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략불가
고오오오오.
하늘이 울린다.
지상은 요동쳤다.
“···이상하군.”
가파른 절벽의 위에서, 흑왕은 이 모든 현상의 근원지인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머’에서 보여지는 모습에 흑왕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절망.
사흉이라 일컬어지던 괴수 중 하나!
여태껏 조용하던 녀석이 갑자기 괴롭다는 듯 울부짖기 시작한 탓이다.
“아아······.”
“제, 제발 그만······!”
동시에 절벽 아래에서 수많은 벌레들이 몸을 경직시킨 채 떨어댔다.
모두 흑왕이 히든 특성을 베풀어 강화된 괴물들.
그 하나하나가 거대한 산의 주인급으로 강력하기 그지없지만, 절망의 울음소리에 혼이 나가버렸다.
겁에 질려 모든 의지를 상실한 상태.
그저 두려워하는 게 전부인 절망적인 모습들.
‘··· 페르몬. 녀석도 떨고 있나.’
그리고 그 괴물들을 일거에 제압하고 통솔한 벌레의 왕,
개미왕 페르몬!
흑왕이 만들 최고의 걸작이자 돌연변이 히든 특성으로 말미암아 최강의 벌레로 거듭난 녀석도 절망의 울음소리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의연한 척 하고 있으나 쉴 새 없이 더듬이를 움직여댔으니까.
‘절망의 힘은 히든 특성을 웃돈다.’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개미왕 페르몬이 지닌 히든 특성은 돌연변이만이 아니다.
‘철혈군주의 심장’ 역시 지니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모든 상황에서 의연하게 만들어주는 그 히든 특성조차도 절망의 울음소리를 견디진 못한 것이다.
이는 절망이 히든 특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소리.
‘그러한 절망이 동요하고 있다. 대체 무엇에 반응하는 거지?’
······ 하지만 동요하고 있는 건 벌레들만이 아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종류의 반응.
대관절 무엇이 절망을 이토록 떨게 만들고 있단 말인가.
‘절망을 떨게 할 수 있는 건 같은 사흉뿐이다.’
흑왕이 알기로, 오직 사흉만이 절망을 반응케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알은 죽었다.
다른 사흉이 부활할 징조 역시 없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인 사왕은 완전히 잠식되었으니, 놈의 의식일 리도 만무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절망은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고통에 찬 신음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것을 상실했을 때의 슬픈 울음 같기도 한, 한없이 구슬픈 목소리.
그 울부짖음을 계속해서 듣고 있던 흑왕은 절망의 상태를 한 마디로 축약했다.
“······ 발정 난 암고양이 같군.”
*
“허억!”
단말마와 함께 상체를 들어올린 남자.
전신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눈을 뜬 그는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인가?’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따스한 햇빛과 바람.
밤이 벌써 지나갔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밤의 기억이 마치 꿈만 같아서.
도저히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하지만 단순히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지 않은가.
‘내가 뭘 본 거지?’
라이가 기사단장.
팔가의 수장인 그는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걸까?
수전증에 걸린 듯 부들부들 떨려대는 손.
진정하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진정되질 않는다.
‘분명히 나는 팔가의 수련장에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다.
황궁에 올 때마다 찾는 장소.
팔가의 계승자만이 닿을 수 있는 은밀한 곳.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누구를 만났지?’
라이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희미한 잔상.
억지로 지워버린 듯 갈기갈기 찢겨있는 기억의 조각들.
‘분명히······ 염소. 염소를 만났다.’
아.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두통이 몰려들었다.
이건 몸이 경고하는 것이다.
억지로 기억을 되살리지 말라고
억지로 끄집어내선 안 된다고······.
‘염소와 검을 맞댔다. 이후 녀석의 탈을 부쉈다.’
라이가는 억지로 기억을 이어나갔다.
분명 강환을 완성한 염소를 상대로 신명나게 검을 휘둘러댔다.
도리어 압도하며 탈을 부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왜?
왜 자신의 몸은 강제로 어젯밤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일까.
‘탈을 부수자······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염소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뭐지?
대체 뭘 본 거지?
부르르르르!
그럴수록 몸의 떨림은 더욱 커졌다.
꽈아악!
라이가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바스러지게 움켜쥐어보았다.
수많은 강자를 도륙하고, 멸망의 파편을 회수하는 사냥꾼인 자신이 정체모를 무언가에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이내 기억을 떠올린 라이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왜 팔가의 수련장이 아닌 침대 위에서 눈을 떴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으니까.
“나는······.”
··· 허나,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나서부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건만.
창백해진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라이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나는 도망친 건가?”
*
태고의 갑옷.
본래 최초의 불을 머금었던 나무막대기는 특별한 형태가 없었다.
그저 불을 붙여 옮기는 용도가 전부였던 것.
최초의 불로 제련한다고 한들 갑옷의 형질을 띄긴 건 불가하다.
하지만 ‘정화된 절망의 뼛조각’과 함께 나무막대기는 갑옷이 되었다.
갑옷.
창과 검, 화살 따위를 막고자 만들어진 인류의 도구.
태고의 갑옷은 그러한 쓰임을 극대화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적에게 역으로 피해를 주며, 절대로 뚫리지 않는 방어력을 선사했다.
하지만 ‘태고의 갑옷’이 지닌 진정한 능력은 그러한 게 아니다.
<‘태고의 갑옷’에 새겨진 또 다른 이름, ‘태고의 절망’이 발동합니다!>
태고의 절망!
착용자의 상태가 임계점에 이르자 갑옷은 아예 성질을 바꾸었다.
갑옷의 형상을 띄게 만든 ‘정화된 절망의 뼛조각’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형식의 ‘절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탄생한 이브와도 같은, 같지만 전혀 다른 독립적인 절망을.
-고오오오오오오.
그 ‘형상’을 본 라이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경직시키다니.
여태껏 만난 괴물들과는 궤가 다르다.
“너는······ 염소가 아니로구나. 네놈은 대체 뭐냐?”
분명한 건 지금까지 상대한 염소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염소의 몸을 빌렸으나 저건 염소가 아니다.
‘··· 저건 적의를 가진 모든 존재를 말살하는 괴물이다.’
본능적으로 라이가는 적의를 지웠다.
일말의 적의라도 내보이는 순간 저 괴물이 달려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격할 수 없고, 공격해서도 안 되는 존재.
하지만 적의를 갖지만 않는다면 놈은 움직이지 않는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의지는 단 하나. 자신을 지키는 것.’
자신을 지킨다?
아니, 자신이 아닌 안의 대상을 지키는 느낌에 더 가깝다.
필시 저것은 염소를 지키기 위해 나타난 무언가다.
‘마치 갑옷이로군.’
그나마 비슷한 게 있다면 그건 착용자를 지키는 갑옷.
그러한 갑옷이 개념화한 모습 같지 않은가.
만약 그러하다면, 방법이 있다.
적의를 가진 자에게만 반응한다면 적의를 가지지 않은 채 공격하면 그만이니.
무념무상(無念無想).
라이가는 눈을 감고 모든 의지를 지웠다.
흘러가는대로 검을 맡기고 휘두르고자 하였다.
“······!!!”
그러나 휘두르지 못했다.
도리어 한 발 자국 물러났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온다.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
방금전, 라이가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죽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식을 읽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적의를 완전히 지웠건만 방금 본 환상은 무어란 말인가.
‘환상 따위가 아니다. 휘둘렀다면 진짜로 죽었을 거다.’
수많은 경험과 본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조금이라도 휘두르려 했다면 그 즉시 저 괴물은 움직였을 것이다.
의식해서도 안 되고, 무의식으로도 불가하다면.
‘당장은 죽일 수 없다.’
저 괴물을 죽일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 당장은 말이다.
‘저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순 없을 거다. 그야말로 지닌 모든 마력을 태우고 있으니.’
그래. 기다리면 된다.
저 상태가 끝날 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을 불태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 또한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게 느려진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뿐만이 아니다.
두근! 두근! 두근!
멈춘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심장만 터져버릴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입술이 마르고 온몸에선 오한이 든다.
자신이 죽는 모습이 끊임없이 뇌리에 반복된다.
저 괴물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수백 시간 이상이 흐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무렵.
‘젠장.’
······ 라이가는 결국 한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공략불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걸’ 공략하는 방법은 저게 나오기 전에 죽이는 것뿐이다.
저 상태로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열 발자국은 더 뒤로 물러난 라이가가, 등을 돌려 장소에서 아예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겨우 자신의 침소에 도착했으나.
‘왜 안 끝나는 거냐?’
적의를, 죽이겠다는 생각 자체를 지워도 소용없었다.
거리가 멀어져도 마찬가지였다.
괴물에게서 느껴졌던 절망의 기분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있었다.
라이가는 한참이나 몸부림을 쳤다.
남은 방법은 하나.
당시의 기억을 아예 말소하는 것!
언젠가 다른 공략방법을 찾을 때까지 아예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떠올려버린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고집스럽게 기억을 되살려내지 않았던가.
두근! 두근! 두근!
다시금 뛰어대는 심장.
머릿속에선 절망의 형상이, 자신의 죽음이 떠나질 않는다.
라이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얼굴을 구겼다.
“············ 빌어먹을.”
*
눈을 뜨자 방이었다.
어느덧 ‘위대한 달의 의지’가 깃든 밤이 끝나버린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한차례 고개를 털었다.
······ 라이가와 검을 부딪히고, 빌헬름의 기억을 온전히 계승한 것까진 기억난다.
이후 태고의 절망이 발동된 기억이 마지막이다.
그 뒤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똑. 똑.
그때였다.
기억을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팔가 기사단의 견습기사입니다.”
······ 익숙한 목소리.
이 목소리는 분명 이자벨라다.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들어와라.”
끼이이익!
동시에 문이 열리며, 예상대로 이자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는척 해서는 안 된다.
혹여나 라이가가 다른 의도를 가진 채 그녀를 보낸 것일 수도 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무슨 용무지?”
애써 태연하게 묻자, 이자벨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단장이라면?”
“라이가 기사단장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허나 라이가 기사단장이 무슨 의도를 갖고 나를 부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좋은 의도로 검을 맞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무엇보다 태고의 절망이 발동된 뒤의 기억이 없었다.
이 상태로 라이가를 만나는 건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용건이 있다면 직접 오라 해라.”
하물며 불려가는 인상을 줄 수는 없는 노릇.
황금 가면을 비롯한 사신교의 간부들이 알게 되면 괜한 오해만 살 수도 있었다.
하여 강하게 나갔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순순히 물러났다.
······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호출했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이야.
중요한 용건이 있는 게 아니었나?
물론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표면상으로 나는 사신교의 간부 중 하나고, 팔가 기사단과 사신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관계였으니.
모두가 지켜보는 황궁에서 그가 직접 움직일 일는 더더욱 없을 터.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 잠깐 대화 좀 나누지.”
······ 라이가 기사단장.
진짜로 그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것도 이자벨라가 떠난지 5분도 안 돼서.
어쩐지 굉장히 절박해보이는 눈빛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