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특성, 진리의 눈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
정령탑의 정상으로 역소환 된 그는 이세라의 재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아그니스. 계약사항을 어길 셈인가?”
물의 정령왕 이퀘렐.
그녀가 아그니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령왕이 누군가와 계약을 한 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랜만이었기에.
하지만 아그니스는 소환에 응하지 않으며 계약의무를 위반하고 있었다.
도리어.
“··· 모든 걸 꿰뚫는 창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상대를 꿰뚫을 수 없으니 나는 ‘모든 걸 꿰뚫는 창’이 아니다. 소환에 응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지.”
무덤덤하게 소환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입에 담았다.
궤변이 따로 없다.
이퀘렐은 작게 혀를 찼다.
“이세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군.”
결국, 아그니스가 소환에 응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정령왕의 변심은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세라가 아그니스와 계약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무려 ‘용신의 염원구슬’을 담보로 불러낸 것이었으니.
이어 아그니스와 계약한 이세라는 대신 미르온의 염원구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이세라는 아그니스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20% 정도.
오랜만의 외출인데 능력조차 끌어내지 못하는 반푼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분명히 그 정령은······.’
물론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아그니스는 굳이 답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사신의 모습을 한 정령에 대해 말이다.
‘천상에서 흘러들어와 혼돈구역에 떨어진 그 정령이 틀림없다.’
혼돈구역.
이는 정령탑의 주인들인 정령왕들도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아그니스는 그 구역을 항상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혼돈구역의 일부가 ‘천상’과 연결되어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령탑은 먼 옛날 천상의 일부였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쓰레기를 버리듯, 천상은 온갖 ‘오염물질’을 혼돈구역에 쏟아내었다.
천상은 완전무결하게 깨끗해야만 했으므로.
한데, 어느 날 그러한 천상에서 처음으로 ‘다른 것’을 흘려보냈다.
아직 부화하지 않았던 정령알을.
‘천상에서 도둑맞은 정령알들. 그것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
그게 무엇인지 아그니스는 알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아그니스가 모르는 정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인위적으로 천상에서 만들어진 정령들.
그 정령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탄생했다.
‘천제(天帝)를 부활시키기 위한 영혼의 정령.’
정의하자면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영혼의 정령’인 셈이다.
그것도 천상의 주인을 부활시키려는 재료로써 사용될.
그래서 아그니스는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이다.
정령탑에 온갖 오염물질을 버려대는 천상을 그는 증오했다.
당연히 천상에서 흘러들어온 영혼의 정령도 증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마주한다면 그 즉시 증발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격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이유는 간단했다.
‘복제품이되 복제품이 아니다. 그 모습은 분명······.’
······ 너무나도 원형에 가까웠으니.
*칼날여왕 하나가 용신의 업을 획득할 때, ‘진리의 문’이 열리는 걸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동시에 내 안의 ‘무언가’가 반응한 사실 역시도 깨달았다.
하여,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깨달음은 찰나와 같은 것이다.’
이세라와의 전투를 온전히 하나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
조금만 더 늦으면 이 깨달음이, 내 안의 ‘무언가’가 다시 숨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이후 다시 눈을 뜨자 이미 전쟁은 끝이 나 있었다.
수도 없이 떠오르는 시스템의 문장들이 명명백백하게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코 보상이다.
압도적인 기여도로 인한 보상의 초월!
‘총 다섯 번 초월했다.’
90%가 넘는 기여도.
용신 하나가 이세라를 혼자서 상대했다는 뜻이다.
더불어 승리했다는 의미이며, 여기까진 내 예상과 같은 흐름이었다.
그리하여 ‘태고용신의 보물창고’로 향할 권리를 획득한 것이고.
다만, 첫 번째 지옥왕 ‘아흐람’을 봉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보상이다.
‘아흐람을 봉인했을 땐 플래티넘박스를 얻었지.’
플래티넘 박스에서 얻은 성배는 앤드류 사제의 ‘무한 면죄부 복사’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로 인해 얻은 이득이 얼마나 많던가.
태고용신의 보물창고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일 터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맥의 내부에 생긴 뚜렷한 변화.
“······ 부화가 멈췄군.”
산란소에서 알이 생성되지 않는다.
생성되었던 알들은 부화하지 않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게 멈췄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하나와 연결된 의식도 끊겼다.’
용맥이 건재한 걸 보면 하나가 죽은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당연히 연결되었어야 할 의식이 끊겨 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방증.
이세라와의 전투 자체는 승리했으나, 또 다른 일이 엮인 게 분명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전쟁이 끝났다면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터.
하지만 내겐 찰나와도 같았다.
깨달음은 순식간이었지만, 그 깨달음과 마주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길어진 모양이다.
-선물을 주마.
······ 심층의 가장 밑바닥에서 만난 ‘눈’과 ‘입’은 내게 말했다.
자신을 찾아낸 내게 선물을 주겠노라고.
녀석이 준 선물은 굉장히 간단명료했다.
【히든 특성 ‘대현자’가 ‘진리의 눈’으로 진화합니다.】
히든 특성의 진화!
대현자가 진리의 눈으로 격상한 것이다.
그 뒤 ‘눈’과 ‘입’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제대로 보고 판단하거라. 둘 중 하나의 세계를 선택해야할 때가 올 테니.
······ 묘한 말만을 남기고서.
둘 중 하나의 세계라는 건 판게니아와 지구를 말하는 건지.
여전히 뭐하는 놈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녀석이 내게 적대적이진 않다는 거다.
아직까지는.
후우웁.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상념을 접었다.
지금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할 때가 아니었다.
“······ 나가봐야겠군.”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용맥을 벗어나야할 듯싶었다.
*광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폭주 상태.
천천히 육체를 좀먹어가며 마침내 파멸하는 상태를 일컫는 단어다.
하지만, 하나는 죽지 않았다.
용신의 업이, 조건이 하나를 죽지 않게 만들었다.
-죽여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라!
용신 이전에 그녀는 마혈족의 여왕이었다.
아무리 새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어렸다.
경험이 부족했다.
하여,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길을 알려줘야할 존재의 부재.
란돌프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신의 부재를 느낌과 동시에 하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신은 너를 버렸다!
-너를, 너의 아이들을 버렸다!
-죽여라!
-죽어라!
검에서 들려오는 악의 목소리.
한 번 시작된 광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으면 영원히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일 것이었다.
‘전부 부숴버려야 한다.’
강렬한 파괴욕구.
들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 한 발 늦었군.”
란돌프.
비록 지금 모습은 ‘어둠’ 그 자체였으나 그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옛 신조차도 그녀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했다.
지금껏 나는 모든 상황을 내가 직접 움직여서 해결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깨달음에 눈이 멀어 전쟁을, 하나를 방치한 것이다.
조건상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반만 맞는 선택이었다.
알을 깨고 나온 하나는 아직 어리다는 사실.
완성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망각해버렸다.
내 의식과 연결되지 않으면 혼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했어야 했건만.
‘광란 상태를 해지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용신이 아닌 마혈족의 여왕 하나가 가진 조건.
그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 있는 광란 상태였다.
이는 혈족을 지키지 못한 여왕에게 주어진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
그 발악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여왕의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여왕을 죽이기 위해선.
‘오직 나만이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
내가 공격받는 상황에서만 하나는 데미지를 입는다.
이 세계에서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하나를 죽일 수 있는 것 역시 나밖에 없었다.
‘··· 하나를 그대로 놔두면 지구는 멸망할 거다.’
방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의 인식범위는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지워버릴 터.
명백한 실수다.
지금이라도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세라를 먹어치웠다. 이세라가 먹어치운 루카리아와 함께.’
지금 하나는 나보다도 강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하는 건 힘들다.
하나가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
저게 뭔지 보는 순간 알았다.
용신 루카리아와 이세라가 무기로써 형상화된 것들이라는 걸.
저 두 자루의 검은 그 자체로 유일급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쯧. 반지 때문에 관찰도 안 되는군.’
입 안이 썼다.
검의 정체는 대강 파악이 되지만 그뿐이었다.
이세라가 염원구슬을 사용할 걸 대비해 건네준 절대자의 반지, 찬란한 순혈자의 위상.
그것이 하나와 검의 자세한 상태를 관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잡고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덤벼보거라.”
“······.”
스팟!
순간 시야에서 하나가 모습을 감췄다.
이어 다시 나타났을 땐 이미 내 앞이었다.
빠르다.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푸욱!
하나의 검이 내 육체를 관통했다.
“커헉······!”
미친 듯한 격통!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품을 내주었다.
《‘어둠을 피우는 자’가 공격당했습니다.》
《신성계열의 공격입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200%의 추가된 피해를 입습니다.》
《치명상입니다.》
《빈사상태에 빠집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진다.
‘어둠을 피우는 자’로 변신한 상태에선 신성계열의 타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모습을 고집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다.
“······!”
주르르륵.
하나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입가만이 아니라, 육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꿰뚫은 부위에 정확히 상처가 도진 것이다.
‘예상대로다.’
용신, ‘추종자’의 조건.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때만 타격할 수 있다고 했으나 이는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죽으면 공격당할 일이 없으니 영원한 무적이라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되니까.
즉, 내가 공격당하여 데미지를 입으면 하나 역시도 데미지를 입는다고 봐야할 터.
다만, 한 번에 죽지 않고 치명상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 게 관건이었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했고, 서로가 빈사상태에 빠졌다.
《하나의 육체에 ‘끔찍한 흉조의 눈’이 새겨집니다.》
《빈사상태에선 저항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흉조의 눈’이 완전하게 눈을 뜹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빈사상태를 이용해 하나를 완전하게 제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강제로 흉조의 눈을 박아넣기 위해선 이러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헬.”
-캬캬캬!
헬이 발 아래에 워프를 열었다.
그 즉시 나는 하나와 함께 워프 안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정신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고, 눈은 계속 감겨온다.
하지만 아직 쓰러지긴 이르다.
나는 하나와 함께 용맥의 안으로 발을 옮겼다.
‘당장 옮겨놓는 데에는 성공했다만······.’
직면한 위험은 해결했다.
나도 죽고 하나도 같이 죽을 수는 없었으니,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다.
용맥의 안에선 인식범위를 늘려봤자 다른 곳에 피해를 줄 수 없을 테니까.
‘여전히 광란 상태를 해결하진 못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의 해결은 아니었다.
광란은 죽어야 끝난다.
그러나 그게 유일한 수는 아닐 것이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했다.
찾지 못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터이니.
‘반지부터 빼내야겠군.’
관찰을 불가하게 만드는 찬란한 순혈자의 위상.
나는 먼저 하나의 손에서 반지부터 빼냈다.
그러자.
‘··· 보인다.‘
하나의 상태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히든 특성 ‘진리의 눈‘은 예전보다 더 상세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 보이게 해주었다.
《‘루카리아’와 ‘이세라’의 심장이 현재 융화 중입니다.》
《두 심장이 ‘하나’와 완전하게 융화되기까지 72시간 남았습니다.》
······ 절대로 볼 수 없는 심장간의 미묘한 이음새마저도 말이다.
아직 융화가 되기 전의 단계라.
허용치를 넘어선 두 심장이 하나의 광란 상태를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융화가 완료되면 더더욱 답이 없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이음새가 보인다면, 분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단 분리하는데 성공하면 광란 상태를 해제할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히든 특성 ‘손재주’가 발동합니다.》
《희박한 확률로 ‘루카리아’와 ‘이세라’의 심장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시간이 지날 수록 성공 확률은 낮아집니다.》
《주의! 실패할 경우 심장은 파괴됩니다.》
두근! 두근!
마치 내 손 안에 두 용신의 심장이 쥐어진 것만 같은 감각.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즉시 하나와 두 용신의 심장을 분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