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정산
모두가 생각했다.
란돌프. 팬텀은 분명히 연합군 내에 정체를 감춘 채 숨어있을 거라고.
극단적인 신비주의자가 바로 팬텀이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연합군에 합류한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럴진대.
“메인퀘스트 9가 뭐였지?”
“멍청아. 투신의 탑 등반하기잖아!”
“그럼 란돌프······ 팬텀이 여기가 아니라 판게니아에 있었다는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메인퀘스트 9가 ‘투신의 탑 등반하기’라는 사실은 웬만한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
그리고 란돌프가 현재 메인퀘스트 8까지 밀어놓았다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침략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 란돌프가 투신의 탑을 오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연합군 어딘가에 있으리라 여겼건만.
“··· 외통수네.”
“그런데 정말 투신의 탑을 오른 게 맞아? 점수가 너무 말이 안 되는데?”
“20층에서 챔피언을 꺾은 건가?”
“1년 동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한 챔피언을?”
“란돌프잖아.”
“아니, 만에 하나 챔피언을 꺾었다고 해도 이 점수는······.”
투신의 탑에서 5년간 챔피언이 변한 적은 없다.
심지어 최근 1년간 챔피언은 아무런 도전도 받아주지 않았다.
올라봤자 최대 19층.
그리고 19층까지 올랐던 플레이어의 점수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챔피언을 꺾었다고 해도, 지금 그들이 눈앞에 보이는 점수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다크스타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구겼다.
심기가 너무나도 불편했으니까.
마스터가 죽고, 그라시아마저 몰아내며, 드디어 자신이 주인공의 자리에 섰다.
이제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팬텀?
어차피 놈은 자신을 드러내어 영웅이,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고작해야 몰래 숨어서 자신의 뒤꽁무니나 따르게 되리라 여겼다.
민트초코맛있어요처럼.
그런데······.
‘아예 참가를 안 했다고?’
연합에 아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
모두가 지구의 일로 매우 급할 때 혼자 판게니아에서 투신의 탑을 오르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이게 말이 되나?
아니면, 놈은 지구인이 아닌 건가?
어떻게 2차 침략이 시작됐는데 태연하게 탑에 오를 생각을 하지?
자칫 잘못했다간 지구의 육체가 죽어 진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니다.
미친놈이 분명하다.
모두가 판게니아에 로그인할 생각조차 쉬이 못 하는 상황이거늘.
투신의 탑을 올랐다면, 최소 침략 전후로 쉬지 않고 등반했다는 뜻이다.
단순히 ‘간이 크다’할 수준을 진즉 넘어섰다.
‘확실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다.’
······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마스터를 죽인 게 란돌프라면, 마스터의 실력도 넘어섰다는 이야기.
탑을 등반해 챔피언의 자리를 거머쥐는 게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다만.
‘··· 그런데도 이해하기 힘든 점수야.’
아니, 이해하기 힘든 수준마저 넘어섰다.
저건 불가능하다.
명예의 전당.
그곳에 오른 자들의 점수는 어느 정도 한계치가 있다.
특히 몇몇 메인퀘스트의 한계는 더 명확했다.
투신의 탑이 대표적이다.
층수가 정해져 있고, 기껏해야 챔피언을 이기느냐 마느냐의 기로.
아무리 높아도 500점 안팎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저건······.
‘버그. 오류. 뭐가 됐든, 말이 안 돼.’
다크스타는 애써 부정했다.
란돌프가 여태껏 몇 번이나 한계를 돌파하는 점수를 냈다고 한들, 투신의 탑만큼이나 한계가 명확한 곳은 없었으니까.
무언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계속 눈앞에서 점수가 아른거리는 건지.
빠드득!
다크스타가 작게 이를 갈았다.
주인공의 자리를, 모두의 시선을 빼앗겨버린 것만 같아서.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말이다.
*
모든 악마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옛적, 그들에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허락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아니었기에.
“투신 카라스. 놈이 신격을 되찾았나.”
그중 한 명.
‘교만’이 전장의 한복판에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시체의 산 위에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내게 경고를 보내는 거냐? 더 설치지 말라고?”
탑의 신적인 존재들.
신격들은 악마들의 상극이다.
그들은 악마와 마족을 견제하고 경계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하지만 ‘멸망’에 의해 대부분의 신격이 사라진 지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 대륙에 더 없었다.
마계가 타 차원을 침략하는 것도, 악마들이 장난을 치는 것도 모두 그래서 가능한 것.
그러한데.
“어찌 부활했을까?”
교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투신 카라스가 온전하게 부활했다.
부활한 즉시, 하늘을 울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이 돌아왔노라고.
악한 것들이여, 긴장하라고 말이다.
게다가······.
‘질투가 죽었다.’
칠죄종의 한 축인 악마, 질투가 죽었다.
카라스에게 당한 건가?
칠죄종의 악마를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신격뿐이다.
반신격 정도로는 악마를 죽이지 못한다.
시기상 신격을 부활시킨 카라스가 질투를 죽였다고 보면 될는지.
‘투신 카라스. 확실히 놈이라면, 질투를 죽일 만하지.’
질투는 원체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놈이니 죽을 만하다.
무엇보다 신격 중에서도 투신 카라스는 상당히 난 놈이었다.
여태껏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대부분의 신격은 존재를 잃고, 탑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악마, 교만은 턱을 쓸었다.
“흉의 일족이 전멸한 게 아니었나 보군.”
멸망이 그 일족을 전부 멸망시킨 건 아닌가 보다.
혈족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카라스의 탑을 부활시켰다.
묘한 일이었다.
“드루이드도 다시 나타난 듯한데.”
엘프가 움직이고 있다.
모든 숲과 신록의 연결이 심상치 않다.
교만은 확신했다.
대자연을 다루는 드루이드가 세상 어딘가에 출현한 것이다.
‘멸망한 종족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건가?’
흠.
다만, 의아한 건 멸망한 종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모두 ‘멸망’이 가장 우선시하여 멸족시킨 것들이다.
흉의 일족, 드루이드······ 그리고.
‘모든 규율을 무시하는 그놈들. 그놈들은 확실하게 지웠을 터.’
어떤 의미에선 위의 두 종족보다 까다로운 ‘그놈들’이 나타난 듯싶었다.
몇몇 던전과 탑에서 규율이 무시된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다.
신격이 회복되고, 사라진 것들이 하나, 둘 다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투신 카라스 하나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지 못한다.
교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군. 카라스도 별로 만들어주려 했거늘.’
별로 만들어 인간들에게 뿌려주려 하였거늘.
그래도 뭐, 나쁘지 않다. 너무 쉬워도 재미가 없으니까.
신들이 자리를 비운 황혼의 시기, 악마들은 이미 힘을 키울 만큼 키운 상태.
예전보다도 더 강해진 악마들이 수두룩하다.
당연히 카라스 혼자로는 자신을 막지 못한다.
척! 척! 척!
곧이어 시체의 산 주변으로 수만 명의 병사와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프리드릭 왕이시여!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야만인들을 모조리 몰살시켰습니다!”
“프리드릭 왕 만세!”
“만세!!!!!”
*
나는 천천히 투신의 탑을 내려왔다.
‘역시 아직은 안 닿는군.’
투신 카라스.
온전한 신격을 되찾은 그는, 정말 신과 같은 무위를 선보였다.
한창 성장 중인 지금 상태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더 완성된 뒤라면 모를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걸 쏟아부어 후회 없이 싸웠으니까.
이런 경험이 앞으로 몇 번이나 되겠는가.
빌헬름으로 도전했어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까악!
옆을 졸졸 따라오는 까마귀.
흉의 일족은 단번에 탑을 복구시켰다.
게다가 그러한 능력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흉의 일족 4마리가 모이면 검은 태양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끔찍한 흉조가 되어 사용했던 ‘절대적인 죽음’을 가져다주는 권능.
바알마저도 ‘멸망의 조각’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검은 태양에 죽었을 것이다.
다수의 도사까마귀가 필요했던 일도 흉의 일족은 4마리만 있으면 된다.
뿐만 아니라.
《흉의 일족이 ‘투신의 탑’의 관리자로 지정되었습니다.》
《흉의 일족이 탑과 ‘투신 카라스’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20으로 고정됩니다.》
《흉의 일족이 ‘투신 카라스’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습니다.》
······ 탑을 관리하는 흉의 일족에겐 이러한 기능도 있는 모양이었다.
강력한 탑의 관리자 일족은 더욱 강한 힘을 이어받는 시스템.
아주 바람직하다.
‘이제 남은 건 메인퀘스트 10. 용신을 만나러 갈 때가 됐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끝났고, 이제 가장 중요한 용건을 볼 차례였다.
‘그 전에.’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일.
바로.
‘정산.’
탑을 나선 순간 끊임없이 떠오른 글귀들.
나는 재차 그것들을 눈앞으로 끌어왔다.
《메인 퀘스트 9 ‘투신의 탑 등반하기’를 완료했습니다!》
《신화를 창조하는 자여!》
《모든 신화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의 신화성은 전 대륙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총점 1,990점!》
《‘온전한 황금률’ 한 개와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1,990h)’을 획득합니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보상의 등급을 올리는 데 찬성했습니다.》
《행운주사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도합 101단계 위의 보상 목록이 등장합니다.》
《해당 퀘스트의 보상 등급을 한참 초과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상으로 등장한 신화 등급의 아이템 세 개를 합쳐,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목록 중 세 개를 선택하십시오.》
《대참격》, 《용살검》, 《루-》, 《초월지검》, 《극진멸참의 화신도》, 《순혈자 도안》, 《화신 지그렛의 갑옷》, 《도리안의 위상》, 《용암거인의 혼》, 《람의 눈》, 《극진(極眞) 세이버》, 《찬란한 명예의 로브》, 《절대적인 허무》, 《오염된 왕의 갑옷》, 《오염된 왕의 왕관》, 《오염된 기사단의 원탁》, 《별걸음쟁이》, 《원죄의 지팡이》, 《불결함의 마창》, 《미궁의 끝자락》······.
*
카라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온전한 신격을 되찾은 지금, 란돌프의 수준은 가볍게 이길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실제로 승리하지 않았던가.
한데.
“··· 손이 떨린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순수 무력의 대결.
란돌프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스치지도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러한 정상을, 편견을 란돌프는 깨버렸다.
빌헬름을 상대할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빌헬름은 완성되어 있었으나, 란돌프는 아직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손이 떨린다.
왜?
두려워서?
허나, 란돌프는 자신을 두렵게 할 정도의 힘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손이 떨리고 있는 걸까.
카라스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카라스가 가슴팍을 쓸었다.
가슴에 새겨진 기다란 검상.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신격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것도 이 탑 안에서 말이다.
투신의 탑 안에서 신격을 되찾은 투신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이라.
아무리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하나, 탑의 주인이 되고 나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가공할 가능성과 성장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으니.
싸우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날카로워져만 간다.
그야말로 성장의 괴물. 아니, 신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하여, 카라스는 작게 웃고 말았다.
‘정말··· 어이가 없는 놈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