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왕이 남기고 간 것
끊임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창.
단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읽으면서도 내심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타난 저 문장들 전부가 상식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별은 소유자가 죽으면 흩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태양의 별은 바로 회수했다. ······ 네임드 별이라서? 그것도 아니면 빌헬름의 별이라서?’
첫 번째 문장부터 그랬다.
태양의 별을 회수했다는 말.
다시 가져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빌헬름의 별을 소유한 자를 죽이면 그 즉시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 아니, 어쩌면 빌헬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플레이하며 초월시켰던 캐릭터들. 그 캐릭터들의 별은 모두 회수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턱을 쓸며 직접 초월시킨 캐릭터들을 떠올려본다.
‘명란젓코난, 사람낚는어부, 뇌신강림······.’
그러나 ‘명란젓코난’은 죽었고, ‘사람낚는어부’는 행방이 묘연하다.
그리고 ‘뇌신강림’은 현재 사신교에 있었다.
만약 이 캐릭터들의 별을 전부 회수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빌헬름의 기억. 천지개벽의 검술이 더 강화됐다.’
또한 빌헬름의 기억이 보강되자 검술에도 영향이 갔다.
의식을 읽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진 느낌.
당장 옆에 있는 아우릴과 카라스의 의식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검술을 펼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특히 반신격인 카라스의 의식은 읽기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벽’의 실마리가 조금 잡히는 듯했다.
‘······ 과거의 잔영이라.’
과거의 잔영은 네임드 ‘태양의 별’이 가져다준 추가 효과였다.
덕분에 천룡전설의 천룡각, 명란젓코난의 신검합일, 두 고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마찬가지로 내가 키웠던 캐릭터의 시체를 찾거나, 캐릭터를 시체로 만들게 되면 그들의 고유스킬을 빼앗아올 수 있다는 건데.
‘끔찍한 능력이군.’
키운 캐릭터만 수백 개다.
그 캐릭터를 전부 사냥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나를 적대하는 캐릭터들을 상대로는 아주 유용한 기능이었다.
이자벨라나 아이작처럼 초월하여 기억을 되찾은 경우.
분명히 언젠가는 내 정체를 알아내어 공격해오는 캐릭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시체를 찾아도 ‘과거의 잔영’이 발동된다면······.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당장 생각나는 장소도 몇 곳 있었다.
쓸만한 고유 스킬을 지녔으나, 운 나쁘게 사망한 캐릭터들.
그 캐릭터들의 시체를 찾아다니며 고유 스킬을 수집하고 조합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 그런데 왜 폭식이 아니라 탐욕이지?’
마지막.
가장 중요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히든 특성의 진화.
대식가가 진화하며 탐욕이 됐다.
허나, 먹어치우는 히든 특성이 진화한다면 당연히 폭식이 되어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진화하며 바뀐 건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어둠을 피우는 자’가 탐욕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탐욕의 특성을 지니게 됐다는 말.
그 외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직접 부딪히고 겪으며 알아보라는 것이다.
하기야, 판게니아에서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 흉의 일족이며, 빌헬름이며, 질투를 먹어치운 탐욕의 악마. 또 뭐가 있는 거지?”
그때 옆에서 카라스가 물었다.
날개를 되찾은 카라스는 온전한 반신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반신격을 되찾은 카라스도 내 정체를 반신반의해 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질투의 악마를 대식가가 먹어치운 건 맞지만.
“탐욕의 악마라니?”
“시치미 떼지 마라. 너의 안에 잠들어있는 건 분명히 탐욕의 악마이니.”
히든 특성 탐욕.
그것을 카라스는 ‘탐욕의 악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꽤 적대적인 기세를 풍기면서.
여태까진 흉의 일족이라 감싸주었지만, 내가 ‘탐욕의 악마’라면 이야기가 다른 모양이었다.
‘히든 특성 중 몇개는 종족 특성이기도 했지.’
아예 종족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탐욕의 악마’처럼 단일 개체로 확정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영원의 란돌프’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의 히든 특성이니 예외로 친다고 해도, 칠죄종 중 하나인 탐욕의 악마라.
‘히든 특성은 진화하면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예컨대 영원군주의 심장,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 그리고 이번에 진화한 탐욕까지.
대자연을 지배하는 하이 드루이드의 자격과 탐욕의 악마가 본래 히든 특성이 지닌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영원군주는 그럼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혹시, 히든 특성의 진짜 정체는 ‘위대한 격’의 조각 같은 건지.
아직 진화하지 않은 히든 특성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너는··· 무엇이냐?”
카라스가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신중하게 답해야한다.
자칫 여기서 카라스를 적으로 돌린다면, 이 탑을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을 테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현재의 나는 란돌프요. 동시에 빌헬름이며, 흉의 일족이고, 탐욕의 악마이기도 하지.”
있는 그대로.
어차피 카라스 앞에선 거짓말도 안 통할 것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낫다.
물론, 바알을 먹었다거나 다른 히든 특성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자 카라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 부정은 하지 않는군.”
“부정해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까.”
“무엇을 하려는 거지?”
“완수하지 못한 일을 완수할 생각이오.”
“대원정 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이루어내지 못한 일.
판게니아에서 내 유일한 미련이라면 당연히 대원정밖에 없다.
“··· 그 말, 믿어보마.”
이윽고 카라스가 등을 돌리며 이어서 말했다.
“따라오거라. 보여줄 게 있으니.”
*
아우릴은 일련의 사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단번에 악마를 격멸한 검.
그리고 이어진 ‘탐욕의 악마’에 대한 언급.
‘란돌프님이 탐욕의 악마라고?’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건 대사건이다.
일곱 악마는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숨어있었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수많은 신들이 소멸하거나 겨우 존재만을 유지하는 상황이 도래하자 날뛰기 시작했다.
특히 두 여신이 죽고 난 다음 훨씬 심해졌다.
인간을 유혹해 데몬하트를 심거나, 역병을 일으키거나, 전쟁을 벌이는 등 그들의 악질적인 행위는 도를 넘은 지 오래.
‘탐욕의 악마라니······!’
한데, 란돌프마저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탐욕의 악마임을.
탐욕. 먼 고대에 사라졌으나 칠죄종 중에서도 가장 두렵다 전해지는 자가 아니던가!
‘란돌프님은 하이 드루이드의 격을 지니신 분. 어떻게 하이 드루이드의 격과 탐욕의 악마가 공존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라스는 모르는 듯했지만, 란돌프는 동시에 하이 드루이드였다.
대자연을 보살피는 하이 드루이드가 어찌하여 탐욕일 수 있겠나.
서로 극상성인 두 존재가 한 몸에 공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빌헬름이라니.’
뿐만이 아니다.
빌헬름이라니!
대원정의 주인공이자 기사왕인 그의 이름은 엘프인 아우릴도 익히 알고 있다.
태초의 숲에 사는 대부분의 엘프들도 아는 이름이다.
여태껏 아우릴은 란돌프를 ‘빌헬름의 후계자’ 정도로 알았다.
와이저 후작가의 사람들 모두가 그를 그렇게 칭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본인이라고?
-빌헬름이라는 인간이 마계 정벌에 나선다는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보나마나 실패할 거다.
처음, 소문을 접한 엘프들은 빌헬름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빌헬름이라는 자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
그 소란을 진압한 건 여왕의 한 마디였다.
-빌헬름은 세계수가 관심을 둔 자입니다.
세계수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자.
이는 곧 여왕 또한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세계수와 여왕이 유심히 지켜보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으나, 여왕은 그것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했다.
‘내가 들은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란돌프는 빌헬름이고, 하이 드루이드이며, 흉의 일족이자 탐욕의 악마라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건가?
정말 신이라도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정체들이다.
‘그럼 란돌프 님은 신인 건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어 현기증이 나려는 찰나.
“이걸 읽을 수 있겠느냐?”
카라스가 거대한 비석의 앞으로 둘을 데려갔다.
하지만 비석에 적혀있는 글은 아우릴도 처음 보는 것.
란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읽을 수 없군.”
“······ 비석에 적힌 글은 흉의 일족만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카라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버렸다.
흉의 일족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건만.
정작 흉의 일족은 모두 읽을 수 있는 글을 읽지 못한다?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읽어야 정상이다.
읽지 못한다는 건, 란돌프가 흉의 일족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런가?”
그러나 란돌프는 어깨만 으쓱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그럼, 다시 읽어보지.”
스으으으윽.
란돌프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그림자와 같은 형태로.
그것을 본 아우릴과 카라스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
아우릴은 기겁하며 경직되어버렸다.
카라스도 못볼 것을 본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끔찍한 형상. 자신이 가장 끔찍하다 생각하는 형태로 투영되어 보인 탓에.
그러거나 말거나, 란돌프는 비석을 재차 읽어나갔다.
“······ 흉왕이 남긴 비석 중 하나인가 보군.”
“······!!”
카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비석은 흉왕이 남겨놓은 의지와도 같은 것.
설마 저 끔찍한 형태가 흉의 일족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저건 평범한 흉의 일족이 아니다.
흉의 일족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다 여겨지던.
흉왕의 적통이며, 실질적으로 흉의 일족을 다스렸던 존재.
검은태양을 다루는 죽음 그 자체인 자!
너무나도 끔찍했던 탓에, 신격들도 피했다고 전해지는.
‘설마 끔찍한 흉조······?’
허.
탐욕의 악마에 이어 이제는 하다하다 끔찍한 흉조라고?
어이가 없어서 카라스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
신기한 일이었다.
어둠을 피우는 자로 변하자 비석의 글자가 읽혔다.
특정 종족만 읽을 수 있는 글자 같은 건지.
‘흉왕의 일기 같은 건가?’
내용은 별게 없었다.
흉왕이 자신을 찬양하려고 남겨둔 일기 같은 형식의 글귀들.
‘자의식이 엄청난 놈이로군.’
나는 최고다. 이 다섯 글자를 500글자로 늘여서 적어놨다.
읽는 게 고역일 정도로 대단한 자기애다.
이윽고 500자의 비석을 전부 읽어내려가자.
화아아악!
비석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흉왕의 비석’에 남겨진 ‘흉왕의 의지’를 읽었습니다.》
《‘어둠을 피우는 자(탐욕)’가 ‘흉왕의 의지’를 흡수합니다.》
퍼어엉!
비석이 터져나가며, 검은 연기가 모조리 내게로 흡수되었다.
그 순간.
뽀글. 뽀글. 뽀글.
흡수된 연기가 내 밑에서 뽀글대며 기포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기포가 솟아오르며 특정한 형상이 되었다.
바로 검은 몸과 날개, 부리를 지닌.
-까악! 까아악!
《‘흉의 일족’이 부활했습니다!》
······ ‘어둠을 피우는 자’가 되며 집을 나갔던 까마귀가, 마침내 집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