죽일 듯이 싸워댔으니, 다음날 멀쩡히 대면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 예상이 증명하듯 라이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군.”
“음. 고작 그 정도로 지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솔직히 죽을 것 같다.
4,500%가 넘어가는 자연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팔이 너덜거렸을 터.
동시에 라이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타격을 입고도 멀쩡하다고?’
······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비록 후퇴하긴 했으나, 그전까지 염소에게 가한 타격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몇 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자신의 몸도 만신창이였고.
억지로 부러진 뼈를 끼어맞춘 상태.
치유되지 않은 멍을 가리고자 긴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다.
입을 열 때마다 목에서 피가 끓는 기분이다.
자신의 상태가 이럴진대, 고작 그 정도로는 지치지 않는다?
‘허세인가?’
평소였다면 허세라고 판단하여 한껏 비웃었을 일.
하지만 도저히 비웃을 수가 없다.
그러기엔 어제 본 광경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으므로.
“나한테 바라는 게 있나?”
네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염소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물었다.
바라는 게 있냐니.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자신이다.
고작 염소 따위에게 바라는 게 있을 리가······.
‘제기랄.’
라이가는 참담한 심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있었으니까.
간절히 바라는 게.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렵게 열었다.
“········· 대체 무슨 저주를 걸어놓은 거지?”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
수백 개의 축복과 가호로 단단히 무장한 자신이다.
감히 마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저주를 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걸렸다.
도저히 풀리지 않고 풀 수 없는, 엄청나게 강력한 저주가.
‘저주?’
······ 그런 라이가의 말을 듣고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저주라니?
‘이상하군.’
진짜로 의아한 일이었다.
만약 저주가 걸려있다면 ‘별의 축복’으로 확인이 가능했을 것이다.
멸망이 광룡 아인하사르에게 걸어놓은 저주조차도 파악한 ‘별의 축복’이었으니, 절망의 저주를 놓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별의 축복’에 걸리는 저주가 없다.
이 말인즉슨.
‘라이가는 저주가 걸렸다고 착각하고 있다.’
저주가 걸린 게 아니라, 저주가 걸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다.
라이가 정도나 되는 강자가 저주를 착각한다?
‘마치 겁을 먹은 게 처음인 사람 같군.’
······ 라이가는 확실하게 동요하고 있다.
어제 보았던 라이가와 지금 눈앞에 있는 라이가의 태도는 천지 차이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의 심장은 더없이 빠르게 뛰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놀라우리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던 심장이, 나를 마주한 순간부터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해대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아.’
그제야 라이가가 언급한 ‘저주’에 대해 알 것 같았다.
놈이 왜 나를 이토록 다급하게 찾아왔는지도.
나는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작동하지 않는 건가?”
“······!!!”
동시에 라이가의 전신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역시나.
라이가가 지닌 히든 특성이 ‘돌연변이’ 하나일 리 만무하다.
그만한 강자라면 다수의 히든 특성을 지녔을 것이다.
당연히 ‘철혈군주의 심장’을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태고의 절망’을 마주하며 라이가는 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를 저주라고 착각하여 나를 찾아온 게 분명했다.
‘히든 특성이라고 만능은 아니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라이가 기사단장은 너무 강했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모든 보상을 독식했을 것이다.
패배하지 않으며, 겁먹을 일도 없으니, 철혈군주의 심장을 맹신할 수밖에.
그렇다면.
“저주를 풀고 싶나?”
나는 미소지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멸망의 파편을 사냥하는 라이가 기사단장.
그에겐 정말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
“라이가 기사단장이······ 염소를 찾았다?”
황금 가면의 음성엔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그림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굉장히 다급해보였습니다.”
“그가 왜 염소를 찾은 거지? 짐작되는 게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기막(氣膜)에 의해 모든 소리가 차단돼 있었는지라.”
기막에 의해 차단돼 있었다?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비밀로 하고 싶었다는 말인데.
평소의 라이가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염소는 배제하려 했건만.’
······ 황금 가면이 잘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지켜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라이가는 염소를 찾아갔다.
왜?
혹시 포섭이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라이가가 직접 움직일 정도의 가치가 있나?
‘가치가 아예 없진 않지.’
바알을 완전하게 제어한 라혼 가문의 후계자.
열 두 번째 정통의 후견자이자 사신교의 간부다.
그러나 이 정도로 라이가를 움직일 순 없다.
하늘아래 자신밖에 모르는 그 오만한 놈을 이 정도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염소에게 있다는 말이다.
라이가가 군침을 흘리며 다급히 찾아야 할 무언가가.
한참의 고민 끝에 황금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팔가에게 빼앗길 순 없다.’
라이가와 황금 가면은 오랜 숙적과도 같은 관계.
라이가가 바라는 걸 얌전히 넘겨줄 순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염소를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 황금 가면님. 큰일났습니다.”
다급히 찾아온 그림자.
황금 가면은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무슨 큰일이 났다는 말이냐?”
“팔가 기사단과 함께 ‘염소’가 황궁을 벗어났습니다.”
“········· 뭐?”
이건 또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염소가 팔가 기사단과 같이 나갔다고?
그렇다면 그냥 포섭하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염소가 자신의 것이라는 라이가의 선전포고와 같았다.
문제는 염소가 사신교의 간부라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라이가는 사신교를, 자신을 아예 배제시켰다.
그가 회의에서 염소를 배제한 것처럼.
‘라이가. 드디어 미친 거냐?’
아무리 서로가 적대적이라지만 대놓고 싸우자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무리수다.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라이가는 바보가 아니다.
도리어.
···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염소에게 있다는 뜻 아니겠나.
*
궁금한 게 많다.
하지만 대놓고 직설적으로 모든 걸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다.
하여 나는 ‘묻지 않는 길’을 택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지.’
직접 보면 되니까.
‘파편을 찾고,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을 테니.’
라이가가 어떻게 ‘멸망의 파편’을 사냥하는지.
또한, ‘멸망의 파편’에 의한 버그를 어떻게 견뎌내는지 직접 보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라이가의 착각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만, 우위를 점하면서 내 의도를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저주가 해제되는 조건은 간단하다.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 그게 끝이다.
-동맹이라도 맺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 이 정도 저주에 쩔쩔매는 너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
-이 정도 저주도 못 풀면서 너는 정말 ‘멸망의 파편’ 소유자를 사냥할 수 있는 건가? 그 저주의 덩어리를?
-······ 뭐라고?
-아니라면 증명해봐라. 네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자인지.
그때 라이가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는 눈빛.
-오냐. 보여주마.
허나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나는 팔가 기사단과 함께하게 됐다.
즉시 황궁을 떠나, 몇 개의 워프를 넘어.
-염소여. 파편 소유자의 대부분은 이 심연 안에 있다. 이제와서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 가라앉은 심연의 앞에 나는 서게 되었다.
수많은 초월적인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곳.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무엇이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장소!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좋다.’
어차피 한 번은 와야할 곳이었으니까.
《메인 퀘스트 11, ‘심연 괴물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심연 속에서 괴물을 사냥하십시오!》
《사냥한 괴물의 숫자나 급수에 따라 상응하는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주의. ‘심연’의 입장은 신중해야합니다.》
《‘심연’에 한 번 입장하면 다신 돌이킬 수 없습니다.》
《또한, 퇴장하는 순간 점수가 합산되며 순위가 결정됩니다.》
《명예의 전당 순위에 따라 ‘특수 탈리스만 큐브’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백성전.
일백의 성좌가 기거하는 별의 궁.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란돌프의 이야기를 개방한 이유가 뭐지?”
“독점하려던 것 아니었나?”
성좌들은 궁금해 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난데없이 ‘란돌프의 이야기’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란돌프의 이야기에 지불되는 ‘별빛’은 너무나도 막대해서 거의 모든 성좌가 도무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오직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만이 구독할 수 있었건만.
여태껏 독점하던 이야기를 그가 처음으로 모두에게 공개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나만 독점할 순 없지 않은가?”
“······ 확실히.”
“으음.”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개척자의 이야기.
포기하지 않고 오롯이 나아가는 란돌프의 모습은 성좌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검 숙련도 31레벨을 넘어, 32레벨에 도달했을 땐, 모든 성좌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을 정도다.
“더 보고싶다.”
“··· 감질 나 죽겠군.”
그러나 이야기는 그게 끝이었다.
이후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힘을 얻는 건 보았다.
하지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니던가.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직접 보도록.”
별빛을 지불하고 직접 봐라.
하지만 그만한 별빛을 소모할 수 있는 성좌는 손에 꼽는다.
수많은 성좌가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음?”
“이 별빛은?”
그때였다.
별빛의 계단이라 불리우는, 성좌가 탄생하는 그곳에.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존재할 리 없는 101번째 성좌가 별빛을 흩뿌리며 나타난 것이다.
“101번째 성좌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대체 누구지? 누구기에 ‘규칙’을 깨고 나타난 거냐?”
큰 소란이 일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백성전. 그 이름처럼 이곳은 오직 백 명의 성좌만이 기거할 수 있는 장소다.
백성전이 존재한 이후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절대불변의 법칙!
그 법칙을 깨며 나타난 존재에게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101번째 성좌를 확인한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