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룡 아인하사르의 당황
허드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이곳은 분명히 판게니아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은 지구였다.
영국 왕실의 후계 구도에 난입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건만, 어느 순간 머리 위로 빛이 내려오는 듯하더니 란돌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신의 탑 게이트 앞으로 오라는 란돌프 님의 목소리가 들렸지.’
그리고 허드슨은 그 즉시 판게니아에 접속해, 투신의 탑으로 향한 것이다.
마치 신의 계시처럼 여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행동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허드슨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건 신언이다. 신과 직접 소통하는 교황이나 성녀에게만 허락된다는 그 신언!’
란돌프가 마침내 신격이라도 얻은 걸까.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돌이켜보면 신격을 갖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것이 신언이라면, 그 목소리를 들은 자신은 신과 가장 맞닿은 사람이라는 뜻일 터!
‘란돌프 님은 나를 강하게 신뢰하고 계신다.’
가슴이 뛴다.
스스로 최측근이라 여기곤 있었지만 본인에게 직접 확인을 받은 셈이니까.
이것이야말로 허드슨에게 있어선 최고의 은총이다.
“아아!”
허드슨은 몸을 크게 떨었다.
확증 선언과 동시에 감동이 물 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란돌프를 가장 옆에서 따른다는 자부심이 대기권을 돌파할 지경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더 열심히 힘을 키워야 해!’
허드슨은 빠르게 들뜬 가슴을 진정시켰다.
란돌프가 올라가는 것만큼 허드슨은 아직 강해지지 않았다.
란돌프의 곁에서 꾸준히 도움이 되려면 안주해선 안 된다.
세렝게티와의 결혼식이 미뤄지며 잠깐 혼란에 빠졌지만, 그러한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걸 허드슨은 깨닫고 말았다.
‘영국 왕실을 계승하고, 판게니아에서의 세력을 넓힌다.’
양쪽 세계 모두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키우리라.
그러기 위해선 1분 1초가 아쉽다.
“아우릴 님.”
“······?”
아우릴이 멍한 눈빛으로 허드슨을 바라봤다.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
하지만 아우릴은 란돌프의 최강 전력 중 하나다.
그녀가 놀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작, 발테와 함께 잠시 다녀오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내가 네 말을 왜 들어야 하지?”
그러나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아우릴이 되물었다.
그녀는 엘프고, 여전히 인간을 혐오했으므로.
허드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란돌프 님에게 도움이 될 일이니까요.”
“······.”
아우릴의 표정에 잠시 고민이 스쳤다.
그녀가 따르는 건 오직 란돌프뿐이다.
다만, 따르기만 할 뿐이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여 더 지껄여 보라는 듯 아우릴이 시선을 던졌다.
‘진짜 벌레 보는 눈빛이로군.’
허드슨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을 마치 바퀴벌레마냥 여기고 있었다.
이자벨라도 차갑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인간 취급은 해줬건만.
그런데 아우릴은 인간 취급조차 해주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허드슨이 이어서 말했다.
“유적도시 룬델라. 란돌프 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그곳을 잠시 보호해주셔야겠습니다.”
“란돌프 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예. 오주력 란돌프의 자격으로 말입니다.”
“오주력······? 뭐냐, 그건.”
아우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녀는 아직 란돌프가 ‘오주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일.
‘룬델라는 중요한 거점이다.’
마스터가 죽고 주인을 잃은 룬델라.
란돌프가 바로 향할 줄 알았지만, 그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지금은 플레이어들 모두가 침략을 막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이대로 룬델라를 가만히 놔두면 누군가가 무력으로 점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플레이어만 문제가 아니다. 왕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최근 와이저 후작에게 내려온 공문도 신경 쓰였다.
-명한다. 더 많은 병사를 징집하고 소집하라.
발란 왕국의 왕이 13개의 도시에 동시에 내린 공문.
와이저 후작은 발란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이언 왕국이 세를 넓히는 걸 신경 쓰고 있는 거겠지.’
아이언 왕국의 주인, 프리드릭 왕.
그가 최근 마구잡이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발란 왕국으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으리라.
문제는 그 사이에 유적도시 룬델라도 있다는 것이다.
‘주인 없는 도시를 굳이 점령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주인이 있는 척이라도 해야 된다.
아이언 왕국의 마수가 더 뻗기 전에 말이다.
‘프리드릭 왕. 철혈의 군주······.’
설마 그가 발란 왕국을 건들까 싶기는 하지만, 최근 돌아가는 정세가 심상치 않다.
하여, 준비를 해야만 했다.
룬델라를 안정화하고 미궁 도시를 강화시켜야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
백왕의 비호를 받는 오주력의 도시라면, 프리드릭 왕도 쉽사리 건드리진 못할 테니.
게다가 이러한 혼란은 막대한 기회를 낳는 법.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허드슨은 놓칠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은 란돌프 님을 위하여.’
허드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광룡 아인하사르.
그는 자신했다.
자신이 당한 수모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을 내려주겠노라고.
-나의 시련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모두 이겨낸다면 ‘새로운 도약’으로 향하는 길에 너는 서게 될 것이다.
새로운 도약.
자신의 시련을 이겨낸 자들은 ‘강력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여태껏 없었던 기능들이 추가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힘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자들은 극소수.
대부분이 절망하며 포기하기 마련이었다.
‘시련의 내용도, 횟수도 내가 정한다.’
어려운 만큼 시련의 보상 또한 좋아지지만, 이 묘한 놈을 확실하게 보내려면 세 번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가볍게 시작해볼까?’
바로 이전 실패했던 시련.
1성 초월자 대부분이 실패한 그것.
그 시련을 떠올리며 광룡 아인하사르가 입을 열었다.
-이 검을 백 번, 연속해서 휘둘러 보거라.
어지간히 큰 짐승만 한 검.
웬만한 거인들도 사용하기 힘들어하는 그것을 내놓았다.
100번을 그냥 휘두르는 게 아니다.
연속해서, 쉬지 않고 휘둘러야 합격이다.
“······.”
도전자는 그 검을 유심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걸 보고 겁이라도 질린 걸까?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지.
아인하사르가 비웃음을 흘렸다.
묘한 놈이다 싶었더니, 단순히 기우였을까?
하지만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천천히 검으로 다가가, 검을 들고.
“흐읍!”
거친 숨소리와 함께 검을 들어올렸다.
휘이이이익!
곧이어 검을 휘둘렀다.
‘오호라.’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이건가?
힘겨워 보이긴 하지만, 1성 초월자 이상의 수준임은 확실해 보인다.
“후욱! 후욱! 후우욱!”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전자가 검을 100번 휘둘렀다.
이걸 해낼 줄이야.
-첫 번째 시련은 통과다. 제법이군.
허나, 아직이다.
이제 고작 하나를 해결했을 뿐이다.
남은 두 개의 시련은 더욱 난이도를 올리면 될 일.
‘그럼 대충 2성 초월자 수준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을 땐 그 정도 되는 것 같다.
마냥 쉽게 해결하진 못했으니.
조금 덜 떨어진 2성 초월자 수준은 되어 보였다.
물론 이 둥지에 2성 초월자가 등장한 건 이례적이지만, 상관없었다.
‘2성 수준에 걸맞은 시련 또한 준비되어 있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것도 최고 수준의 난이도로 준비해놨다.
화르르륵!
아인하사르의 등 뒤로 떠오른 수천, 수만 개의 불꽃!
-아무런 스킬도, 장비도, 도구도 사용하지 말고 순수 능력으로 전부 피해보거라.
당연히 하나도 맞아선 안 된다.
동시에 도전자의 눈빛이 떨렸다.
가뜩이나 힘이 빠진 상태로 이걸 전부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다.’
다만,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피할 수 있을까?
아인하사르가 수많은 불꽃을 동시다발적으로 쏘아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쉬지 않고 들리는 폭발음.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한 스킬이나 도구를 사용하면 탈락이다.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불꽃들을 피해냈으나 그것도 이제 곧 힘에 겨워질 것이다.
아인하사르는 기대되는 눈빛으로 도전자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음?’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하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전부 피해내고 있다.
······ 뭐지?
검을 백 번 휘두르는 것도 힘들어하지 않았나.
2성 초월자여도 이 공격을 전부 피해내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수준으로 어렵다.
수십 번은 족히 도전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성공.
그것을, 저 처음 도전 만에 아슬아슬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단순한 2성 초월자조차 아니었단 말인가?
-흐음. 실력을 조금 숨기고 있었나 보군.
이것 봐라.
이 녀석.
아주 음흉한 놈이었다.
힘든 척, 어려운 척, 두 개의 시련을 날로 먹었다.
만약 첫 시련에서 쉽게 해냈다면, 그 즉시 가장 어려운 시련을 내렸을 터인데.
자신이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연기를 한 게 분명하다.
착실하게 단계를 올리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다.
‘오냐, 네놈의 연기에 속았음을 인정하마.’
아인하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쉽게 간파했겠으나 놈은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관찰’이 불가하다는 걸 알고선 역으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신선한 놈이로군.’
마치 자신이 도전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봤자 여기까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시련만큼은 어찌할 수 없으리라.
마지막 세 번째 시련.
몇 번 한 적 없고, 그마저도 여태껏 단 한 명밖에 통과하지 못했던 이 시련이라면, 확실하게 이 묘한 놈도 보낼 수 있을 것이기에.
-마지막 시련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내게 상처를 내면, 통과다.
친히 공격을 받아주겠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3성 이상의 초월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광룡 아인하사르는 모든 공격에 절대적인 면역을 갖고 있었다.
그 ‘멸망’조차도 자신을 죽이지 못했을 정도의 면역을 말이다.
‘내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격은 단 한 가지.’
그 어떤 속성도 아니다.
물리적인 것도, 영적이나 초월적인 무언가로도 자신을 타격할 수 없다.
그것이 그가 지닌 수호자의 힘.
모든 수호자가 그러하듯. 아니, 그중에서도 아인하사르는 특출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조건은 단 한 가지.
‘수많은 위대한 위업을 달성한 자만이 내게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위대한 자.
신화적인 업적을 두루 달성한 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공격해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하여 멸망조차 자신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멸망은 자신을 죽일 정도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자. 어디 한 번 공격해보거라.’
광룡 아인하사르는 자신하며 몸을 내주었다.
그러자 도전자는 거대한 검을 들었고.
푸아아악!
“음······?!”
아인하사르가 당황한 채 격통의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촤아아아악!
······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내장이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아인하사르가 핼쑥해진 얼굴로 도전자를 바라보았다.
‘······ 죽을 뻔했다.’
급히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으면 진짜 죽었을 것이다.
상처를 입은 적은 있지만, 이 정도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인하사르가 당황하며 도전자를 바라보았다.
비웃듯 자신에게 미소를 던지는 인간을.
‘대체 뭐란 말이냐, 이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