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죄종
내심 환호를 내질렀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황제펭귄이 빌헬름이라면 지금의 모든 상황이 말이 된다.
오직 그만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죽었던 그가 어떻게 살아난 걸까?
게다가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죄인. 플레이어.’
그나마의 가능성이라면, 그뿐이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관련된 게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
고개를 저었다.
맞다. 상관이 없다.
상대가 빌헬름이라는 사실.
그 하나면 족했으니.
‘··· 모든 걸 보여주마.’
아직 자신에겐 최후의 비기들이 남아있었다.
다시 만나서 너무나도 행복하다.
드디어 모든걸 보여줄 수 있음에, 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1년 만의 해후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지 않나!’
전부를 부딪힌다.
부딪힌 후에 죽는다면, 그리하여도 좋다.
자. 시작하자.
이제부터가 ‘진짜’였으니까.
*
빌헬름의 이름을 울부짖은 이후.
기세가 바뀌었다.
‘의념을 읽기 힘들어졌다.’
확실히 챔피언은 강했다.
그러나 그의 의념은, 움직임은 간파하기가 쉬웠다.
의식 자체가 너무나도 크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라면 앞에서 주눅들며 꼼짝도 못했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점이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부분으로 다가왔다.
천지개벽의 천과 지만으로도 백 개의 고유스킬을 해체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런 이유다.
그럴진대.
‘퍼져있던 의념이 하나로 뭉치고 있다. 빌헬름이라는 이름 아래로.’
확고한 한 가지 생각.
그것은 오로지 끝을 보겠다는 욕망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이 미칠 듯이 섞여 거대한 하나의 목적이 되었을 때, 도리어 상대를 읽기 어려워진다.
‘······ 내가 빌헬름인 걸 확신하고 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지?
천지개벽의 천과 지는 원리일 뿐이다.
정해진 검로 따위가 없는 검술이었다.
하여, 검을 휘두르는 것만 보고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탈을 쓰고, 자세와 움직임 따위도 미묘하게 신경 썼거늘.
절대로 걸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빌헬름인 걸 어떻게 알아본 걸까.
‘근데 원래 저런 놈이었나?’
놈은 흥분하고 있었다.
의식이 날아갈 만큼 강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내가 빌헬름임을 알고 난 뒤부터.
전신에서 닭살이 돋았다.
검을 맞대며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빌헬름을 향해 저만한 욕망을 보이는 자를, 처음 본 것이다.
‘······ 끝내야겠군.’
점점 더 꺼림칙해진다.
아무래도, 놈과 끝을 보겠다는 생각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았다.
*
‘아아!’
황홀하다.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기쁨이 차오른다.
동시에, 눈을 파버리고 싶었다.
보고도 알지 못하는 이 두 옹이눈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우매함에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아. 빌헬름.
기사왕 빌헬름이여!
지난 1년간 나는 그대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단 1초라도 그대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꿈속에서조차 그대의 검술을, 움직임을,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그대와 대결하지 못한 미련에 잠 못 이룬 나날들.
그대만이 나의 이 끝없는 갈증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건만.
‘내 전부를 받아다오!’
모든 걸 쏟아냈다.
그럼에도 빌헬름에게는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먹어라! 먹어치워라!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챔피언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큭······!”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
-저자의 전신!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도다! 빌헬름의 몸으로 드디어 완성되는 거다, 나의 친구여!
뭐라는 거냐, 이놈은.
나는 그저 반가웠던 거다.
드디어 나의 끝을 보게 해줄 강자를 만나서.
저 명예로운 기사를 마침내 만나게 되어서!
마냥 기뻤던 것이다.
그러니 내 순수한 기쁨을 망치지 마라, 악마야.
-정말 그뿐이냐? 대결을 위해서 기다렸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도 사실은 탐이 난 것 아니더냐? 더욱 강한 육체를 원하고 있었지 않나!
두통은 더욱 거세졌다.
악마의 목소리 역시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왜, 왜저래?”
“가, 갑자기 주저 앉았어?”
“챔피언도 이제 슬슬 한계인 건가?”
“미친. 황제펭귄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고?”
관람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한창 대결하던 도중 챔피언이 느닷없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탓이다.
지금 공격한다면 단칼에 목을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방비.
오랜시간 챔피언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온 그가 처음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너는 그저 취하고 싶었던 거다. 빼앗고 싶었던 것이다. 완성되어있는 완벽한 육체를! 다시 한 번 명예로우며 한없이 빛나던 인간이 되기를! 그래, 너는 기사왕 빌헬름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닥쳐라!’
-답답하고 아둔한 놈. 삼천년이 지났는데도 네놈은 변한 게 없다. 빌어먹을 위선자 같으니.
‘닥치라고······!’
-비켜라, 네놈이 싫다면 내가 하겠다. 항상 하던 것처럼 말이다!
아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만큼.
챔피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먼 고대의 악마가 되었다.
*
“뭐, 뭐야······?”
아우릴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미칠 듯이 찔러오는 악취.
너무 오래되어 부패한 자의 썩은내가 챔피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이런 류의 악취를 풍기는 자는 절대로 인간일 수 없었다.
‘악마 숭배자?’
진한 악취.
이 세상에는 ‘악’이 하나가 아니다.
악마, 마족, 사신, 심연······ 모두가 각기 다른 역할과 영역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중 악마는 ‘악업’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존재.
이 세상에 극소수로 존재하는 악마와 그들을 따르는 ‘악마 숭배자’들.
챔피언도 그중 하나일는지.
‘아니야. 저건 악마 그 자체야!’
하지만 아우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숭배자에게 대가를 받고 거대한 힘을 내려준다.
예컨대 데몬하트와 같은 것을.
그것을 얻은 인간은 한계를 초월하는 대신 별로 인한 각성이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데몬하트를 얻어서 강해지는 악마 숭배자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들보다 훨씬 심한 악취와 악업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악’ 그 자체.
‘여왕님께서 말하시길, 태초부터 이 세상에는 일곱의 악마가 있다고 하셨지.’
일명 칠대죄종이라 불리는 자들.
진정한 악마는 그들 일곱뿐이라고 하였다.
그들중 현세에 있는 건 셋뿐이며 나머진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들 전부가 세상에 나타나면 또 다른 ‘멸망’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세계수와 여왕은 분명히 그렇게 말헀다.
그럼 지금 눈앞에 있는 악마는 그 죄악과 관련된 존재인 걸까?
먼 옛날 사라진 고대의 악마 말이다.
“저, 저건 뭐야?”
“몸이 부풀고 있어?”
“설마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가?”
챔피언의 몸이 부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놀라선 외쳤다.
말 그대로 살점이 부풀며 풍선처럼 변했으니까.
“아······.”
동시에 아우릴은 경직해버렸다.
저건 어마어마한 ‘악’의 집합체다.
악취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욕망이 저 안에 모여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명 분의 욕망이.
일전 란돌프에게서 보았던 욕망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란돌프가 발출한 욕망은 모든걸 아우르고 지배하는 욕망이라면, 저 안의 욕망은 그야말로 ‘집착’과도 같은 끈적하기 그지없는 욕망이었으므로.
곧이어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카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부 도망쳐라. 놈이 온다.”
놈?
누굴 말하는 거지?
카라스의 음성이 얇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이미 한 번 겪어봤다는 듯이.
카라스가 이어서 말했다.
“진짜 ‘산샤’가······ 온다.”
*
지면이 흔들린다.
탑이 떨고 있었다.
챔피언의 변화에.
진짜 ‘산샤’의 출현에.
카라스의 말을 들으며,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산샤의 존재를 몰랐던 이유가 있었군.’
나도 우연찮게 알게된 이름이다.
빌헬름으로 탑을 오를 당시 카라스가 해준 말이었다.
산샤를 조심하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스는 내게 산샤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당최 ‘산샤’의 실체를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
뭘 하고 있는 건지조차도.
‘저게 산샤로구나.’
관객들이 모두 대피한 이후.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린 그것은 이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었다.
수많은 팔과 다리를 지닌 지네 형태의 악마.
하물며 그 팔과 다리는 다른 ‘인간’의 것이었다.
몸통에는 수많은 눈들이 나있었고, 머리 끝에 다다라서야 챔피언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 끔찍하군.’
정말 극도로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다.
게임으로 표현된 수위로는 절대로 화면에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이 생겼다.
【Lv. ???】
레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 괴물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망치거라, 흉의 마지막 자손이여.”
그때, 나의 앞으로 카라스가 나타났다.
하지만 카라스는 완전하지 않다.
탑의 주인인 그는 이미 ‘산샤’에게 당한 후였다.
카라스의 날개가 지네의 옆에 돋아있었으니.
아마 저 날개를 잃고, 힘을 대폭 잃어버린 것이리라.
“흉의 일족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수많은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일족이었지.”
흉의 일족.
흉흉한 까마귀들이 수많은 탑의 관리자였다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이 역시 기본 세계관에는 존재하지 않던 내막이었다.
탑의 출현과 그 탑들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일족이라.
카라스가 이어서 말했다.
“비록 ‘산샤’에게 육신의 일부를 뜯어먹혔으나, 아직 탑은 나의 것이다. 오랜시간 고민했으나 역시 탑과 함께 놈을 묻어버려야겠구나. 놈이 이 탑을 벗어나기 전에. 흉의 마지막 자손까지 먹어치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진즉에 그럴걸 그랬다는 듯 후회어린 음성.
곧이어 카라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다만, 궁금하구나. 그대는 흉의 일족이면서 동시에······ 1년 전 ‘그’를 떠올리게 한다.”
챔피언과 마찬가지로, 카라스 역시도 나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하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빌헬름이오.”
나름의 공손함을 담아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나를 살리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그러자 카라스가 그럴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래서 ‘산샤’가 그대를 그토록 갈망했나보군. 기사왕. 아니, 성혈을··· ‘황제의 피’를 이은 자여.”
“······ 황제의 피?”
“아아. 너의 근원은 천상에 있다. 이 이상의 발언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으나, ‘흉’의 의지가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리라.”
“음,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
설마 여기서 내가 포기하고 도망칠 줄 알았던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빌헬름이오. 단 한 번도 등을 보이고 도망친 적이 없는.”
빌헬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마찬가지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지다.
아니,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만이 아니다.
저 악마를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지고의 검.’
허공에 검을 찔러넣자.
쩌어어어억!
거대한 영역이 찢기고, 뜯기며,
내 위로 거대한 ‘암흑 공간’이 열렸다.
검성 그라시아의 ‘천검 영역’과 비슷하지만, 그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너무 위험한 탓에 사용하지 못했던 ‘지고의 검성’의 히든 스킬.
그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