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막대기 재련 <8권 끝>
황금가면.
처음 제국의 경매에서 만났고, 이후 사신교에 나를 ‘황금 염소’로 입교시킨 인물이다.
심연 미궁에서 ‘제국 삼검’을 통해 받았던 황제의 인장이 유효하게 적용한 덕에 크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특별한 사신의 만찬회라.’
만약 참가한다면 이번이 두 번째 만찬회다.
이전 만찬회에서 헬은 ‘만식’에 도전했고, 수많은 영혼을 흡수하려다가 결국 뱉어냈다.
이후 그 영혼의 뭉치들은 바알과의 싸움에서 먹혔을 때 ‘영원(永遠)의 란돌프’와 함께 부활의 재료로 사용됐다.
‘특별한 만찬을 준비해오라는 말. 내게 하는 소리겠지.’
첫 만찬회에선 아무런 영혼도 준비해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주최하는 ‘특별한 만찬회’에 참가하기 위해선 정통들의 만찬인 영혼을 준비해갈 필요가 있었다.
‘다른 후견자들은 대부분 플레이어의 영혼을 준비해왔지만, 플레이어의 영혼이어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다.’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렇다면, 쓸만한 영혼이 두 개 있었으므로.
하나는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의 영혼이다.
헬이 어느 틈에 이세라에게서 유니온의 영혼을 바꿔치기해온 것이다.
아마도 유니온과 함께 이세라를 만나러 갔을 때가 아니었을지.
‘문제는 유니온이 제국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건데.’
유니온이 헬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털어놓은 덕에, 유니온에 대해선 꽤 자세히 파악해놓은 상태.
그는 아르혼 제국의 초대 궁정 마법사였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입지적인 인물 말이다.
만에 하나 제국 쪽에서 유니온을 지구로 침략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유니온의 영혼을 보였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 저주받은 영혼도 있기는 있지.’
멸망이 광룡 아인하사르를 저주할 때 사용한 영혼.
이 영혼이 아인하사르를 용신의 업에서 떨어트리고, 저주하고 있었다.
저주를 해제하며 회수하긴 하였으나 이게 정작 누구의 영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인하사르를 저주할 정도이니 엄청난 자의 영혼임은 분명했다.
“어디로 향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허드슨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했다.
백왕이 나를 찾는 이유는 대강 유추가 되었다.
주력들 모두를 남방에 전진배치 한 상태.
오주력인 나도 사막 도시 파이살메르로 파견을 나가지 않았던가.
백왕과 흑왕이 서로 땅따먹기를 하는 와중에 모든 주력을 불러모은다는 건, 전쟁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다.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백왕은 조급해하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이 결국 자신의 패배임을, 죽음임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미래시가 경고해줬을 테니 조급하게 움직이는 것이겠지.
내가 봐도 전쟁의 경향은 확실히 흑왕이 우세했으니까.
주력들만으로는 흑왕의 세력을 모두 막을 수 없다.
흑왕은 끊임없이 세력을 늘리고 있는 방면에, 백왕은 세력을 늘리는데 굉장히 소극적이었으니.
‘백왕은 아직 쓰러져선 안 된다.’
그러나 백왕은 흑왕을 견제하고, 나를 가려줄 우산과도 같았다.
그럼 백왕의 호출에 응해야 하나?
확실한 건, 아직은 그가 퇴장할 시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빌헬름의 수준을 완전히 뛰어넘고, 세력을 갖출 때까지 그는 결코 퇴장되어선 안 된다.
지금까지 내가 앞만 보며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자, 꽤 큰 영향력을 미친 게 바로 백왕이었기 때문이다.
백왕의 호출에 내가 응해야하는 이유였다.
‘와이저 후작. 그는 발란 왕과의 대면에 나를 대동하고 싶어한다.’
왜?
이 역시 의문이다.
단순한 대면식이라면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만 동원해도 충분할 터.
세렝게티의 무력 수준은 이미 인간계 최강자의 반열에 올라서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와줬으면 한다는 건······.
“허드슨. 발란 왕국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게······ 소문은 있습니다. 프리드릭 왕이 직접 발란 왕에게 항복 권고를 하러 온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들려옵니다.”
아이언 왕국의 지배자, 프리드릭 왕.
1년 전 왕위를 계승한 젊은 왕이다.
그에 대한 소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
동부에 괴물 같은 왕이 하나 나타났다고.
피는 철이며, 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을 때마다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동부를 재패하는 중이었으니 발란 왕국도 피해갈 수 없었을 테다.
“기정사실인가 보군.”
“와이저 후작이 란돌프 님을 호출했다면······ 예. 내부적으로는 프리드릭 왕의 방문이 확실시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와이저 후작은 발란 왕국의 소속이다.
왕을 안전하게 보필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내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세렝게티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이쪽 역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백왕도, 발란 왕국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을 듯했다.
‘마지막··· 태초의 숲도 마찬가지.’
심지어 먼저 출발한 아루웬 장로가 태초의 숲에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단다.
앤드류 사제가 직접 태초의 숲에 들어갔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증거.
제국을 포함한 네 곳 모두 한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호출이었다.
하지만 내 몸은 한 개다.
고로.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어느 정도 결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허드슨이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대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대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라.”
“그, 그게, 표정에 보였습니까?”
“그래.”
“저···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숨을 크게 들이마신 허드슨이 겨우 말했다.
“이번 ‘기여도의 전당’ 말입니다. 왜 1위가 란돌프 님이 아닌 겁니까? ‘민트초코맛있어요’는 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아.
기여도의 전당 말인가.
확실히 궁금할 만했다.
공개하지 않아도 ‘미공개’로 이름이 올라가야 정상.
하지만 기여도의 전당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으니까.
‘민트초코맛있어요가 1위인 건 나도 의외다만.’
물론, 나도 궁금한 건 있었다.
베일에 싸인 인물.
모든 랭커 중에서 가장 궁금한 자가 바로 ‘민트초코맜있어요’니까.
하지만 이번 침략전쟁에서 나는 그와 비슷한 자를 본 적이 없다.
‘게이트 파괴자. 아마도 지구가 아닌 판게니아에서 활약했을 터.’
칭호를 보면 무엇을 했을지 대략 유추는 가능하다.
내가 망자왕 아흐람을 크람델의 지하에서 봉인했던 것처럼, 민트초코맛있어요도 판게니아에서 이세라의 워프를 파괴시킨 건 아닐는지.
‘침략한 마족의 숫자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 망자왕 아흐람 때와 비교하면 더더욱.’
고작해야 20만 규모였다.
망자왕이 크람델의 지하에 모아뒀던 병력의 규모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별 수호자들과 주력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흐람을 봉인하지 못했으리라.
아마도 ‘민트초코맛있어요’가 침략의 워프를 저지한 덕에 추가적인 병력들이 지구로 향하지 못한 듯싶었다.
‘침략의 워프를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
대체 누구일까.
심연에서 바알을 상대할 때도 ‘전달자’의 역할로 이름을 알린 녀석.
범상치 않은 놈임은 분명하다.
마스터가 말하길, 놈은 ‘여러 캐릭터로 변형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민초는 시체를 다루는 영환술사지만, 침략의 워프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제거할 수 있다면······.
‘한 명이 아니라, 혹시 단체인 건가?’
여러 캐릭터로 빙의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저 ‘민트초코맛있어요’라는 이름이 어떠한 단체를 가리키는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 란돌프 님?”
굳은 내 표정을 보고 허드슨이 한 번 더 불러세웠다.
나는 ‘태고용신의 영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털었다.
“음. 0순위라더군.”
“네? 0순위요?”
“초과 업적을 계속해서 달성하다 보면 한 번씩 순위권 바깥에 기록된다더군. 그럴 때마다 ‘기록에 없는’ 존재들과 마주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
태고용신.
그 역시 기록에 없는 존재였다.
내가 끊임없이 초과적인 업적을, 말도 안 되는 점수들을 이룩한 덕분에 결국 튕겨나갔고, 태고용신의 보물창고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부가 아니다.
기록에 없는 존재들은, 훨씬 더 많았다.
-조심하거라. ‘태고’의 존재들이 너를 주시하기 시작할 테니. 나와 같이 너에게 우호적인 녀석들은 이제 없을 터이니.
-‘태고의 시대’에 발을 들인 자들 역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네가 가진 ‘태고’를 알게 된다면, 필사적으로 탐하려 들 테니까.
태고의 존재들.
그리고 태고의 시대에 발을 들인 자들.
그들 모두를 조심은 하되, 이는 앞으로도 내가 계속해서 ‘태고’를 접하고 얻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당연히 겪어보지 못한 허드슨은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튼······ 룬델라에서 아우릴, 아이작, 발테는 돌아왔나?”
유적도시 룬델라.
마스터가 공백인 그곳에 아우릴과 아이작 발테를 보냈다.
정복한 뒤, 지금은 박태우에게 이전한 상태지만.
허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며칠 전에 복귀했습니다.”
“음. 안다사르와 함께 모두 영주성으로 불러모으도록. ‘최초의 불’을 지필 것이다.”
“최초의··· 불이요?”
여전히 의아해하는 허드슨을 보며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보면 알 거다.”
*
화아아아아아악!
나무막대기에서 화로로 옮겨진 불이 크게 타오른다.
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몽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 불은······!”
유일하게 경악하고 있는 건 아우릴뿐이었다.
엘프인 그녀는 이 불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생명의 불!’
모든 것의 시작과도 같은 불이라는 사실을.
아우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생명력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종류였기에.
세계수를 보면서도 이 정도의 생명력은 느끼지 못했건만!
《‘최초의 불’이 피어오릅니다.》
《‘최초의 불’이 도시를 보호합니다.》
《불이 피어있는 한 도시는 오염되지 않으며, 침범당하지 않으며,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미궁 도시’의 정식 주민들은 ‘모든 능력치+3’이 오릅니다.》
《도시 문명의 발전 속도가 월등하게 빨라집니다.》
《보물 탐사 속도가 100% 증가합니다.》
《‘미궁 도시’의 숨겨진 영역이 최초의 불에 의해 드러납니다.》
《‘신비, 최초의 불을 옮긴 자(유일)’를 획득합니다.》
《‘컬렉션’이 완성되어 활성화됩니다.》
《‘최초의 불을 옮긴 자’ + ‘겨울(최후의 황혼)’ = ‘최초와 최후(모든능력치+2)’》
《업적 ‘최초의 불을 옮긴 자’를 달성했습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3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찬양의 자격’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떠오르는 문구.
하지만 이건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최초의 불을 담았던 나무막대기’를 재련합니다.》
《‘정화된 절망의 뼛조각’을 ‘최초의 불’이 머금습니다.》
《‘온전한 황금률’ 1개가 소모됩니다.》
화르륵!
나는 피어오른 불 속으로 나무막대기를 던져넣었다.
불.
그것은 모든 것이다.
그 불을 옮긴 나무막대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보물!
그리고 불은 언제든 사용자에게 가장 걸맞은 것을 선물해주기 마련이었다.
《‘태고의 갑옷’이 완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