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y!
방법이 없다.
미르온의 ‘정적’으로도 저 마혈족들의 자폭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끄는 마족들 역시도 속수무책이었다.
이세라의 군단 또한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마족들은 기껏해야 이세라를 지키기 위한 고기방패에 지나지 않았다.
“아그니스! 내 창이 되겠다는 계약을 위반할 셈이냐!”
-······.
결국 남은 건 정령왕 아그니스뿐이었다.
허나 정령왕 아그니스는 여전히 빌어먹을 ‘사신’에게 시선이 빼앗긴 채였다.
하지만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계약위반은 치명적인 사항.
-알겠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아그니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화르르르륵!
그 순간 거대한 화염의 창이 이글대며 나타났다.
후아아아앙!
아그니스가 화염의 창을 투척하자, 창은 닿지 않아도 근처에 있는 모든 마혈족을 태워버리며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단 한 번의 투척으로 거의 천에 달하는 마혈족들이 증발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그니스만 제대로 움직이면 이길 수 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군단마저 무적은 아닌 듯싶었다.
아그니스의 공격이 통한다면 이 전쟁, 희망이 있다.
저년의 군단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무적도 풀릴 테니!
“뭐 하는 거냐? 계속 하지 않고?”
그런데 창을 한 번 던지곤 다시 아그니스가 멈춰섰다.
이에 이세라가 짜증을 내며 말하자 아그니스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마력이 부족하다.
······ 뭐? 마력이 부족해?
정령왕 아그니스가 현세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계약자의 마력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세라의 마력은 마를 줄 모르는 바다와도 같았다.
그 많던 마력을 벌써 다 사용했단 말인가?
‘······ 쓸데없이 너무 낭비했다.’
아아.
문제는 낭비였다.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하고자 포탈을 가동시킬 때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했다.
뿐만인가.
용신 루카리아와도 장장 4일간 대결을 치렀다.
게다가 칼날 용신의 연기에 걸려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하고 말았다.
그야 바다 같던 마력도 끝을 보일 수밖에.
‘약점은 들켰고, 병사는 부족하며, 마력도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완벽하게 뒤가 잡혔다.
이 정도로 대책없는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태어난 용신이 이 모든 판을 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 약점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약점을 알고 미리 대비했다면······ 그걸 알 수 있는건 같은 지옥의 군주들 뿐이건만.’
마왕과 지옥의 군주들은 이세라의 약점을 알고 있다.
약점을 수정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것이 배신자인 이세라가 마계에 정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건이었다.
‘설마 내부에 배신자가 있나?’
어디에도 보인 적 없는 조건을 미리 알아내어 대처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한가지뿐이었다.
군주들 중 누구가가 배신하여 알려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용신의 염원구슬도 눈앞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약점을 알려줄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설령 있어도 이상하다.
새로 태어날 용신에게 미리 귀뜸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 어떻게 알고?
펑! 펑! 퍼어엉!
하늘에선 축제가 벌어졌다.
마혈족의 피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족들을 희생하여 막는 것도 한계였다.
‘방법은······ 있다.’
이세라가 시선을 돌려 용신 루카리아를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위험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동족포식.
물론 살점을 뜯어먹는 정도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심장까지 전부 먹어치운다.’
허나 심장까지 먹어치운다면 가능하다.
이 위기를 벗어나, 저 빌어먹을 년을 죽이는 것이.
이세라가 두 눈을 빛냈다.
용신의 심장은 본래 마왕에게 바쳐야하는 공물.
그것을 먹는다는건 마왕을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세라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나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세라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깨달음. 깨달음이라.’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칼날여왕 하나가 ‘부서진 천상의 알’ 속으로 들어가 용신의 업을 얻을 때, 나 역시도 하나의 의식과 연결되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건 수치상으로 정해지지 않은 막연한 실마리 같은 것.
이 세상을 게임으로만 생각해서는 절대로 접할 수 없는 미지(微旨)였다.
‘진리의 문······.’
분명히 보았다.
용신의 업을 칼날여왕에게 부여하는 순간.
찰나지간 열린 ‘진리의 문’을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격을 지니고 부여하는 그 문은 틀리없이 칼날여왕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안에도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 문은, 하나에게 용신의 업을 부여함과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안에 있는 ‘무언가’와 눈을 마주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그 ‘무언가’는 진리의 문이 열리자 아주 불쾌해하는 기색을 내비추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질감.
‘너는 누구냐?’
툭.
나는 가만히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이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진리의 문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존재가 말이다.
만약 하나와 의식이 연결되어 진리의 문을 접하지 못했다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마혈왕이 나를 침범하지 못한 것도 이놈 때문이다.’
히든 특성 ‘마혈족의 왕’이 ‘마혈족의 신’이 되며 나는 모든 마혈족들의 ‘의식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내 안에서 죽어버린 ‘마혈왕’의 남은 잔재의식도.
마혈왕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녀석이었다.
왜 요르문간드가 그러한 반응을 보였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단순히 무력의 강함으로만 비교하자면 마혈왕은 빌헬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빌헬름으로도 못 이길 같았다.
그는 세계를 오로지 힘으로 지배한 최강자였으니.
하지만 그 가공할 존재도 내 안에 있는 ‘무언가’에게 무릎을 꿇었다.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아예 몰랐다면 무시했을 터다.
그러나 알게 된 이상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은채 천천히 나 자신을 관조했다.
끊임없이 수면 아래로 내려가, 마혈왕이 남긴 마지막 의식의 끝부분까지 닿았다.
-벌써 이곳을 찾아오다니, 놀랍군.
······ 그 끝에, 거대한 ‘눈’과 ‘입’이 있었다.
*
······ 힘이 끓어오른다.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감각.
살점을 먹어치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쾌락이 휘몰아쳤다.
“아아아아!”
이세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신 루카리아를, 전부 먹어치웠으니까.
살점과 심장 그 모두를 말이다.
쿠오오오오오!
아그니스가 팔을 들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화염창이 생성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녹아버릴 것만 같은 느낌.
콰아아아아앙!
창을 날리자, 하늘의 절반이 지워졌다.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지워버렸다.
이세라의 격이 상승한만큼 정령왕 아그니스의 힘도 강해진 것이다.
“보아라! 네년의 그 잘난 군단이라는 것도 참으로 별 볼일 없지 않나?”
여유를 되찾은 이세라가 싱긋 웃어보였다.
더 이상 저년의 ‘자폭’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닿기 전에 증발하는데 약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순간 칼날 용신, 하나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아그니스. 모조리 불태워버려라.”
콰아아아아앙!
화염의 창은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았다.
용신 하나가 막으려고 하였으나 광범위한 창의 범위를 혼자서 막는 건 불가능했다.
공격에 닿는 부위만 면역일뿐, 공격 전부를 상쇄시킨다는 말은 아니었기에.
칼날을 펼쳐내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그니스의 공세에 마혈족은 씨가 마르고 말았다.
“네년이 자랑하던 군단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전부 타 죽었다. 이제 네년이 죽을 차례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전부 죽였다.
더 이상 칼날 용신의 군단은 남아있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이제 무적도 풀렸을 것이다.
“······ 아.”
이윽고 용신 하나가 몸을 미친 듯이 떨어대기 시작했다.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표정.
하나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것을 보며 이세라는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왜? 너무 슬퍼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나?”
“아아······.”
“아무리 무적이라도 능력 자체가 부족하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얌전히 체념······.”
“아아아······!!!”
《무리가 전멸했습니다.》
《‘광란’의 특성을 지닌 여왕은 무리가 전멸할 시, 광분합니다.》
《광분한 여왕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미쳐날뜁니다.》
용신 하나가 다시 고개를 들자.
피눈물을 흘리며 두 눈동자도 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푹! 푹! 푸우욱!
이어 칼날의 날개가 하나의 가슴팍 전체를 파고들었다.
가슴팍에서 폭발하듯 피가 튀겼다.
‘미쳐서 자해라도 하는 건가?’
혹시 그 조건이라는 게 군단이 전멸하면 같이 죽는 거였을까?
하긴 너무 말도 안 되는 조건이긴 했다.
용신이 군단을 소유하고, 그 군단 전체의 죽음에 조건을 거는 건 어떤 용신도 갖지 못한 약점이었다.
“흠?”
하지만, 단순한 자해가 아닌 것 같았다.
살점을 파고든 칼날의 날개는 마치 갑옷처럼 용신 하나를 감쌌다.
흘러나온 피는 문신마냥 그녀의 피부 전체에 수많은 선을 그렸다.
‘마지막 발악이로군.’
그 상태를 이세라는 한 마디로 정의내렸다.
쿠오오오오!
이어서 아그니스가 화염의 창을 던졌다.
화염의 창은 하늘을 꿰뚫며 정확히 칼날의 용신에게 적중했다.
약점이 드러난 이상 꿰뚫려 죽거나, 다른 마혈족 벌레들처럼 증발해버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뭐?”
하지만 이세라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군단의 전멸이 약점이 아니었다고?”
··· 여전히 화염의 창은 칼날의 용신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조건이 틀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도대체 어떤 조건을 지닌 거지?
스팟!
그 순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칼날의 용신이 아그니스에게 달려든 것이다.
쫘아아악!
칼날의 용신이 양 손을 놀리자, 기다란 손톱처럼 늘어난 피의 칼날이 마구잡이로 아그니스를 찢어발겼다.
허.
진짜 미친 건가?
짐승도 아니고 저게 무슨 짓인지.
아그니스는 불 그 자체의 존재.
할퀸다고 찢길 리가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이세라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수십 번을 피의 손톱에 할퀴어진 아그니스가 결국 분해되듯 역소환된 것이다.
‘정령을 강제로 역소환시켜?’
이세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소환자의 마력이 남아있는 한 정령은 강제로 역소환되지 않는다.
애초에 본체가 아닌 소환자의 마력으로 형상화한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지고 지금 이세라의 심장에 깃든 마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런데 불의 정령왕이나 되는 존재의 형체가 저 핏빛 손톱에 갈가리 찢겨나가며 역소환되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아그니스!”
재차 이름을 불렀지만 묵묵부답.
아그니스는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마치 겁이라도 먹은 듯이.
스으윽.
광분한 하나와 이세라의 두 눈이 마주쳤다.
“······.”
“멈춰라.”
용신용언.
루카리아가 지닌 가장 강력한 권능이다.
용신들 중에서도 특출난 말의 힘!
‘······ 용언도 아예 안 통한다.’
하지만 여전히 저 짐승은 멈추지 않았다.
따악!
미르온의 ‘정적’을 사용해도 마찬가지.
모든 게 통하지 않는다.
완벽한 면역.
군단을 지우는 건 칼날 용신의 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세라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도저히 약점을 알 수가 없어서.
도리어, 군단을 지움으로서 숨겨진 파괴 본능만 일깨운 셈이었다.
족쇄를 풀어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마력이 넘쳐 흐르면 무엇하나.
그걸 사용할 수가 없는데.
사용한들, 통하지가 않는데 말이다.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붉은 눈의 짐승을 바라보며 이세라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네년은 대체······!”
스아악!
*
《Victory!》
《축하드립니다!》
《군단장 ‘이세라’가 사망했습니다.》
《2차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필독! 새로운 공지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정산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