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가치
황금가면의 호출에 응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나만 해결할 수 있으니까.’
대체가 불가능하니까.
오직 나만이 ‘황금 염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고, 기한이 정해져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황금 가면의 호출이었던 탓이다.
‘단순한 만찬회라면 불참했겠지.’
그렇다고 특별해서 참가한 것도 아니다.
황금가면의 서신 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었다.
‘팔가 기사단 회의.’
팔가 기사단!
제국의 수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망명 높은 집단.
황제의 검!
오로지 황제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그 집단의 이름이 황금가면의 서신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한다는 건 필시 ‘잠든 황제’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들이 움직인다는 의미는.
‘······ 황제를 위협할 존재의 출현, 혹은 황제가 깨어났을 경우.’
보통 이 두 가지 중 하나다.
하지만 의아함은 있었다.
오로지 황제만을 위해 움직이는 팔가 기사단은 다른 이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독자적인 무력행사가 가능한 곳이고, 하여 사신교나 고위 귀족의 말도 귓등으로 들을진대.
‘왜 같이 회의를 진행할까.’
사신교의 간부들과 팔가 기사단이 공동으로 회의를 여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빠질 수가 없었다.
‘위대한 달의 의지’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수많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마침내 나는 제국의 심장, 황궁에 도착했고.
“······.”
뼈가 시릴 만큼 차갑고 살벌한 분위기와 함께.
수많은 집단이, 무력이 황궁에 모여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자신이 따르는 사신교 간부와 똑같은 모양의, 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사신교의 간부들이 스스로의 영향력을 보이고자 병력을 총집합한 것일까?
황제가 잠들어 있는 신성한 황궁에서?
‘경계하고 있다.’
서로를.
이전에도 느꼈지만, 열한 명의 간부들 모두가 경쟁자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러한 분위기가 부하들에게도 같이 적용된 것이다.
게다가.
‘긴장하고 있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일촉즉발. 서로가 싸우려는 건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 뇌신강림.’
나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한 지점에 멈춰섰다.
은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일전 제국의 경매 당시 보았던 고유 스킬 ‘천둥 사자’를 사용하는, 내가 키운 캐릭터로 여겨지는 존재를.
녀석은 나를 못 알아보았지만.
“황금 염소님, 확인했습니다.”
궁의 입구에서 내가 황금 염소의 인장을 내보이자, 은빛 가면을 쓴 초월자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이 곁들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의문점은 ‘왜 혼자 왔냐’는 것일 테다.
‘내가 모르는 게 있었나 보군.’
황금 가면이 보낸 서신에는 ‘측근들’을 대동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간부들 모두가 측근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걸 황금 가면이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의도적으로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살기라.’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그 중심부에는 공통적인 ‘살기’가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엄연한 간부이거늘, 이렇게 대놓고 살기를 드러낼 줄이야.
이조차도 넘어서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일까?
수많은 초월자의 살기는 말 그대로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황금 염소께서 입장하십니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터벅. 터벅.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보폭을 일정하게 가지며 궁의 안으로 입장했다.
저들의 시선도, 경계도, 긴장도, 살기조차도, 지금의 내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에.
*
백왕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 오주력은 어디 갔지?”
오주력이 자신의 호출을 무시했으니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를 정복했다는 이야기 후에 들려오는 게 전혀 없었다.
사왕이 공석인 현재.
백왕의 앞에 모인 주력은 고작 셋이었다.
메두사, 궁기, 대토룡.
그리고 자신의 딸 아리아.
‘불안해하고 계신다.’
아리아는 백왕의 감정을 읽었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백왕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남방의 지정한 도시들을 모두 정복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흑왕의 움직임이 백왕의 예측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
남방의 도시들을 정복했음에도 흑왕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이.
아예 무시의 지경이다.
그보다 더욱 큰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오주력······ 내 호출이 그리도 같잖았던가?”
“그런 게 아닙니다, 백왕이시여.”
아리아가 급히 나섰다.
지금 여기서 백왕과 오주력의 관계가 틀어지면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리아가 본 오주력은, 반드시 백왕이 품어야 할 인재였으므로.
오주력. 그 불길한 까마귀는······ 끝을 모르는 자였다.
주력들 역시 강해졌다지만, 그의 성장 속도는 주력들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백왕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내 호출을 무시할 만큼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이냐?”
“백왕이시여. 전해 듣기로, 오주력은 현재 호출에 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신 오주력이 백왕께 남긴 선물이 있습니다.”
“······ ?.”
의아해하는 백왕을 향해, 아리아가 품에서 조심히 천에 싼 물건을 양손으로 내밀었다.
“으음. 이건······.”
그것을 본 백왕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천으로 가려져 있지만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 내 어금니로구나.”
과거, 빌헬름과의 전쟁에서 내주었던 어금니 하나.
어금니를 잃고 백왕은 약해졌다.
자신감을 잃었다.
그 잃어버린 어금니를, 지금 오주력이 자신에게 ‘선물’로 내놓은 것이다.
백왕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어금니를 쥐었다.
그의 마력이 응집된, 힘의 총아와도 같은 것.
“백왕이시여. 또한, 오주력이 제게 전하길 이것은 아무런 ‘대가 없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호출에 응하지 못한 게 미안해서일까?
자신이 한참을 찾아 헤매던 어금니를 내놓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다.
‘내가 무엇을 내놓길 바라느냐, 오주력이여.’
그제야 백왕은 차분해질 수 있었다.
어금니가 돌아온 이상, 다시 한번 흑왕과의 결전을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움직인 건 잃어버린 어금니와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것을 되찾은 이상 이제는 거칠 게 없었다.
아무튼, 더없이 큰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았다면 답례해야 마땅하다.
호출에 응하지 않은 것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자. 그럼 무엇을 줘야 할까.
“나는 ‘태초의 숲’으로 향할 것이다.”
“예······?”
“크람델을 벗어나시겠단 말씀입니까?”
백왕의 발언에 모두가 기겁했다.
크람델을 벗어나 직접 태초의 숲으로 향하겠다니!
흑왕이 호시탐탐 백왕의 목숨을 노리는 이 와중에 말이다.
“그렇다. 너희는 이곳에서 크람델을 지키도록.”
하지만 백왕의 의지는 확고했다.
흑왕이 다크엘프와 손을 잡은 이상, 그 역시도 엘프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다.
그리고 거기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 오주력에게 줄 선물을.
*
내가 멀쩡하게 만찬회의 자리에 입석하자, 몇몇 후견자들이 눈빛을 빛냈다.
‘오호라.’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나?’
첫 만찬회 때 느꼈던 오만함.
그것이 그저 허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궁의 입구에 대기하던 초월자들의 살기마저도 의연하게 뚫고 온 것을 보면.
‘그런데······ 첫 만찬회 때와는 뭔가가 다른 것 같군.’
‘음.’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 단순한 분위기만이 아니다.
느껴지는 ‘격’이 이전과 전혀 다르다.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후광과도 같은 게 있었다.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위엄’이었다.
황금 염소에게서 이전에 없던 위엄이 느껴지고 있었다.
게다가.
‘······ 이제는 그냥 어이가 없군.’
‘또?’
창가에 ‘빛의 왕좌’를 소환해 다시 거기 앉았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황금 염소의 자리’를 준비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놈은 관심을 바라는 정신병자가 틀림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황금 염소는 의연하게 황금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작된 만찬회.
“‘위대한 달의 의지’가 지켜보신다. 이번 만찬이 ‘최후의 만찬’이 되기를.”
밤.
보름달이 뜬 저녁.
분명히 바깥에서 본 달은 노란색이었는데, 궁으로 들어오자 달의 빛이 ‘붉은빛’으로 강렬하게 쏘아지고 있었다.
“먼저, 모두 ‘정통’을 소환토록 하지. ‘위대한 달의 의지’가 그대들의 정통을 직접 보고 싶어 하시니.”
황금 가면이 허공에 인을 그려, 정통을 소환했다.
이후 다른 후견자들도 차례대로 정통을 불러냈다.
그들의 정통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반응은 이전과 극명하게 달랐다.
-크크크크!
-키키키키키!
정통들은 무언가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붉은 달의 빛이 정통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달과 같은 붉은 눈을 한 채로 침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캬캬캬컄컄!
··· 그것은 헬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금 가면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오늘이야말로 ‘만식’에 가장 가까운 날이다. ‘위대한 달의 의지’, 이 ‘붉은 만월’이 뜨는 날 정통들은 격렬한 굶주림을 느끼니 말이다.”
한 마디로 더욱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순서가 중요하다.
물론, 중요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찬을 준비한 자의 정통이 처음으로 만찬을 먹을 것이며, 가장 많은 만찬을 먹은 정통은 ‘위대한 달의 의지’께서 직접 축복을 내리실 거다. 그 후견자 역시도.”
두근! 두근!
후견자들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들려올 정도다.
그들은 하나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알고 있듯이 이번 만찬에 허락된 ‘영혼’의 숫자는 하나가 아니다. 여럿을 동시에 공개할 수 있으며, 그 만찬에 ‘가치’가 부여될 것인즉. 가진 모든 가치 있는 영혼을 내보여야 할 것이다.”
······ 하나가 아니라고?
이 역시 서신에 적혀있지 않던 내용이다.
첫 만찬회에선 하나의 영혼만을 지정해 내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만찬회는 아니다.
선보인 모든 영혼에 가치를 매기고, 그 합을 따져 순위를 산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순간, 황금가면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날 처음 도전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거로군.’
놈은 의도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내게 전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첫 만찬회’라는 이유로 헬이 처음으로 만식에 도전했지만, 이제 그런 변수는 완전히 차단해버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헬에 먹었다가 이전처럼 뱉어버리면 또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이내 고개를 돌린 황금 가면이 다시 말했다.
“자. 누구부터 준비한 ‘만찬’을 공개할 테냐?”
“나부터 하지!”
사자탈을 쓴 남자.
그가 이번에도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전에 만찬회에서 ‘그라시아의 젊음’을 내놓았던 자.
“이전에 잡아들인 ‘그라시아의 젊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영혼이다. 기대해도 좋다!”
그보다도 더 특별한 영혼이라고?
모두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사자탈의 남자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남자의 등 뒤로 수많은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들은 수많은 영혼을 잡아들였다.
그중 하나.
“저건······?”
“허어.”
후견자들은 상당히 놀랐다.
수많은 영혼 중 하나를 바라보고선.
사자탈을 쓴 남자가 주먹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성각자’의 영혼이다.”
성각자.
별을 따르는 정체불명의 신자들.
그들 중 하나의 영혼을 붙잡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게 성각자이거늘.
어떻게 잡아들였을까?
“이놈은 단순한 성각자가 아니다. ‘멸악의 거인’이 지키고 있는 ‘어머니 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성각자다.”
“대단하군.”
“물론, 다른 영혼들도 이에 못지 않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진정한 만찬들이지.”
“······ 훌륭하다. 이제 ‘위대한 달의 의지’께서 영혼의 가치를 매길 것이다.”
황금 가면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194, 876】
사자탈의 남자 앞으로 붉은 숫자가 떠올랐다.
위대한 달의 의지가 평가한 영혼들의 가치.
그것이 대략 19만에 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