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날여왕 VS 이세라
‘어이가 없군.’
다크스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유니온은 이세라를 마주한 즉시 수세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진짜 검은 알의 신이라고?’
그가 들었던 ‘검은 알의 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의아함을 느낀 건 다크스타만이 아니었다.
“검은 알의 신이 흉신 바알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흉신 바알보다 이세라가 더 강하다는 거 아닐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투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과장이 섞여있었다고 해도 ‘검은 알의 수호자’가 보여준 능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주인인 ‘검은 알의 신’에게 큰 기대를 거는 건 당연한 일.
그럴진대······.
‘사칭인가?’
유니온은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형편없이 밀리는 중이었다.
도저히 ‘흉신 바알’을 죽인 존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본디 사흉은 멸망이 만들어낸 괴물.
제아무리 이세라가 강하다고한들 사흉을 압도할 만큼 강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어진 장면에서 모두가 경악성을 내뱉고 말았다.
“저, 정령왕!”
“이세라가 정령왕을 소환할 줄이야!”
“아아, 끝장이야!”
유니온을 밀어붙이던 이세라가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하늘까지 치솟았던 사기는 다시 바닥을 기었다.
······ 미친.
정령왕이라니!
‘··· 이야기로만 들었다. 정령왕과 계약한 자는 한 명도 없으니까.’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를 보자마자 다크스타는 전율하였다.
백성전의 백성좌들, 심연의 틈새를 지배하는 지배자들, 여신을 수호하는 토룡의 거인들, 세상의 북쪽과 남쪽 끝에 있다는 흑왕과 백왕······ 감히 그들과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은 게 정령왕이라는 존재였으므로.
정령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령탑’의 끝에 있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정령왕과 계약한 자는 없다.
애당초 정령탑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허나, 정령탑의 정령들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여 일반적인 정령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다고 전해진다.
정령왕들의 가호와 축복 덕분에 말이다.
‘대원정때만 하더라도 이세라는 정령왕을 부리지 못했다. 설마 그때보다 더 강해진 건가?’
······ 기겁할 일이다.
대원정에서도 죽이기 힘들었던 놈이 더 강해졌단다.
하물며 이세라의 약점을 찾기 위해 시간을 벌어줄 빌헬름도 없는 상황.
유일한 희망이었던 유니온도 저 모양 저 꼴이다.
그는 온몸이 불타며 발악하듯 장비들을 소환해대고 있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으나 실망할 틈조차도 없었다.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화염의 창을 소환해 유니온의 방패를 순식간에 뚫어버린 탓이다.
‘저, 저 방패는 그라시아도 뚫지 못했던 건데······.’
‘그걸 단 한 방에?’
‘저런걸 어떻게 이겨?’
가히, 압도적이다.
저딴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인류에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화염의 창이 유니온을 뚫어버리려 할 때였다.
“불이여, 사라지거라.”
콰르르르릉!
번개와 함께 나타난 거대한 용.
화염의 창을 증발시킨 뒤 압도적인 위용으로 나타난 그 순백의 용에게 다시 한 번 모두가 시선을 빼앗겼다.
이세라와 정령왕만으로도 벅찬 이 순간에 또 다른 괴물이 출현한 것이다.
모두의 안색이 그늘에 잠기려할 때.
“겁먹지 마십시오! 용신 루카리아는 인류의, 지구의 편입니다!”
찰나지간 누군가가 외쳤다.
시선을 돌려 소리를 내지른 사람을 확인한 다크스타는 두 눈을 깜빡였다.
‘······ 박태우?’
잘못봤을 리가 없다.
분명히 측근들과 함께 도망쳤다 생각했던 한국의 대표, 박태우가 분명했다.
애국심도 없는 겁쟁이라고 여겼건만 어떻게 된 일일까?
콰릉! 콰르르릉!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진 수많은 번개.
“뭐, 뭐야?”
“번개가 마족들을 태운다!”
번개는 오직 마족만을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단순한 번개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초월스킬과도 같은 것.
정말로 저 거대한 용은 마족을 멸하고 있는 것이다.
‘용신 루카리아···!’
미친.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랐다.
검은 알의 수호자, 유니온, 이세라, 정령왕에 이어서 이번엔 용신이라고?
용신이 무엇인가.
다크스타가 아는 거라곤 용신이 ‘균형의 수호자’라는 내용뿐이었다.
하지만 실물을 본 적은 없다.
애초에 용신은 용맥에서 잠들어있기에 볼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용의 영혼이여 제게 강림하소서!”
곧이어 박태우의 전신에 용의 갑주와 투구가 입혀졌다.
그는 용의 영혼을 부를 수 있는 ‘용령사’였다.
무장을 완료한 박태우는 이내 전장으로 뛰어들며 마족들을 베어나갔다.
‘박태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설마 용령사 클래스가 용신을 깨우는데 도움을 준 건가?
확실한 건 용신 루카리아와 박태우가 등장한 이후 재차 사기가 올랐다는 점이다.
만약 용신이 이세라를 잡고, 인류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주인공은 영웅회와 자신이 아닌 한국과 박태우가 될 것이었다.
빠드득!
다크스타가 심경이 복잡한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부아가 치밀었다.
첫단추부터 꼬일대로 꼬여버린 느낌.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
‘허드슨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니······!’
용신 루카리아를 깨운 박태우는 아직도 이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해당 좌표로 가서 염원구슬을 사용하십시오. 용령사인 당신이라면 잠들어있는 루카리아를 깨울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이 공격받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
박태우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드슨은 인간이지만 허드슨을 움직이는 오주력은 백왕 산하의 괴물이다.
그 괴물이 자신을 찾아서 시킬 일이라는 게 용신을 깨우는 것이란다.
솔직히 누가 믿을 수 있겠나.
‘믿어야만 했다.’
마스터를 죽이고 유적도시 룬델라의 지배자가 된 오주력의 소식.
그 소식을 먼저 알린 건 허드슨이다.
뿐만이 아니라 거래도 제안했다.
만에 하나 거짓이라면, 자신 하나 빼내자고 직접 한국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했다는 건데.
제대로된 영향력 하나 없는 자신에게 굳이 거래를 제안한다?
어차피 그가 있든 없든 전쟁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냉정하게 박태우는 허드슨과 같은 거물이 본인의 시간을 들일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차라리 다크스타를 찾아갔다면 모를까.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나를 찾아온 거다.’
하여 박태우는 도박을 걸었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허드슨이 말한 좌표로 찾아가 염원구슬을 사용하자 루카리아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용신의 이름을 입에 담자 루카리아가 긴 동면에서 깨어난 것이다.
‘덕분에 용령사의 주력 스킬 레벨도 올라갔지.’
루카리아를 깨운 걸로도 모자라 박태우도 성장했다.
더불어 유니온이 ‘검은 알의 수호자’와 함께 마족들을 막았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마족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허드슨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럼 새로 나타난 용맥에 오주력이 있다는 말도······.’
그 역시 사실일 터.
이쯤되자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오주력.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단순히 백왕 산하의 괴물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백왕 산하의 괴물이 지구에 ‘용맥’을 만들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용신 루카리아가 있는 좌표와 자신의 존재를 알 리 없으니까.
‘그래. 오주력이라는 칭호는 진짜 정체를 감추기 위한 가림막에 불과하다.’
박태우는 확신했다.
그는 오주력 따위가 아니다.
훨씬 더 대단한 무언가였다.
‘설마······.’
꿀꺽!
이윽고 오주력의 이름을 떠올린 박태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쿵! 콰르르릉!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벼락.
루카리아는 계속해서 이세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죽어라, 이세라.”
용신 루카리아는 자신의 두 눈을 제물삼아 강렬한 뇌전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허나 완전한 소실은 아니다.
미칠듯한 재생능력으로 두 눈이 재생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하늘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번개가 내리쳐 마족들을 불태웠으며, 정령왕 아그니스는 어느덧 전기의 고리에 온몸이 포박당한 상태였다.
“······ 엄청나군.”
“저게 용신?”
“진짜 신이다······.”
신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
유니온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의 모습이었다.
이세라나 다른 마족들은 제대로된 반격 한 번 못해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꽈악!
박태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허드슨의 말을 듣길 잘했다.
이로써 2차 침략을 완전하게 막아낸 것이다.
‘이길 수 있······!’
“이게 전부냐, 루카리아?”
화르륵!
수세에 몰리던 이세라의 주변으로 둥근 화염의 막이 생성되었다.
화염의 막은 너무나도 쉽게 루카리아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그와 함께 파괴된 이세라의 육체가 빠르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멍청하구나.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용신사냥에 나섰을 것 같나?”
“······ 이세라. 설마 ‘금기’를 어겼느냐?”
루카리아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용신의 금기.
그것을 증명하듯 이세라가 웃어보였다.
“심장은 마왕님께 바쳤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건 내가 먹었다.”
“네놈······!”
“미르온은 너와 같은 ‘7용신’ 중 하나였지. 그를 먹고 나는 보다 완벽해졌다. 너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용신은 서로를 죽여서도, 잡아먹어서도 안 된다.
그것이 규율이다.
이세라는 그 규율을, 금기를 어겼다.
따악!
이세라가 검지와 중지를 부딪혔다.
우웅.
그러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하늘에서 몰아치던 번개도 모두 사라졌다.
정령왕을 포박한 고리마저도 말이다.
루카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미르온의······!”
미르온의 절대적인 권능, ‘정적’이다.
모든 것을 침묵시키는 힘.
재생의 힘과 더불어 그것을 이세라가 가져간 것이다.
절대적인 방패와 절대적인 창을 모두 갖췄다.
그야말로 무적.
이세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디 한 번 발악해보거라, 루카리아.”
*
“아아······!”
전투는 길어졌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은 명명백백했다.
플레이어들이 지쳐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카리아는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재생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계속해서 입었다.
정령왕 아그니스는 끊임없이 화염의 창을 던져댔고, 이세라는 루카리아의 모든 공격을 무효로 되돌리며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버텨라! 버텨야만 한다!”
“전선을 유지해! 더 밀리면 우리의 가족이, 친구가 죽는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정말로 뒤가 없었으니까.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가 모두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나흘이 지났다.
키아아아아악!
끝내 루카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쿠우우우우웅!
만신창이가 되어, 결국 지상에 몸을 눕힌 것이다.
“더, 더 이상은······.”
“못 버텨······.”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루카리아까지 쓰러진 상황.
이제는 한계였다.
잠 한 숨 못 자고 전쟁을 치른 지 벌써 4일.
이미 대다수의 플레이어는 ‘황금률의 조각’을 모두 사용했다.
남은 시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변신이 풀린 자들은 죽음을 맞이했으며, 겨우 발을 뺀 사람들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검은 알의 수호자’가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워프로 강제이동시키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벌어졌으리라.
“신이시여······!”
모두가 절망했다.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장의 플레이어는 천 명도 채 남지 않았다.
반면 마족은 아직도 5만가량이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이세라가 기세등등했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감히 차원이 달랐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체력하나는 인정해주마. 아그니스의 공격을 나흘이나 버텨내다니.”
이세라가 이죽대며 쓰러진 루카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빠르게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맷집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이제 편히 죽거라, 루카리아.”
루카리아의 심장을 향해 이세라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푸아악!
“······?”
이세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기다란 가시.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강력한 타격과 함께 말이다.
이세라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너는······.”
칼날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묘한 기색의 여자.
상대를 확인한 이세라가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아아, 네년이 그 새로운 ‘용신’인가 보군.”
······ 저 여자가 바로 새로 태어난 그 돌연변이 용신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