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악마
라이가.
팔가의 이름을 정식으로 계승한 기사왕.
그는 역대 팔가의 주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흘러넘치는 재능과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
쉬지 않고 악착같이 검을 휘두른 결과 그는 마침내 강의 경지에 닿을 수 있었다.
‘모두가 끝이라 일컫는 경지가 바로 강의 경지였다.’
초대 팔가의 주인 외엔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지고한 자리.
극도로 순수한 검강을 만들어낸 라이가는 한순간 전율하였으나.
동시에 깨닫고 말았다.
‘끝이 아닌 시작. 나는 이제야 출발선에 선 것이다.’
자신은 이제야 제대로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후 라이가는 심연의 괴물들을 죽이고, 신이라 불리는 자들을 죽였다.
‘더 깊은 심연’도, ‘어둠의 심판자’도, ‘살갗 혼종 여왕’이나 ‘어스름 아귀’ 같은, 수백 년간 인류가 정복하지 못했던 영역의 주인들을 마구 죽여댔다.
진정한 무(武)의 궁극에 닿기 위해서.
개중에는 자신과 비슷한 강을 만들어내는 존재도 있었지만, 라이가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강은 순수하지 않다. 진리에 닿지 못했다. 강의 가죽만 뒤집어쓴 가짜에 불과하다.
‘목이 마르다.’
그래서 미치도록 갈증이 났다.
진정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줄 존재는 없는 건지.
자신의 무위를 발전시켜줄 진짜 괴물은 이 세상에 더 없는 것인지!
대륙에서 ‘빌헬름’의 이름이, 자신과 같은 ‘기사왕’의 칭호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그때 즈음이었다.
하지만 둘이 만날 일은 없었다.
―멸망의 파편을 모아라. 다시는 ‘멸망’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 팔가의 사명이다.
팔가의 주인들이 짊어진 업.
제국이 몰락하는 일이 없게끔 멸망의 파편을 모아 봉인하는 것이 라이가의 운명이었으니까.
구제국을 지키지 못한 팔가의 일족.
다시는 과오를 반복할 순 없었으므로.
그렇게 갈증은 풀리지 않은 채 시간이 더 흘렀다.
‘바알. 모든 기술의 궁극에 선 괴물. 가장 순수한 힘의 집약체!’
한데, 만나버린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바알을 완전하게 제어한 자와 마주해버렸다.
무엇보다··· 녀석이 선보인 ‘강’은 자신과 같은 순수한 마력을 지녔다.
완벽한 형태.
자연스러운 균형과 순환.
그걸 봤을 땐 당장 겨뤄보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지엄한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대역죄.
황금 가면을 비롯한 사신교 놈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운명이군.’
······ 놈이 제 발로 팔가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를 지닌 자만이 이곳을 알아차리고 들어올 수 있을진대.
하지만 인간이 ‘돌연변이’ 히든 특성을 가진 채 살아남을 가능성은 만 명에 한 명꼴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생존한 자만이 ‘팔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
돌연변이 특성이 가진 능력은 숨겨진 길을 보고, 발을 들이는 게 전부가 아닌 탓이다.
‘돌연변이를 지닌 자들끼리 싸워 죽이면 능력을 빼앗을 수 있다.’
그 특징을 이용해 팔가는 몇 대에 걸쳐 힘을 계승해왔다.
아마도 저 염소가면 역시 그러한 특징을 이용해 ‘바알’을 완전제어한 게 아닐는지.
어쨌거나.
‘내 검강에는 미치지 못하는군.’
자신의 검강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단번에 깨지지 않은 건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강과 강의 대결.
부딪힐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려대는 걸 보면 역시나 바알의 능력에 기대어 만들어낸 검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이룩한 경지가 아닌 게 분명했다.
“쯧.”
하여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바알을 완전하게 제어한 것 같아서 잔뜩 기대했건만.
결국 자신의 갈증을 풀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갈증은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음?’
실망을 거듭하던 찰나.
라이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가 변했다?’
무언가가 바뀌었다.
서로의 강을 겨루는 대결.
어느 순간 흔들리던 염소의 검강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의지 역시 얕아졌다.
저건······.
‘검에 자신을 담았다. 검 자체가 되었다.’
신검합일.
그뿐만이 아니다.
‘··· 어이가 없군.’
염소의 상태를 깨달은 라이가는 내심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놈?
‘나를 상대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있어?’
이런 발칙한 놈을 보았나.
어이가 없는 수준은 넘어 기가 찰 일이었다.
단번에 목을 벨 수 있는 상대를 눈앞에 둔 채로 깨달음을 체득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허점투성이.
염소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토대로 강을 완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과의 대결이 아니라, 아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다.
진짜로 뭘까.
간혹 그와의 대결을 통해 벽을 느낀 자들은 많지만······.
‘나와 검을 맞대며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었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것도 서로의 실력이 비슷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실력의 격차가 엄청난 상태에선 결코 검 몇 번 마주한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재능과 실력의 벽을 느끼고선 검을 아예 놔버리면 몰라도.
“······.”
그럼 서로의 실력이 비슷하다는 뜻인가?
아서라.
마음만 먹으면, 염소의 목을 벨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실력의 격차는 확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상대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걸까.
이런 취급은 또 처음이었다.
‘그럼 체득해 보거라. 뭘 깨달았는지 나도 궁금하니.’
그래서 놔두었다.
마음껏 그 깨달음에 어울려주었다.
오늘은 위대한 달이 머무는 밤.
··· 그 밤에 어울리는 춤사위라 아니할 수 없었으니.
이후 얼마나 많은 검격을 나누었을까.
‘안정되었다.’
염소의 검강은 이제 자신의 검강과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균형과 순환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검강의 완성은 녀석의 변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넌······ 누구냐?”
라이가는 긴 침묵을 깼다.
입을 열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상대했던 기세와 전혀 달라진 자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정말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검을 쥐는 동작, 발을 뻗는 자세, 숨결 하나마저도.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이전과는 달랐으므로.
이건 마치······.
채엥!
그리하여 검을 부딪힐 때, 라이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바알의 권능에 의한 힘이 아니다.’
바알의 권능?
이런게 바알의 권능일 리 없지 않은가.
단순한 권능 따위로는 이처럼 자신을 감탄시킬 수 없다.
‘개인이 처음부터 쌓아올린 무(武)의 집약이다. 모든 벽을 차례대로 깨어나가 마침내 극의에 닿은······!’
아아.
이 움직임. 호흡과 자세. 검을 대하는 태도 따위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전부 쌓은 것이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토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장 단단한 벽돌로 한 치의 흠없이 요새와 같은 불멸의 탑을 만들어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모래성처럼 불면 쓰러질 것 같이 검강을 휘둘러대던 염소가 맞나 의문이 들 지경.
저 불멸의 탑은 자신과 같은 것이다.
······ 아니.
아니다.
놈은 자신과 같지 않다.
그는 어찌됐든 팔가의 주인들이 쌓아놓은 힘을 계승했으니까.
반면에 이놈은 무(無)에서 진정한 무(武)를 만들어냈다.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직접 쌓아 견고한 탑을 세웠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었다.
그제야 라이가는 깨달을 수 있엇다.
‘순수하지 않은 건 나였던가?’
자신의 검강마저도 순수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창조자와 같았으니까.
반면에 라이가는 팔가의 주인들이 닦아놓은 길을 조금 더 발젼시켰을 따름이다.
그 증거로 검을 부딪힐 때마다 피부가 진동했다.
모든 신경이 긁히는 것만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러냈다.
허점은 사라지고, 정점만이 남았다.
허!
라이가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
이 또한 깨달음 아니던가.
‘이놈은 대체 뭐지?’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
하지만 그건 자신도 지녔다.
지금 이 차이는, 단순한 재능의 우위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
힘을 갈망하는 자세 자체가, 그 열망 자체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일체의 다른 욕구 따윈 배제한 채 힘만을 키워온 자다.
그런데 그런 게 있을 수가 있나?
인간이라면 응당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욕구를 가지기 마련이다.
일체의 욕구를 배제하고 힘만을 갈구한다니!
있을 수 없다.
그런 건 인간이 아니다.
만약 그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면.
“······ 실로 탐욕적이군.”
오로지 힘만을 탐하는 욕심!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탐욕의 악마라 불러야하지 않을는지.
*
더, 더, 더!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다.
빌헬름이 닦고 걸어온 길.
그 길의 너머에.
길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나.
빌헬름이 개척한 길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
분명히 그라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터.
그의 신이었던 나다.
비록 원망을 샀으나 실망시킬 순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닿을 수 없다.’
동시에 알았다.
지금 이 깨달음은 연기와 같아서 눈을 떼는 순간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선 안 된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간 나는 무지했다.
아무것도 몰랐다.
빌헬름의 마음을.
녀석의 진심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내가 빌헬름을 모르는 것처럼,
빌헬름도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알았다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을텐데.’
물론, 이제는 만날 수 없다.
빌헬름의 신체 또한 마왕에게 넘어갔으니까.
영원히 서로가 만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녀석의 사명을 완수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줄 생각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의 유일한 속죄일 터이니.
계속해서 나아간다.
빌헬름이 걸어온 방식대로.
빌헬름이 휘둘러온 올곧은 검을 따라.
‘너는 틀리지 않았다.’
녀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증명해주리라.
당시에는 대답해주지 못했지만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검에 영혼을 실었다.
플레이어가 된 이후 처음으로 내 의지를 실어낼 수 있었다.
그 순간.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2Lv을 달성했습니다.》
《‘현경(玄境) 초입’에 들어섭니다.》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 ‘숙련도 레벨 초월(8)’을 완성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여! 당신의 도전에 산의 모든 의지가 진심으로 경외하며 감탄합니다.》
《그대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답이 있기를 바라며 모든 산의 주인이 ‘순수’를 완성시킵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당신의 이야기를 개방합니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도전을 알아차립니다.》
······.
《?????????》
《????????????????????????》
《존재할 수 없는 별, 101번째 성좌 ‘순수의 별’이 탄생합니다.》
《보상으로 ??등급 ‘빌헬름’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