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돌프를 찾는 사람들
‘오랜 세월 격을 쌓아 그 자체로 완성된 진정한 완성품들.’
수백, 수천 년을 산 생물을 영물(靈物)이라 칭하듯.
그 열 배를 살아온 나무나 바위를 신성하게 여기듯.
이 보물창고의 장비들 또한 그러한 신성함과 영험함이 깃들어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 세월의 흐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오래되었다.
이걸 뭐라고 칭해야 할까.
‘신물(神物).’
여기 있는 모든 게 신물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가치를 숨기고 있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애초에 이것들은 가치를 뽐내고자 만들어진 게 아니었기에.
‘어지간한 관찰류의 스킬로는 볼 수도 없겠군.’
유일급의 대부분이 그렇다지만, 이곳의 보물은 더 심하다.
관찰을 위한 필요 레벨이 말도 안 되게 높았다.
하지만,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 보였으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의 정보가.
아마도 진화한 ‘진리의 눈’ 덕분일 터.
모든 진리를 통달하여 꿰뚫을 수 있는 기능 같은 게 아닐는지.
나는 천천히 보물의 산을 스쳐지나갔다.
그런 내 눈으로 보이는 모든 ‘정보’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게 저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불을 담은 나무막대기】
··· 생김새는 형편 없었다.
나무를 통으로 잘라서 투박하게 다듬은 모양에, 그을릴 대로 그을린 겉 표면, 크기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어깨 넓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르다.
이곳에 있는 모든 원형의 보물 중에서도 이 나무막대기가 가장 특이하고, 특출났다.
【태고등급】
【태초의 시대, ‘최초의 불’을 옮겼던 나무막대기】
【‘이곳에서 옮겨진 불씨는 수많은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모든 창조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감히 창조의 어머니라, 주신(主神)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멸망조차도 고작 이 나무막대기에 붙은 불을 끄지 못하였다. 한 번 퍼진 불은 영원불멸하게 타오르며 영생하니, 이것이 존재하는 한 세계는 계속해서 이어지리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자조와 후회가 잔뜩 섞여 있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하지만 막대기에 붙은 불은 이제 없었다.
‘불은 일종의 상징성이다. 불로 시작된 수많은 종족의 문명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니까.’
진짜 불이 아닌, 상징적인 문명의 불을 말하는 것일 테다.
멸망은 계속해서 세계를 파괴했으나 결국 문명은 다시금 일어났다.
그리하여 ‘멸망조차 끄지 못한 불’이라 표현한 것이고.
‘이 나무막대기야말로 멸망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다만, 의아함은 있었다.
나무막대기 자체로는 별반 다른 기능이 없었던 탓이다.
등급과 설명 외엔 이렇다할 이점이 없었다.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특수한 스킬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상징성’을 주고자 이런 등급으로 설정된 걸까?
‘태고용신의 보물창고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
신중해야만 했다.
다른 유일등급의 장비들을 무시한 채 그저 등급과 장황한 설명을 보고 이 나무막대기를 선택하는 건 도박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보상의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최초의 불을 담은 나무막대기’를 선택했습니다.》
단순한 상징성이라도 좋다.
이것은 희망 그 자체인 물건.
여기서 계속 썩기엔 너무나도 아까웠으므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나무막대기에서 ‘최초의 불’이 피어오릅니다.》
《‘최초의 불’을 옮길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최초의 불’을 옮겨놓으십시오.》
《최초의 불이 옮겨진 장소는 ‘멸망’도 쉬이 손댈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최초의 불을 이용해 나무막대기를 재련할 수 있습니다.》
《업적 ‘첫 번째 태고’를 달성했습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2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영광의 자격’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나무막대기에 불이 붙었다.
일견 평범하기 그지없으나, 이게 바로 모든 문명과 창조의 시발점이 되는 불이다.
자신을 선택한 자에게만 피어오르는 최초의 불!
그때였다.
‘뭐지?’
눈앞에 흐릿한 형상의 작은 용 한 마리가 있었다.
순간 잘못 본 것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그런 내 반응을 보며 작은 용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너······ 설마 내가 보이느냐?
《‘태고용신의 영혼과 대화’를 진행하기 위한 ‘명예’가 충족되었습니다.》
《히든 업적 ‘태곳적 존재와의 만남’을 달성했습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5,000)로 획득합니다.》
*하이 드라이어드 롬멜.
그는 하루의 시작을 신록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했다.
‘형제의 상태가 오늘은 괜찮나 보군!’
신록이 란돌프와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시작된 일과.
형제인 란돌프는 롬멜과 이 숲의 은인이었다.
죽어가던 바스락 숲에 정령을 돌려주어 생명을 부여했으며, 그로도 모자라 신록을 심어서 숲에 생기를 더해줬으니까.
만에 하나 다시 신록이 위험신호를 보낸다면 롬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의 모든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란돌프를 구하러 출발할 것이었다.
“으음? 우리 형제가 오늘은 기분이 많이 언짢나 보군.”
그런데 오늘은 신록이 내는 소리가 이상했다.
나뭇가지와 잎이 까끌까끌하고 뻑뻑대는 느낌.
란돌프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암시하는 걸까?
“아니야······.”
자연의 노래를 부르는 자.
신록 옆에 매일 꼭 붙어있는 아이가 돌연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란돌프의 기분이 아니라면, 신록이 왜 저런 소리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그럼?”
“엘프들이······.”
엘프들.
얼마 전 이곳을 찾아온 엘프들이 있었다.
장로 아루웬이라고 했던가?
란돌프를 찾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떠났는데, 그 엘프들을 말하는 건지.
아이가 이어서 말했다.
“엘프들이 죽었어. 많이. 엄마 나무가 슬퍼하고 있어. 그래서 신록도 슬퍼.”
엄마나무라면 세계수다.
모든 신록은 세계수의 아이와 같으니, 함께 슬퍼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이 드라이어드 롬멜이 당황하여 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엘프들이 죽다니?”
“‘절망’······ ‘절망’이 깨어났어······ 무, 무서워.”
“절망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프들이 죽은 이유와 절망이 깨어났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상황이 결코 장난은 아니라는 것이다.
후아아아아아앙!
쿠릉! 쿠르르릉!
이내 하늘이 어두워지고, 태풍이 불며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롬멜이 표정을 굳혔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 보구나.’
예감이 좋지 않다.
태풍에서 진한 피 냄새가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롬멜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무래도 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
아이언 왕국의 주인이자 주변 국가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리고 있는 전쟁광인 그가 왕좌에 앉아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
“······!!”
가신들은 몸을 떨었다.
그가 이처럼 광소를 터트리는 날엔 꼭 피를 보았으니.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워서, 차마 입을 열지도 못했다.
벌써 20개가 넘는 도시의 주인이 된 프리드릭 왕.
이대로면 제국조차도 넘볼지 모르는 철혈의 괴물이었으니.
‘흑왕과 다크엘프가 손을 잡았다. 여기에 절망마저 깨어났다. 감히 두려울 게 없겠군.’
흑왕의 목적이 뭘까?
처음에는 앙숙인 백왕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아하니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제국의 팔가 기사단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지.’
뿐만이 아니다.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죄인들을 소독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줄 알았거늘.
제국 내의 가장 큰 무력집단, ‘팔가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왕 때문에? 아니면 프리드릭 왕의 역할을 흉내 내고 있는 자신 때문에?
하지만 팔가 기사단은 황제의 직속부대.
그들은 황제의 명령이나 황제를 위협하는 적을 상대할 때만 움직인다.
그래서 최근 백 년간 그들이 움직인 전례가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움직인 게 백 년 전 ‘미친 마귀’를 죽일 때였으니까.
‘황제라도 깨어난 건가?’
··· 모르겠다.
교만의 악마인 그도 황제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제국의 가장 깊숙한 곳, 신들도 들여다볼 수 없는 장소에 그는 잠들어 있었으므로.
만약 황제가 깨어났다면······.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되었든 팔가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대륙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터.
이 모든 게 우연일까?
퍼즐이, 톱니가 하나씩 맞춰져 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 끝에 무엇이 완성될지는 모르겠으나.
‘본격적인 시작이라.’
악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재밌다.
이 모든 상황이.
거침없는 흑왕, 팔가 기사단과 잠든 황제, 마침내 깨어난 탐욕의 악마, 그리고 어쩌면 마왕까지도.
모두가 다른 박자로 춤을 추고 있는 듯하지만, 하나로 모아보면 결이 같다.
중심이 되는 마지막 퍼즐 하나가 따로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퍼즐은 누구 될까.’
물론 아직 정해지진 않았다.
마지막 퍼즐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깃발을 올려라. 짐이 직접 발란 왕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날을 위해, 더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
직접 발란 왕국의 왕과 결판을 내야겠다.
······ 무조건적인 항복이냐, 죽음이냐.
그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테니.
*미궁 도시로 돌아오며 나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도시가 상당히 발전했군.’
이제는 제법 도시다운 태가 난다.
시민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이긴 했지만.
“미궁 도시! 살기 좋다!”
“일거리! 많다! 마석! 많이 준다!”
크람델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종족의 괴물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궁 도시가 오주력의 도시로 선포됐기 때문이리라.
“크하하하! 드디어 돌아왔구나!”
쿵! 쿵! 쿵!
그때 앞으로 달려오는 거구의 고블린이 있었다.
황금 고블린의 왕!
“봐라! 황금 고블린들과 함께 미궁에서 찾아낸 보물들이다!”
키킥!
키키키킥!
순간 지면에서 워프가 열리며 다수의 황금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르르륵!
곧이어 보따리를 풀자, 수많은 황금과 보물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녀석은 다수의 황금 고블린을 다루며 미궁에서 보물을 찾아내고 있었다.
본래라면 허드슨이 전담했을 터이나, 내게도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
“음, 고생했다.”
“이중에 20%는 내 것이다!”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을 지키고, 보물도 직접 찾는 조건으로 찾아내는 보물의 20%는 녀석에게 주도록 약속한 바가 있었다.
그것을 제외해도 족히 수천만 골드는 되어 보이는 양.
“크하하하하! 이중에 18%가 내 것이라니! 더 많이 찾아낼 거다!”
“18%? 방금 20%라고 하지 않았나?”
“음. 불현듯 18%만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갖고 있던 보물을 전부 나한테 강탈당해서 미치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20% 중 2%를 제 스스로 깎아냈다.
심지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황금 고블린의 왕이었다.
명예나 나와 관련된 특성 때문인 듯싶은데.
‘최초의 불은 역시 미궁 도시에 놔둬야겠군.’
하여간, 도시가 빠른 속도로 번화하고 있었다.
세력이 커져서 나쁠 건 없었다.
최초의 불을 옮기고, 특수한 건물을 더 설치하면 감히 세계 제일의 도시로 성장할 수도 있을 터.
‘불부터 옮겨야 나무막대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최초의 불로 나무막대기를 재련할 수 있다.
그러니 불부터 피우는 게 급선무다.
그렇게 도시의 어느 위치에 최초의 불을 옮겨놓을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란돌프 님!”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허드슨이 부리나케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있었나 보군.”
“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냐?”
이내 가까이 다가온 허드슨이 작게 말했다.
“······ 백왕이 주력들을 호출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백왕이?”
“예. 그리고 와이저 후작도 공문을 보냈습니다. 발란 왕을 뵈러 가야 하는데 함께 가달라고······.”
“굳이 내가 말이냐? 세렝게티도 있을 텐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꼭 함께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있나?”
“앤드류 사제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허드슨이 편지 한 장을 내게 넘겼다.
좌아악!
즉시 인장을 뜯어 내용을 확인한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엘프 아루웬 장로를 비롯한 엘프들이 태초의 숲에 도착하지 않았다. 태초의 숲으로 향할 예정이라 한동안 돌아가지 못한다. 양해해달라······.’
앤드류 사제가 결국 태초의 숲에 들어간 듯싶었다.
게다가 내가 오길 바라는 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백왕과 와이저 후작, 그리고 태초의 숲으로 향한 앤드류 사제까지.
한날한시에 나를 찾는 중이다.
하지만 내 몸은 한 개였다.
이중 하나만 골라서 갈 수 있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 마지막으로, 제국에서도 서신을 보냈습니다.”
“제국에서?”
“예. 제 상회로 보내왔더군요. 서신은 같은 인장을 맞대지 않으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게 해놓은 것 같습니다.”
제국의 인장이 박힌 또 다른 서신 한 장.
같은 인장을 맞대지 않은 채 강제로 뜯어내면 안의 내용물이 타버리는 형식의 서신.
황제의 인장을 꺼내 편지지의 인장에 맞대자, 입구가 스르륵 열리며 안에 있는 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서신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나는 작게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만월의 밤, ‘위대한 달’의 의지에 따라 특별한 사신의 만찬회를 개최하려 한다.
특별한 만찬회인만큼 모든 정통의 후견자들은 최상의 만찬을 준비해야할 터인즉.
이후 ‘팔가 기사회의’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니 반드시 참가하길 바라마, 황금 염소여.
-황금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