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황금 염소의 돌발 행동에 황금 가면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순순히 찬성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만.’
그래도 설마 싶었다.
제아무리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지만 최소한의 공과 사는 구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건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이는 곧 자신을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므로.
‘내부적으로는 싸울지언정 팔가 기사단 앞에서는 단결한다. 그것이 그동안 우리가 지켜온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사신교와 팔가 기사단.
두 집단의 관계는 앙숙이다.
제국을 양분하고 있지만 결코 한데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 팔가라는 적을 두고 사신교는 오랜 시간 뭉쳐온 것이다.
그런데 열두 번째 후견자, 염소의 반대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자신들의 단합을 깬 것과 같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정보를 배제한 것에 대한 항의라도 하는 것이냐?’
그는 일부러 오늘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염소에게 정확히 고지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염소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탓이다.
‘······ 오주력. 백왕 산하의 시체 까마귀라고 생각했으니.’
첫 등장 때부터 그렇다.
다르칸 영지.
특급 경매가 진행되는 그곳에서, 염소는 허드슨의 호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허드슨이 누구던가.
미궁의 주인이 된 오주력의 대리인이라는 건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뒤 실시된 ‘소독’에서 염소는 황제의 인장을 보이며 자신의 자격을 증명했고, 죄인을 선별하는 내기에서도 승리하며 결국 사신교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염소가 ‘오주력’일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통의 주인은 오직 인간이어야만 한다.’
사신교의 간부들.
그들은 모두 인간이다.
애당초 ‘신병’ 자체가 인간만이 걸리는 병.
사신교의 구성원 대다수가 ‘신병’에 걸렸던 자들이고, 정통의 후견자가 되려거든 그 병에 걸리는 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염소가 괴물인 오주력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놈이 바알 갑옷을 가져간 직후 사흉 바알이 토벌됐다.’
허나 너무나도 공교롭지 않은가.
염소가 갑옷을 가져간 시기와 오주력이 사흉 바알을 죽인 시기가 겹친다.
무엇보다 오주력이 대외선상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도 걸렸다.
조사하면 할수록 염소와 오주력이 동일한 존재라는 확신만 커졌다.
‘······ 인간이 아닌 괴물이 진정한 정통의 후견자일 리 없건만.’
그래서 제한된 정보를 주고 초대하여 떠본 것이다.
진짜 정통이라면 어디 한 번 사신을 소환해보라고.
‘그런데······ 바알을 소환해냈지.’
그러자 염소의 정통이 소환해낸 사신은 무려 ‘바알’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 그 자체.
저걸 정녕 사신으로 봐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라이가 기사단장이 나타나 ‘라혼’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정녕 황금 염소가 ‘라혼’의 관계자······ 혹은 핏줄을 이었다면.
‘염소는 오주력이 아니다.’
염소와 오주력. 둘은 다른 존재다.
결코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비록 사흉의 제어방법을 제국은 잃어버렸으나.
‘네 가문의 직계 혈통만이 사흉을 제어할 수 있으니.’
그 하나의 조건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으므로.
라이가는 관계자라 애둘러 표현했지만 실상은 ‘라혼의 직계혈통’이라 말한 것과 진배없다.
라혼 가문의 직계혈통이 괴물일 리가 없지 않은가.
백왕이 끔찍이 혐오하는 인간을 오주력으로 들였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말이 안된다.
고로, 염소는 인간이다.
괴물 오주력이 아니라.
오주력은 바알의 껍데기를 제거했지만, 그 본질은 염소가 차지한 것이 틀림없었다.
“······ 안건은 통과됐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천천히 황금 가면은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오해했고, 염소가 라혼 가문의 직계혈통이라 한들, 당장 이곳에서 염소의 의견을 따를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면에서 단결을 거부했으니 낙인만 찍힌 셈이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물론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안건은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긴 했다.
그래서 황금 가면은 염소의 반대 의견을 묵살했다. 아예 없는 것으로 쳤다.
이곳에 있을 자격, ‘정통성’이 있다는건 인정하겠지만 과연 자신을 적대하며 혼자서 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는지.
“이제 우리의 안건을 말할 차례로군.”
황금 가면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팔가 기사단과 사신교의 회의는 제국이 큰일을 도모할 때만 진행된다.
그야말로 5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
그리고 지금 그가 꺼낼 안건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아르혼 제국이 탄생한 이래로 가장 중요한 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이자.
흠!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그는, 더할나위 없이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깨어나고 계신다.”
*
“미친 거 아닌가?”
“감히 견습 따위가······.”
“어째서 봐주시는 거지?”
“그 소문이 사실인 거겠지.”
궁의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말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는 하나, 초월한 이자벨라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라이가를 정면에서 부정한 자신에 관한 대화.
그것도 빌헬름보다 약하다 하였으니 기사들의 반발이 큰 건 당연지사.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
이자벨라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같은 견습기사이자 유명 가문의 천재라던데.
이름이······ 뭐였더라.
“심연에서 봤잖아? 그곳의 주인들도 단장님을 피하는 걸. 그런 단장님보다 빌헬름이 더 강하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제국에 입성하기 직전, 팔가 기사단은 심연 속에서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곳의 주인 중 하나를 죽이고 ‘멸망의 파편’을 가져온 것이다.
“그야 뭐, ‘기사왕’이라 불리며 떠받들어진 건 이해해. 하지만 그건 지상에서의 일이고. 단장님은 세계의 침식과 싸우시는 분이라고. 단장님이 지상에만 몰두했다면 제국이 이렇게 커질 순 없었을 거야.”
··· 아. 기억났다.
여자는 세렝게티와 비슷한 부류였다.
세렝게티와 다른 점은, 세렝게티는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는 극소수에게만 말이 많아진다면, 이 여자는 그냥 말이 많다는 것 정도.
“대륙의 균형자 역할을 하는 제국이 이처럼 번성할 수 있는 건 모두 단장님 덕분이야. 심연에 가라앉은 구제국의 땅을 직접 두 발로 수복하고 계시잖아. 반면에, 빌헬름은 뭘 했지?”
“······.”
“대원정도 실패했잖아? 단장님이라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을걸. 결과적으로 20만이 넘는 병사가 몰살당했는데······ 거기에 투입된 자원은 또 얼마나 방대해?”
“······.”
“전적으로 빌헬름을 지원했던 발란 왕국은 덕분에 휘청거리고 있지. 프리드릭 왕의 다음 전쟁터가 발란 왕국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해. 전쟁이 벌어지면 발란 왕국 따위는 순간 삭제-.”
“후우.”
이자벨라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끊지 않으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도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심연에서 전투를 벌이는 팔가 기사단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지상에서의 일은 그들에게 한끼 식사거리도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라이가 기사단장에 대한 편애, 자부심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을 만큼 지고지순한 경지였다.
그런 라이가 기사단장을 정면에서 부정했으니 반발이 큰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데르시안 가문에서 거의 나온 적 없는 네가 빌헬름을 직접 본 적이 있는 거야? 정말로?”
여자는 마침내 진정으로 궁금했던 바를 입에 담았다.
여자를 포함한 팔가 기사단 대부분은 이자벨라를 ‘데르시안 폰 이자벨라’로 알고 있다.
사막에서 지낸 뱀공주 이자벨라가 아니라, 데르시안 가문에서 곱게 자란 화초로 말이다.
당연히 가문에서만 지낸 화초가 제국과 전혀 연이 없는 빌헬름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본 것이다.
심연에서.
다른 자들은 못 본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분명······ 빌헬름의 별.’
심연 속에 잠긴 빌헬름의 별을.
그 별을 통해 그녀는 빌헬름의 기억을 더욱 자세히 옅볼 수 있었다.
왜 별이 자신에게 그의 기억을 보여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운을 마시는 별.’
가장 위대한 그 별은, 심연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헬름.
혹은······ 란돌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중이다.
이 사실을 전해주고 싶지만,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는다.
“그럼 그 소문도 사실이야?”
“······?”
이자벨라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여자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가 단장님의 이거. 피앙세라는 소문 말이야.”
*
‘나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결정했군.’
황금 가면의 진행에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놈은 내 반대의견을 가볍게 묵살해버렸다.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을 테지만, 내버려두었다.
‘의도한 대로다.’
보여줬으니까.
그들과도 충분히 대립할 수 있음을.
황금 가면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왜냐하면 이곳에는 사신교의 간부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가 기사단장. 그도 있다.
실제로 황금 가면과 달리, 나를 바라보는 라이가 기사단장의 눈은 이전보다 더욱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또한, 황금 가면에게 불만을 품은 사신교의 간부도 분명히 존재할 터.
어차피 황금 가면을 가만히 따라가선 답이 없다. 차라리 대놓고 대립하는 게 낫다.
‘그나저나.’
흥미로운 건 그 뒤에 이어진 발언이다.
신제국 아르혼의 초대 황제.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백년간 잠들어 있었다.
천상에서 정통이라 불리는 열한 개의 알을 가져온 자.
그를 본 사람은 없다.
제국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는 소문만 파다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황제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국은 그를 신처럼 모신다.
수백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우직한 충성심.
그런데 황제가 깨어나고 있다고?
“드디어······!”
라이가 기사단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짧게 기함을 토했다.
다른 기사들도, 사신교의 간부들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황금 가면만이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
그때 황금 가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을 차리신 건 아니다.”
“분명히 깨어나고 계시다고 말하지 않았나?”
라이가가 이맛살을 구기며 반박했다.
말장난을 하는 거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살기마저 내비췄다.
“신체의 활동 조짐이 보인다는 거다. 폐하께서 완전하게 의식을 되찾으려면 ‘황금의 정령왕’이 필요하다.”
“황금의 정령왕······? 그건 존재하지 않는 정령 아닌가?”
라이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의 정령왕.
그건 이야기로만 전승되어온 존재하지 않는 정령인 탓이다.
누구도 본 적 없고, 누구도 찾지 못한.
대륙과 심연 전체를 오가는 라이가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건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꺼낼 안건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황금의 정령왕’을 찾는자에게 폐하의 첫 알현을 허락하자는.”
“······ 첫 알현이라.”
뜬구름을 잡자는 소리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안건에 걸린 보상은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었다.
“확실히. 폐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그 문제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겠군.”
동시에 라이가를 비롯한 기사단의 눈이 하나같이 빛났다.
황제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알현할 자.
그걸 정하는 건 두 집단간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누가 더 황제의 측근인지가 육안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으므로.
‘황금의 정령왕?’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황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
분명히 어딘가에서 비슷한 존재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어디서 봤더라.
-제법이군, 기사왕.
······ 아.
떠올랐다.
정령탑에서 만난 문지기.
내 정체를 알고 있던 그 황금빛의 정령!
탑을 나갈 때 황금빛의 정령은 나를 기사왕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내 정체를 파악한 건지, 대체 그 정령은 뭔지 궁금했지만 결국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황금 가면과 라이가가 말하는 황금의 정령왕이라는 게, 설마 그 녀석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