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벨업!
도전자가 처음 검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광룡 아인하사르.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수많은 신화적 업적을 이룩한 자’여야만 했고, 그 조건을 만족하는 인간은 여태껏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도 내게 약간의 상처를 입힌 게 전부였다.’
심지어 그 한 명조차도 약간의 생채기를 낸 게 전부다.
자신의 시련을 도전할 당시의 기준으로 말이다.
한데, 눈앞에 있는 도전자는 달랐다.
‘··· 내 껍질이 종잇장처럼 베어졌다. 더해 살점이 꿰이고 내장이 튀어나왔다.’
그저 휘둘렀을 뿐인 공격이었다.
그 공격에는 어떠한 스킬도, 기교도 들어있지 않았다.
단순히 힘을 주어 휘두른 게 전부인 공격에 아인하사르의 껍질과 속살은 마치 물러버린 무처럼 손쉽게 베어져 나간 것이다.
용의 단단한 외피도, 섬세한 근육도 다 소용없었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한 방.
모든 걸 쏟아내게 만든 치명상이었다.
‘······ 얼마만큼의 위업을 쌓아야 내게 이 정도의 타격이 가능한 거지?’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웬만한 업적으로는 어림도 없다.
신화적인 업적을 못 해도 세 개는 달성해야 자신의 외피에 약간의 상처나 겨우 남길 수 있을 터.
한데, 이만한 치명상을 입히려면 어느 정도의 위업을 달성해야 할지 아인하사르조차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생에 하나를 이룩하기도 힘든 게 신화적인 위업이거늘.’
하나조차 어려운 게 그것이다.
그것을 대체 몇 개나 이룩해야 단 한 번의 공격이 치명상이 될 수 있을까.
열 개? 스무 개?
아니, 아니다.
그저 단순한 ‘신화적인 업적’이라면 백 개를 쌓아도 이 정도의 격에 닿을 수 없다.
눈앞의 도전자는 신화 그 자체인 업적, 혹은 신화를 넘어선 더 엄청난 무언가를 몇 개나 이룩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여태껏 도전해온 도전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환 불가, 관찰 불가의 이유를 너무 등한시한 게 패착이었음을.
처음부터 단순히 ‘묘한 놈’ 정도로 여겨선 안 됐다.
이놈은 여태껏 도전한 모든 도전자를 다 합쳐도 차원이 다른 녀석이다.
그러니······ 이대로 물러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의무는 도전자의 한계를 끌어내는 것.
하지만 지금으로선 저 도전자의 끝을 알 수가 없었다.
한계가 어디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광룡 아인하사르.
그는 처음으로, 도전자를 상대로 자존심을 접었다.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었다.
-부디 한 번만. 하나의 시련만 더 하자꾸나.
*
나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광룡 아인하사르.
이놈은 여전히 오만했으니.
‘낚였군.’
힘겹게 시련을 이행하는 척 연기를 한 건 한 단계씩 시련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대검을 쉽게 휘둘렀다면 광룡 아인하사르는 그 즉시 난이도를 대폭 올렸을 것이기에.
‘마지막 시련은 뻔하지.’
가장 어려운 시험은 광룡 아인하사르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빌헬름으로 도전해봤으니까.’
빌헬름을 플레이할 때 당연히 메인 퀘스트 10에 도달한 적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명확하게 달랐다.
‘란돌프로 이룬 업적이 훨씬 많다.’
빌헬름으로 메인 퀘스트 10에 도달할 당시의 업적보다, 현재 내가 이룩한 업적이 훨씬 많았다.
업적의 격을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양과 질. 그 모든 면에서 앞서니, 광룡 아인하사르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모든 업적의 끝을 보며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빌헬름으로 플레이할 때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 수준마저 넘어섰다.
다만.
‘··· 날카로운 칼로 순두부를 써는 기분이로군.’
설마 이 정도의 치명상을 주리라곤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거의 죽이기 직전까지 갔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진심을 담았다면 아인하사르는 죽고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적을 얻었겠지.
······ 음.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시련은 끝난 것 아닌가? 굳이 하나를 더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만.”
그러나 의외인 건 바로 이점이다.
시련의 추가.
본래 정해둔 시련만 이행하는 거 아니었나?
추가된 시련을 받아달라는 말은 나도 처음 들어봤다.
‘본래 시련을 끝내면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광룡 아인하사르는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이니, 가능한 선에서 대답해주게 되어있지.’
운이 좋으면 유일급 도안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도 있는 물음.
나는 당연히 지구의 용신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이세라보다 먼저 찾아내서 놈을 방해해야 했으니 말이다.
광룡 아인하사르도 본디 용신이었으니, 당연히 다른 용신의 행방도 알고 있을 터.
-추가적인 시련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추가적인 보상 또한 주어질 것이다.
오호라.
한데, 이놈이 따로 보상도 챙겨주던가?
용의 둥지는 보물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광룡 아인하사르의 둥지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먼지나 돌멩이 같은 걸 선물도 주진 않을 테고.
“보상이라는 걸 먼저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게다가 틀림없이 더욱 어려운 시련을 낼 것이다.
준다고 덥석 받아들이는 건 멍청한 짓.
아인하사르가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
아리송한 대답에 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퀴즈인가? 그럼 없던 일로 하지.”
-이건 내가 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너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자신하지.
“가장 필요한 보상을 준다면서 정할 수 없다? 모순이로군.”
-······ 시련을 듣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리해도 기본적인 보상은 주어질 터이니.
더 말할 수 없다는 듯 묘한 태도를 보인다.
대체 무슨 시련을 내리려고 이러는 걸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련을 듣고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럼 그 시련이라는 걸 먼저 들어보마.”
그러자 아인하사르가 거대한 동체를 낮춰, 나를 바라보았다.
탁하기 그지없는 눈.
다른 용들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미친 용의 눈으로.
과연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련을 내릴는지.
-··· 내게 걸린 저주를 풀어라. 이것이 마지막 시련의 내용이다.
저주?
뜬금없는 소리에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저주가 걸려 있다고?’
하지만 읽히지 않는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광룡 아인하사르에게 저주가 걸려있다니, 그런 사실 역시도 처음 들었다.
‘대현자로도 보이지 않는 저주라.’
진리탐구의 레벨을 더 올리면 보일까?
그러나 당장 재능 레벨을 올릴 SP가 없었다.
다량의 SP를 얻으려면 균열의 탑을 올라야만 했다.
-받아들이겠느냐?
······ 받아들이면 그 순간 물러설 수 없다.
하지만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 모르는 상태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작게 침음을 내뱉었다.
광룡 아인하사르에게 걸린 저주라.
누가, 언제, 어디서?
‘멸망.’
딱 하나 예상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멸망’이었다.
중간계의 수호자 아인하사르가 광룡이 된 건 ‘멸망’과 싸운 직후의 일.
‘멸망’이 태어난 즉시 덤벼든 용이 모두 죽고, 아인하사르만 살아남았다고 알고 있었다.
‘멸망이 아인하사르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래서 광룡이 된 거라면.’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떨어트린 자.
그가 누구이고, 어떻게 탄생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멸망은 모든 걸 불태우고 사라졌다. 그러나 멸망이 막 등장했을 당시엔 아인하사르를 죽이지 못했다. 아마도 아예 새롭게 태어나서, 업적을 쌓지 못한 상태여서 그랬겠지.’
아인하사르를 죽일 수 있는 조건을 당시엔 달성하지 못한 상태여서 아니겠나.
이건 세계관의 중심이 되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다.
멸망은 누군가가 도달하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혹시 특정 조건에 도달하면 멸망이 태어나는 건가?
누군가가 격을 쌓고 도달하여 멸망되었다면 손쉽게 아인하사르를 죽였을 테니 말이다.
‘죽이지만 못했을 뿐 저주를 걸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저주를.’
용신을 미치게 만들 수준의 저주.
갓 태어난 멸망이 걸었음에도 내가 알아내지 못할 정도다.
그럼 전성기의 멸망은 대체 얼마나 강했다는 건지.
그러나 멸망의 대척점에 선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여신 레아.’
멸망과 가장 격하게 싸운 신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그 여신 레아의 기사라고 불렸던 게 나다.
나는 손을 뻗었다.
동시에.
-‘별의 축복’을 시전합니다.
-‘멸망의 저주’를 풀기 위한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1) ‘별 4개 보유’ 달성
-(2) 능력치 총합 50이 부족합니다.
-(3) 규격 외 상태 이상 회복의 축복
저주를 풀기 위한 세 개의 조건이 나타났다.
*
‘이제 이틀 남았군.’
성안에서 유니온이 가만히 권좌에 앉아 양손을 맞잡았다.
이세라와의 약속까지 앞으로 이틀.
이틀 후면 경험치 물약을 모조리 털어 넣고, 균열 수호자들을 강제로 소환해야만 된다.
‘젠장. 아직 내 목적은 이루지도 못했거늘.’
자신의 몸으로 장난을 친 인간.
그 인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분명히 놈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갖췄음에도.
‘현재 놈은 민트초코맛있어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죄인들 사이에서 놈이 어떻게 불리는지까지 알아내었다.
하지만 도저히 위치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이름만 알려졌을 뿐, 그 누구도 그를 모르는 탓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이세라의 부탁을 빨리 들어주는 게 낫겠군.’
약속한 시간보다 더 빨리 이행해서 약간의 신뢰라도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이틀 안에 놈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한숨을 내쉰 유니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벤토리, 경험치 물약.”
그 순간.
《인벤토리에 경험치 물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떠오른 글귀를 보며, 유니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 뭐?’
인벤토리에 경험치 물약이 없다고?
그 많던 물약이 한꺼번에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무언가의 착오이리라.
“인벤토리, 경험치 물약.”
《인벤토리에 경험치 물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벤토리, 유니온의 저장된 경험치 물약.”
《인벤토리에 유니온의 저장된 경험치 물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눈을 씻고 봐도 눈앞의 결과는 요지부동이었다.
유니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
‘아아······.’
아인하사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의 앞에 마주한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도전자는 갑자기 물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직후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끝없이 쏟아지는 신성.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러한 축복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인하사르도 처음 보았기에.
수많은 신들의 축복을 직접 지켜보고 경험한 아인하사르조차도, 저만큼이나 경이로운 축복은 진정으로 처음 본 탓이다.
아니, 과연 저걸 단순히 축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뚜벅. 뚜벅.
그 상태로, 도전자가 한 발자국씩 아인하사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