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군단이니라
마침내 고치를 깨고 세상 바깥으로 나온 하나는 진리에 통달했다.
이성을 깨우치고 용신으로서의 격에 올라서며 보다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
용신의 업은 강제로 하나에게 ‘수호자’의 의무를, 책무를 떠넘겼다.
받아들인 이상 이곳 지구를 수호하라고.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고 말이다.
‘나는 마혈종의 여왕이다.’
그러나 칼날여왕은 그 운명에 저항했다.
용신 이전에 자신은 마혈종의 유일한 여왕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군주이며.
‘주신께서 지어주신 내 이름은 하나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유일함을 의미하는 것.’
······ 하나다.
모든 것의, 태초의 시작인 숫자.
주신 란돌프가 자신의 이름을 하나라고 지은 것엔 모두 의미가 있을 터였다.
칼날여왕은 그 의미와 진리에 대해 찾아 나섰고, 머지않아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군단이다.’
그녀가 곧 군단이며, 군단은 곧 그녀라는 걸.
모두이며 하나인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용신의 업은 그녀가 지닌 본래의 자격을 쇠퇴시키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의 자격을 상기시켜주는 역할만 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자, 마혈종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군주님께 영광을!
-진화하라! 군주님에게 걸맞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이며 모두인 존재들이다!
-연결되어라! 우리의 의식을,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다!
-초월하라! 한계를 깨고 넘어서라!
급진적으로.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마혈종들은 변해갔다.
육체와 정신 모두가.
그런 군단의 변화를 바라보던 칼날여왕 하나는 이윽고 자신의 주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주신께 저항하는 몽매한 자들을 단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주신의 의지를 알 것 같았다.
주신 란돌프.
그녀와 그녀의 군단은, 오직 란돌프만을 신으로 인정한다.
그의 적은 군단의 적.
이후 그녀는 홀로 전장으로 향했다.
군단의 완전한 진화가 끝날 때까지 이세라를 상대할 요량으로.
‘이런 게 나의 첫 적인가.’
칼날여왕은 진심으로 실망하고 말았다.
이세라 역시 군단을 부리는 자.
하지만 그 군단은 이세라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군단이라 칭하지만 저것은 군단이 아니다.
군주의 무지함으로 인한 허수아비들과 다를 게 없었다.
허수아비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를 ‘군단’이라 부르진 않지 않은가.
-진화를 완료했습니다!
-출정의 허락을!
-더 많은 재료를!
-더 좋은 유전자를!
마혈종들은 진화에 목말랐다.
더 강력한 유전자를 받아들여 상위의 존재로 거듭나고자 했다.
하여 칼날여왕은 군단의 출정을 허락했고.
“짐은 군단이니라.”
이 허수아비들에게 진정한 ‘군단’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
칠군주 바사라는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완성된 용맥은 감추어졌지만, 조금 전 그 용맥을 통해 나가는 ‘용신’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흠. 특이한 녀석이로구나.”
새로운 용신.
그것은 확실히 그간 그녀가 보아온 ‘용신’과는 궤가 다른 듯했기에.
정말로 묘한 느낌이었다.
무엇이라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겠다.
이건 바사라에게 있어선 엄청난 일이었다.
‘내가 정의하지 못하는 존재라.’
여태껏 그런 존재가 있었던가?
너무나도 강해서 전율이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약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저 ‘용신’에게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 그래. 이건 거부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혐오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벌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하듯이.
인간이 벌레보다 약하진 않지만, 벌레를 혐오하기에 그로부터 도망치지 않나.
바사라에게 있어서 저 ‘용신’은 그와 같은 존재였다.
굳이 부딪히고 싶지 않은.
‘저게 빌헬름이 만들어낸 용신인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묘한 것을 만들어냈다.
저 용신은 여태껏 존재했던 모든 용신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다.
가장 특이한 방식과 약점을 지닌 개체가 분명했다.
‘용신은 나타났으나 빌헬름의 본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곧 용신의 약점과도 관계가 되어있을 터.’
빌헬름의 본체를 못 보아서 아쉽긴 하지만 얻은 게 없진 않았다.
바사라는 모든 것을 읽었다.
용신과 저 용맥의 안에 있는 빌헬름의 본체.
그 둘이 엄청난 운명으로 묶여있다는 걸 말이다.
과연 자신의 동생인 이세라는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닐까?
바사라가 웃었다.
“동생아. 잘못하면 다시 죽겠구나.”
··· 스스로 못 알아차린다면 또 죽을 수밖에.
*
용신은 혼자인 존재다.
홀로 세계를 수호하는 수호자다.
누군가를 짊어지지도, 군단을 소유하지도 않는다.
완벽한 중립.
오로지 세계를 위해서만 헌신해야하기 때문이다.
‘저런 게 용신이라고?’
하여, 이세라는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새로 태어난 저 칼날의 용신은 자신의 군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혈족.
그 저주받은 종족을.
‘그런데······ 마혈족이 하늘을 날 수가 있던가?’
마혈족의 대표적인 괴물은 파이살메르의 지배자인 사막여왕이다.
그 괴물은 오랜시간 겉가죽을 바꿔가며 도시를 다스려왔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마혈족은 날개 같은 부위는 있으나 날 수 없다.
그건 날개라기보단 커다란 입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한 탓이다.
그럴진대 지금 보이는 마혈족들은 그 ‘커다란 입’의 형태를 변화시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몸의 구조 역시도 미묘하게 달라진 상태였다.
몸을 가볍하게하고 날기 위해 최적화된 것만 같은 느낌.
‘······ 저것들이 약점이로구나!’
아아.
그제야 이세라는 깨달았다.
저 칼날 용신의 약점!
그게 바로 저 ‘군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스로를 군단이라 칭한데다, 군단을 다루는 용신은 전례가 없다.
이는 저 군단 자체가 녀석의 약점이라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전부 죽이면 저년도 죽겠지.’
깨달음을 얻자 이세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슬슬 힘에 부치는지 약점을 드러낸 것이리라.
“아그니스. 저 버러지들을 멸해라.”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
정령계의 절대자이자 모든 것을 꿰뚫는 이세라의 창.
비록 중간계에선 힘이 크게 약화된다지만 그럼에도 용신 루카리아를 함락시킬 정도의 공격이 가능한 괴물이었다.
아그니스와 계약하고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던가.
저딴 마혈족 따위는 순식간에 몰살시키리라.
“아그니스······? 뭐하는 거냐?”
하지만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그니스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이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아그니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아그니스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신.’
그건 바로 사신이었다.
워프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존재.
포탈을 중단시킨 것도 아마 저 사신일 터.
아그니스는 그 사신을 꿰뚫어지듯이 쳐다만 보는 중이었다.
‘······ 미치겠군.’
자신의 창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계약한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대체 저 사신이 무엇이기에?
오래 떨어져있다가 만난 가족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정령에게 가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쯧.”
혀를 찬 이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은 없었다.
아그니스 없이도 마혈족 따위는 자신의 ‘군단’으로 뭉개버릴 수 있으니까.
아무리 숫자가 많고 뭉쳐봤자 결국은 마혈족이다.
저주받은, 허약하기 그지 없는.
근본조차 모를 허접한 생명체들.
반면에 마족은 어떠한가.
마(魔)에서 태어나 오로지 마왕을 떠받드는 하나의 군단이었다.
지금까진 용신 루카리아와 저 빌어먹을 년을 상대하느라 집중하지 못했지만, 군단과 군단의 전투라면 이세라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분야 중 하나였다.
“군단이여. 저 버러지들을 멸하거라.”
정신없이 휘몰아쳐주마.
*
나는 가만히 용맥을 둘러보았다.
오롯이 용신으로 완성된 하나.
그녀는 자신의 혈족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섰다.
‘용신의 약점. 그게 나일 줄이야.’
용신 하나의 약점은 다름아닌 나였다.
나는 천천히 용신의 약점을 떠올렸다.
《‘용신 - 추앙자’는 오직 ‘란돌프’가 공격당할 때만 타격을 입습니다. 그 외의 모든 공격에 면역됩니다.》
나 자신이 공격당할 때만 타격을 입는다는 말.
상처를 입으면 같이 상처를 입는다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내가 공격 당하고 있을 때만 하나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인 즉슨, 내가 이곳에 숨어있으면 하나는 무적이라는 의미이지.’
완성된 용맥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숨겨진 용맥의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이세라가 이 용맥을 노리지 않는 한, 이곳에 있으면 하나는 무적이라는 뜻이었다.
이쯤되자 궁금해졌다.
과연 이세라는 하나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까?
‘바사라라면 그 괴물같은 본능으로 알아낼 수 있겠지만.’
상대가 바사라라면 발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어떤 의미에선 ‘백왕’보다도 강력했으니까.
눈앞에서 모든걸 해체해버리는 그 경이로운 능력만큼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바사라가 해체하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리는 대상은 상대의 기술만이 아니다.
바사라는 상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세라는 아니다.
······ 고로, 이세라는 하나를 이길 수 없다.
절대로.
*
이세라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모두 거짓말일 것이다.
‘저놈들은······ 평범한 마혈족이 아니다.’
자신만만했던 군단과 군단의 대결.
하지만 전쟁의 구도는 이세라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공중을 비행하던 마혈족들은 갑자기 폭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펑! 펑! 퍼어엉!
닿자마자 터지고, 피의 비를 흩뿌렸다.
피의 비는 엄청난 산성을 지녀 마족의 피부와 살점을 녹였다.
막을 수 없다.
저것은 생명을 담보로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폭이었으니.
놈들은 스스로를 터트려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세라에게 전가되었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본능이 경고했다.
저건 진정으로 위험하다고.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여 행하는 공격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공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폭’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저건 진짜 자폭이다.
자신이 설정한 유일무이한 약점!
‘한, 두 마리가 아니다. 십만 마리가 넘는 자폭병들을 지닌 용신이라니!’
뭐 저딴 용신이 다 있는가.
용신은 수호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신의 병사들을 자폭병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폭병들은 한치의 의심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모든 생명을 바쳐 하는 공격. 그것만이 내게 치명상을 남길 수 있을진대!’
그저 명령에 의해 강제로 터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스스로가 ‘희생’을 전제해야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명령이라 따를뿐 진심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닐 줄 알았다.
치이이이이익!
그런데······ 터진 마혈족의 피가 닿자마자, 이세라의 피부에 구멍이 뚫리며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미르온의 재생능력도 발동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이세라는 기겁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지?’
도망칠 수도 없다.
사방은 막혔고, 워프를 열 수도 없으니까.
이세라가 작게 몸을 떨었다.
저 돌연변이 용신은 그가 만나온 용신들과는 전혀 궤가 다른 존재였다.
짐은 곧 군단이라는 말.
그 말 그대로 저 용신 자체가 군단이다.
하나이자 전부, 전부이자 하나!
군단을 소유할 수 없는 용신이 군단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 이세라의 두 눈동자가 짙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죽는다!’
······ 이대로면 끝은 자신의 죽음 뿐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