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신격
비석에 새겨진 흉왕의 의지.
그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대해(大海)와도 같았다.
의지를 흡수하고, 의지가 몸을 적시자, 곧이어 공간이 전환하며.
-오오, 나의 적통이여! 진정한 흉의 의지를 잇는 자여!
······ 흉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덧 내 몸은 ‘끔찍한 흉조’로 변해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비석에 남겨진 흉왕의 의지는 바닥을 차고 기꺼워하였다.
단순한 의지임에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강렬한 자의식.
이는 흉왕이 살아생전 얼마나 격이 드높았던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늘 끝까지 닿은 불길한 검은색 불꽃.
끔찍한 흉조와 닮았으나 훨씬 거대한 자.
-탑은 신이다. 탑은 모든 것이다. 그리고 탑은 하나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흉왕이 내뱉는 저 말이야말로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 중 하나일 터.
나는 끊임없이 탑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 되새겼다.
-우리는 그러한 탑들을 관리했던 위대한 종족이니라. 비록 멸망에 의해 탑이 쪼개지고 흉의 일족도 스러졌으나 내 의지를 잇는 자가 드디어 나타났으니!
아아.
흉왕은 전율했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
그 기다림 끝에 나를 만나게 되어서.
나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비석을 모아라. 일족을 재건해라. 탑을 관리하고 신격을 되살려 우리 일족이 건재함을 온 세상에 보여라. 진정한 흉왕이 되는 것이다.
탑을 관리한다는 것.
이는 곧 탑의 주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전문적인 관리자가 없는 탑은 결국 스러지게 되어 있었으므로.
산샤가 관리자로 있던 5년간, 카라스가 한없이 약화하여 간 것처럼 말이다.
-오직 너만이, 일족을 재건할 수 있노라.
흉왕이 손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올렸다.
직후 세상이 틀어지며 흉왕의 의지는 소멸했다.
내게 일족의 운명을 맡기고서.
*
“······.”
카라스는 떨리는 눈빛으로 까마귀를, 흉의 일족을 바라보았다.
-까악!
1m 수준에 이르는 크기의 거대한 까마귀.
두 발로 선 채 뒤뚱대며 까악대고 있는 저 까마귀는 분명히 흉의 일족이 맞았다.
‘붉은 꼬리와 다수의 눈동자.’
흉의 일족을 상징하는 붉은 꼬리.
더불어 한 개의 눈에 눈동자가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럴 리가······.”
카라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까마귀 종류의 마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저 까마귀는 흉의 일족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탑의 관리를 도맡았던 흉의 일족은 멸망의 출현과 함께 멸종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일족이 어찌하여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저 남자가 ‘끔찍한 흉조’라서 가능한 것은 아닐 터였다.
-까악?
곧이어 흉의 일족은 고개를 갸웃하곤 탑을 살피기 시작했다.
스륵.
스아아악!
손을 뻗자 부서지고 부식된 탑이, 거짓말처럼 복원되어간다.
“탑의 ‘관리자 권한’을 벌써······!”
비석에서 나타난 흉의 일족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곤 탑을 재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카라스의 날개에 생기가 돋으며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궈, 권능이······.’
카라스의 두 눈이 짙게 떨렸다.
힘이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오래전 잃어버린 권능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자신의 근원이.
지금, 저 흉의 일족으로 말미암아 가파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썩고 문드러진 탑의 외관이 새것처럼 바뀐다.
“아.”
촤악!
카라스가 날개를 펼쳤다.
더욱 비대해진 날개와 윤기는 그의 강함을 상징하는 것.
반신격이 아닌, 드디어 온전한 신격의 위치를 되찾은 것이다.
진짜 ‘투신’ 말이다.
우우우우우웅!
이에 동조하듯 탑조차도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20층이 끝이었던 탑은 30층까지 증식하듯 늘어났으며, 카라스의 눈은 더욱 깊어지고 어질어졌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성(神聖)을 보이며,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거룩한 위치에 다시금 오르게 된 것이다.
먼 옛날, 감히 대적할 자 없던 그 지고한 권좌에.
땅을 울리고 하늘을 떨게 했던 절대자, 투신 카라스.
그 본연의 이름을 마침내 되찾은 게다.
“······ 진정, 흉의 일족이로구나.”
카라스가 미소를 지었다.
어찌하여 의심했던가.
보고도 믿지 못한 자신의 눈을 실로 멍청하다 여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증명해 보였고, 이제는 카라스의 차례였다.
“더 올라오거라. 나의 탑, 그 끝의 자리까지. 그대에겐 그러할 자격이 있다.”
20층이 아니다.
원본의 탑은 고작 20층에서 끝나지 않는다.
30층까지, 올라오라는 뜻이다.
더 높은 곳, 누구도 닿지 못했던 장소까지.
탑이 온전했을 시절 30층에 올라 자신에게 도전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허나 저 남자는 그러할 자격이 있다.
끝에 올라 신격의 자신과 마주할 자격이.
“기다리고 있으마.”
카라스가 탑의 정상을 향해 날아갔다.
*
백성전.
수많은 성좌들이, 동시에 느꼈다.
“신격이······.”
“··· 투신 카라스가 부활했다.”
세계 전역에 떨쳐진 신격의 울림.
마치 자신의 부활을 알리듯 모두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왔노라고.
전율하며 긴장하라고.
이는 분명 투신 카라스의 것.
“대체 누가?”
하지만 너무나도 느닷없었다.
존재를 잃어가는 신격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이 가장 먼저 한 게 탑의 관리자 종족인 ‘흉의 일족’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흉의 일족이 전멸하면 탑은 제기능을 잃게되고, 탑이 스러지면 그곳의 주인들 역시 점차 약화되는 탓이다.
“역시 훌륭하군.”
그때, 한 성좌가 입을 열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한순간 빛을 잃었던 그가, 더욱 큰 광명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가 미소 짓는다면 단 한 명밖에 없다.
오직 그만이 지켜보고 있는 존재.
“설마······ 란돌프?”
“또 란돌프라고?”
“란돌프가 어떻게 신격을 부활시켰다는 거지?”
란돌프라니!
세계의 굵직한 일들을 저 혼자 독차지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신격마저 부활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말이 안 되지만······ 궁금하다.
궁금해 미쳐버리겠다.
하지만 문제는 란돌프의 이야기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격의 부활이라면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터.
성좌의 존재 가치를 걸고서 볼 만한 이야기인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일.
‘보고 싶다! 알고 싶다!’
그러나 성좌들의 눈에 욕망이 넘쳐흘렀다.
이 이야기야말로 오랜 시간 풀리지 않은 비밀과도 같은 것일 게 분명했으므로.
비밀의 과실을 오직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만이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아!’
성좌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크게 감탄합니다.》
《탑의 재건과 신격의 부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탑의 가장 높은 곳, ‘영원의 장’에서 ‘투신 카라스’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 웬일이지?
흉의 일족이 부활한 게 그토록 그들의 궁금증을 키운 것인지.
‘층수가 늘어났군.’
흉왕의 의지를 읽고 돌아왔을 때, 이미 내 눈앞에 카라스는 없었다.
하지만 카라스가 남긴 전언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탑의 꼭대기, 30층까지 넘어오라는 말.
‘본래 탑은 30층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카라스가 약화되며 층수도 낮아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흉의 일족과 함께 나는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겠지.’
21층.
아무도 없다.
싸워야할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 이제 막 늘어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22층도, 23층도, 그저 나는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최초 업적! ‘투신의 탑 21층에 도달한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300 상승합니다.》
《최초 업적! ‘투신의 탑 22층에 도달한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350 상승합니다.》
《최초 업적! ‘투신의 탑 23층에 도달한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400 상승합니다.》
······.
《최초 업적! ‘투신의 탑 30층에 도달한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900 상승합니다.》
명예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명예작을 해도 올리기 힘든 수준의 점수를 마구잡이로 획득하고 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층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명예를 획득하는 중이었다.
‘최초 업적. 플레이어 중 단 한 명도 도달하지 못한 장소.’
모두가 20층이 끝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게 반쪽임을 알았을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필요가 없었다.
나를 막아서는 것도, 멈춰야할 이유도, 무엇하나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마지막 30층까지 도달했을 때.
“탑의 끝에 오른 도전자여, 투신 카라스에게 도전하겠느냐?”
투신 카라스.
반신 격일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
찬란한 신성을 머금고 그가 권좌에 앉은 채로, 나를 맞이했다.
산샤에게 조종당하던 그때의 반쪽짜리 카라스가 아닌, 세상을 오시하는 진짜 투신 카라스가 말이다.
*
2차 침략이 시작되고 10일 후.
세계 곳곳에서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영웅회의 연합군으로 말이다.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한 자리에 모인 건 전례가 없던 일.
“······ 오만명은 족히 넘을 것 같군.”
“플레이어가 이렇게 많았었나?”
한 자리에 모인 그들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아마도 은둔자들까지 대량으로 자리한 것이리라.
아니라면 이만한 숫자가 모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감사한다. 그대들의 힘든 결정에. 나 다크스타는 열렬한 환호를 담아 고개 숙이마.”
다크스타.
그가 연합군의 앞에 섰다.
일전 sns에서 그라시아와 맞수를 이루며 일약 스타가 된 강자.
초월하여 최소 3성 이상의 무력을 갖게 된 그라면 연합군을 이끌 자격이 충분했다.
또한, 그의 옆에는 다른 영웅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라시아는 어디 갔지?”
“그라시아도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한 명.
그라시아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에 모두가 웅성대자, 다크스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라시아는 영웅회를 탈퇴했다. 그는 더 이상 영웅회에 존속된 영웅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함께 싸우는 거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의 물음은 타당하다.
어찌 됐든 그라시아는 영웅회를 대표하던 영웅이었다.
연합군과 함께 2차 침략을 대비해야 정상 아닌가?
“그는 더 이상 최고의 영웅이 아니다. 힘을 잃고, 영광조차 잃어버렸다.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이끌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허나 다크스타는 냉정했다.
힘과 명예를 잃은 그라시아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선을 그어버렸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더 큰 힘을 손에 넣었으니! 저 간악한 마족의 무리들은 결코 이 지구를 파손할 수 없다! 나를 믿어라! 우리 영웅회를 믿어라! 함께 싸우자!”
다크스타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내심 미소를 지으면서.
그라시아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되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듣고 있느냐, 팬텀?’
무엇보다 연합군의 어딘가에 팬텀이 숨어 있을 터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자.
이제 열렬한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져야 할 때.
“어어?”
“······ 뭐, 뭐야?”
“오류인가?”
하지만, 전혀 다른 반응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심지어 뒤에 선 영웅들마저도 채 반응하지 못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닌 이유는 간단했다.
더욱 큰 이유가 그들의 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여있던 모든 플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경악하며 두 눈을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란돌프가······ 메인 퀘스트 중이었다고?”
“뭐야 저건?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저, 점수가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