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알의 수호자
한국 연합.
서울 한복판에 마련된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 박태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온 금발의 외국인 남자.
그의 이름을 들은 뒤로부터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허드슨. 허드슨 상회의 주인이자 오주력의 오른팔! 미궁 도시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남자가······ 플레이어였다니!’
미궁 도시는 백왕의 직접적인 비호를 받는 괴물들의 도시다.
오주력이 주인으로 있으나 실질적인 관리자는 인간인 허드슨이었다.
그 사실로 인해 허드슨은 판게니아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북부의 괴물들이, 인간과 함께 하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크람델이 괴물들은 특히 인간을 싫어하니까.’
불가능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그야 소란이 될 수밖에.
하지만 아무도 그를 ‘플레이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명예의 전당에 같은 이름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워낙 하위권이었다.
동명이인이라 생각하지 동일인으로 여기진 않았던 게다.
‘은둔자이자 북부의 괴물들과도 선이 닿은 남자. 거물이다.’
허드슨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은둔자가 분명했다.
하물며 오주력뿐만이 아니라, 북부와도 연계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자는 미궁도시의 물건을 팔아서 수십억의 골드를 벌어들이고 있었으므로.
이는 여태껏 없었던 종류의 ‘거물(巨物)’이다.
‘이런 거물이 왜 날 찾아온 거지?’
허드슨은 자신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다.
하여, 어느 때보다도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건, 플레이어임을 자백한 것과 마찬가지.
여태껏 숨기고 있었던 정체를 자신에게 밝힌 연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저 얼굴······ 틀림없이 판게니아의 허드슨이 맞다. 정보부가 뽑아낸 기록에서 본 모습과 상당히 유사해.’
거짓은 아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서 ‘허드슨’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구에서의 모습은 알 길이 없으나 정보부에서 뽑아낸 모습과 100% 일치했다.
“아아.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앉아서 얘기할까요? 마실 건 차? 커피?”
최대한 심신을 안정시킨 뒤 박태우가 말했다.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다.
이곳은 자신의 구역이었고, 여유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푹신한 의자에 앉은 허드슨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따듯한 물 한 잔만 주십시오.”
비서를 통해 따듯한 물과 녹차 한 잔을 내어온 박태우가 천천히 물었다.
“······ 허드슨 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를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후룩.
박태우는 최대한 차분한 모습으로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상대는 허드슨. 본분은 장사꾼이지만, 북부의 괴물과 연이 닿은 거물이다. 자신을 찾아온 엄청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허드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박태우 님. 판게니아에서 한국이 사용할 수 있는 도시를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 푸학!?!”
박태우는 마시던 녹차를 저도 모르게 뿜었다.
순간 얼이 나갔다.
환청인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 도시를 줘?’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판게니아의 도시가 무슨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한국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게 바로 판게니아의 도시였건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허드슨이 웃었다.
“물론, 미궁 도시는 아닙니다만.”
“잠깐. 그럼 어느······ 도시를 말하는 겁니까?”
“유적도시 룬델라.”
“······!!!”
박태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미친!
마스터가 갖고 있던 대표적인 도시가 유적도시 룬델라 아닌가.
마스터가 죽은 뒤 가뜩이나 말이 많았던 곳이다.
“룬델라는 지정된 후계자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마스터는 그 흔한 후계 하나 두지 않았다.
룬델라는 공석.
전쟁을 일으켜 먼저 갖는 게 임자인 도시거늘.
“저의 주인께서 그곳을 지배할 권한을 지니고 계십니다.”
“설마 마스터를 죽인 게······ 오주력이다?”
“예.”
간단명료했다.
마스터를 주인 게 오주력일 줄이야.
도시의 주인을 죽이면, 그 도시를 빼앗을 권한을 지니게 된다.
굳이 전쟁을 벌일 필요조차 없다.
당사자나 대리자가 도시의 중심부에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일.
후계자가 있다면 당연히 막아서겠지만, 룬델라는 후계자가 없지 않나.
‘룬델라는 아직도 파내지 못한 유적으로 가득하다. 가질 수만 있다면 한국의 전력은 족히 세 배는 강해질 거야.’
거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득이다.
도시의 주인만 일으킬 수 있는 퀘스트도 있는 데다, 유적을 판매해 돈을 벌거나 세금으로 골드를 충당하여 더 질 좋은 장비를 구입할 수도 있다.
뿐만인가.
연합원은 도시의 수많은 혜택을 훨씬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도시에 특정 교단을 들여 교단과 친분을 쌓거나, 도시나 국가 단위의 거래가 가능해진다.
병사와 기사를 고용해 더 높은 단계의 던전을 도는 것조차 가능해질 것이다.
그 외에도 도시의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판게니아에서 강해진다는 건, 곧 현실에서도 강해진다는 의미.
‘최소한 예전과 같이 한국이 무시받을 일은 없어지겠지.’
마족의 침략에서 한국은 도움조차 받지 못했다.
한국보단 일본을 먼저 구하는 게 다크스타의, 연합회의 의지였다.
일본의 플레이어들은 판게니아에서 거점 도시를 세 곳이나 갖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걸 믿어야 하나?’
······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제안이다.
도시를 주겠다니.
오주력이 마스터를 죽인 장본인이라니.
“못 믿는 눈치로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쯤이면 도시들에 공문이 도착했을 겁니다. 한 번 확인해보시지요.”
공문이 도착했다고?
박태우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허드슨을 눈앞에 두고 로그인 할 수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 ‘도시의 공문’은 ‘도시의 주인’만 받아볼 수 있다.
그때였다.
쿵!
“기, 긴급입니다! 유적도시 룬델라에서 공문이 내려왔다고······ 아!”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외쳤다.
그리곤 허드슨을 확인한 뒤 급히 입을 닫았다.
박태우가 표정을 굳혔다.
“··· 무슨 공문이지?”
“그, 그게, 뉴욕 헤라 길드에게 전해듣기론 룬델라가 지금 막 오주력의 도시로 공표되었다고 합니다. 그에 관련된 공문이 모든 도시에······!”
“······ 알겠다. 나가보도록.”
“옙!”
쿵!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간 남자를 보며, 박태우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허드슨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허드슨은, 오주력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것이리라.
······ 괴물 오주력.
유일하게 인간을 옆에 둔 북방의 괴물.
실체를 본 자는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실패한 심연 미궁을 홀로 클리어한 존재!
하물며 오주력은 주력들 중 백왕이 직접 비호를 선서한 유일한 자다.
그런 자가, 자신을 찾았다.
왜?
“구미는 당기지만, 지금은 이곳으로 쳐들어올 마족들을 막아야 합니다.”
당기는 정도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갖고 싶다.
설령 괴물의 부탁을 들어주고서라도.
그러나 지금은 한국을 지켜야할 때였다.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된다.
죽을지, 살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박태우가 거절하자, 허드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마십시오. 마족들이 원하는대로 진행되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오주력께서 박태우 님께 시킬 일은 어차피 용맥을, 한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게 시킬 일이 이번 침략과 관계되어있다는 말입니까?”
“아아, 정확히 말하자면 용신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
*
“다크스타 님. 박태우가 측근들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마족들의 침공이 있기 전.
먼저 한국에 도착한 다크스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친 건가? 그렇게 큰 소리를 치더니?”
어이가 없었다.
한국부터 지켜달라고 그렇게 악을 쓰고 떼를 쓰더니, 막상 한국에 오니 가장 먼저 도망쳐버린 것이다.
‘애국심도 없는 건가?’
한국을 대표한다는 전사가 고작 그 정도 인간일 줄이야.
다크스타가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저게 용맥. 생긴건 고대의 신전 같은데.’
갑자기 지상에 떠오른 거대한 신전.
저게 용맥이란다.
입장은 불가능하지만, 저 용맥이 침략자들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용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봐야겠군. 그게 안된다면 주변 땅이라도 가져야겠다.’
용맥이 무엇인가.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신화에 따르면 용맥의 근처에서 유독 많은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한국에 용맥이 그대로 보존된다면 주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볼 수도 있으리라.
박태우가 도망쳤으니까.
자신들이 아니면 이곳을, 한국을 누가 지켜주겠나.
다크스타가 입맛을 다시던 그 순간이었다.
“워프가 열렸습니다!”
“마족! 마족입니다!”
지잉.
지이이잉!
하늘에서 수많은 워프가 열리더니, 셀 수 없이 많은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마족들이 용맥이 새겨진 좌표로 향하고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워프를 열고 침공을 시작했으니, 인간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전부 막아내진 못하리라.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할 포탈을 여는 것도 일이로군.’
군단장이 지녀야할 당연한 권능 중 하나.
매스 텔레포트!
설치된 포탈을 기동시키려면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하기에 자주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실행된 이상 수십만에 달하는 마족들이 용맥을 파괴할 터.
감히 인간들은 막을 수 없다.
‘한 곳에 모아주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되나.’
용맥이 인간들을 한곳으로 몰아준 덕에, 일이 더 쉬워졌다.
한꺼번에 몰살시키면 더는 그를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때였다.
“구, 군단장님. 무언가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때 고위의 마족이 당황하며 이세라를 찾았다.
이에 이세라가 묻자, 고위마족이 눈동자를 떨곤 말했다.
“포, 포탈이 다시 닫히고 있습니다.”
··· 한 번 열린 워프가 닫혀?
의아함을 느낀 이세라가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한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맛살을 구겼다.
마계에서 미리 설치해온 거대하기 짝이 없는 포탈.
겨우 기동시켰던 그 포탈이, 서서히 닫혀가고 있었다.
포탈로 이동하던 수많은 마족들이 당황하여 주춤대는 중이었다.
‘······ 포탈을 강제로 닫는다고?’
이세라는 그 즉시 원인을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포탈을 강제로 닫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신교의 ‘정통’들이 워프를 열고 닫는 권한을 지녔다고는 알고 있지만, 이건 단순한 워프가 아니다.
대규모의 이동을 위해 설치된 포탈.
수십만 개의 워프를 동시에 생성하는 이 포탈을 어찌 닫을 수 있겠나.
“······.”
곧이어 포탈이 완전히 닫히자 이세라의 미간에 주름이 더 새겨졌다.
믿기지 않지만 누군가가 강제로 포탈을 닫아버렸다.
공간이동이 불가해졌다.
이는 즉.
‘······ 직접 날아가야한다.’
용맥이 있는 곳까지 직접 날아가야 한다는 소리다.
*
워프가 열리며 마족들의 침공이 시작된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워프가 닫히고, 침공해오는 마족들의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했다.
-캬캬캬캬캬!
‘그것’은 분명히 사신이다.
영락없는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신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건······?”
“잠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 서, 설마 제주도의 사신님······!”
“‘검은 알의 수호자’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특히 ‘제주도 소실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흥분하며 외쳤다.
그도 그럴 게 ‘검은 알의 수호자’는 심연에서 바알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탈출시켜준 존재였으니까.
“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건 ‘검은 알의 수호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 복장을 한 남자.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족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럼 저 사람이 ‘검은 알의 신’인가?”
“아니야! 유니온이야! 전에 공격해온 황금률의 마법사!”
“뭐? 유니온은 마족 편 아니었어?”
“그러니까. 유니온이 우리를 왜 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