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조금씩 강인해져 가는 것만 같다.
숲에서 있을 땐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 접할 수 없었던 욕망을 접하며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듯 그렇게 아우릴은 나아가는 중이었다.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아우릴은 투기장을 바라봤다.
양측에서 란돌프와 챔피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므로.
‘······!’
그리고 챔피언을 본 순간, 아우릴은 작게 전율했다.
보자마자 알았기 때문이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거대하기 짝이 없는 기운.
푸른 기운이 마치 용처럼 똬리를 뜬 채 챔피언을 감싸고 있었다.
······ 강하다.
아마도, 카라스보다도 더.
게다가 저건 단순히 강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인간인데······.’
인간이다.
챔피언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하지만 엘프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챔피언은 평범한 인간과는 궤가 달랐다.
‘인간이······ 섞여 있어?’
몇 개의 냄새가 뒤섞여있다.
한 인간의 것이 아닌, 여러 인간의 냄새가.
본래 인간마다 나는 냄새가 여러 가지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여러 인간의 냄새가 뒤섞여있다는 건 정말로 뒤섞여있다는 뜻이었다.
신체가.
장기가.
수많은 부위가.
다른 인간의 것들로 대체되고, 섞여서, 저러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것도 평범한 인간의 신체 역시도 아니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강자들. 그것도······.’
한 분야에 정점을 찍었던 강자들의 신체다.
더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인 자들을 모아 완성한 게 바로 챔피언이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오래된 냄새도 섞여 있어.’
수천 년은 족히 된 것만 같은 꿉꿉한 냄새마저도 공존하고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만약 수천 년 전의 신체라면, 대륙이 천공으로 떠오르기 전의 것일 터.
허나 인간의 시체는 며칠만 지나도 부패해버린다.
수천 년간 부패하지 않은 시체를 구해서 저처럼 자연스럽게 이어붙이고 되살리는 능력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는 강력한 리치나, 크람델의 사왕도 저 정도 수준의 언데드를 만들어내진 못할 것이다.
하물며 저건 언데드조차 아니지 않은가.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도 계속해서 더 강한 자들의 신체로 바꿔 끼고 있는 거야······!’
꽈아악.
아우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챔피언은 현재도 끊임없이 강화를 진행 중이었다.
섞여 있는 냄새가 족히 백 개는 넘었으니까.
백명의 신체가 지금 저 몸에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끊임없이 바꾸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아······.’
그 사실을 깨닫곤 아우릴이 몸을 흠칫 떨었다.
만약 란돌프가 패배한다면··· 그의 신체부위 중 하나가 챔피언의 것이 될 수도 있는 노릇.
분출하는 기운들로 보건대 단순히 신체만이 아닌 바꿔낀 자의 기술과 자격 역시도 강탈해가는 것 같았다.
즉, 하이 드루이드의 자격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100개가 넘는 기술을 몸에 체득하고, 경지에 이른 그들의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괴물 중의 괴물!
그러다가 문득 아우릴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더욱 강인한 신체로 바꾸고 있음에도 수천 년간 바꾸지 않은 신체기관.
그것을 확인했을 때, 아우릴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런 걸······ 어떻게 이겨?’
*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이렇게 심장이 뛰어본 게 언제지?
확실히 근 1년 사이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빌헬름의 전인!’
지금, 빌헬름의 기술을 이은 자가 눈앞에 있다.
본인은 아니겠으나 그를 잇는 자를 마주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 정도의 미련은 털어낼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미련만이 아니다.
‘··· 더 강해질 수 있다.’
저자는 틀린없이 빌헬름의 기술을 완전하게 체득한 자였다.
자신은 해내지 못했던 검술을 확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펭귄의 신체로 말미암아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빌헬름의 기술을 보다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있을 터.
오직 기억만으로는 따라할 수 없던, 그 절대적인 검술의 경지에.
1년전 갖지 못했던 그 존재의 자격에!
마침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강탈해라. 강제로 잘라내고 이어붙여라. 모두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러자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
“으음······.”
챔피언은 한차례 머리를 털어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속삭임의 빈도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황제펭귄과 챔피언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며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챔피언이 할 일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쓰러트리는 것뿐.
‘청룡각.’
구오오오!
콰지지지직!
청룡이 굉음을 내며 황제펭귄을 덮쳤다.
자. 과연 빌헬름의 전인은 자신을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달인의 경지지에 이른 108개의 고유 기술.
부디 그중 절반이라도 막아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
익숙하다.
저 청룡과도 같은 광활한 기운과 기세가.
이윽고 챔피언이 발을 뻗어 지면을 내리쳤을 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청룡각.’
지면에서 솟구친 청룡이 단번에 나를 덮쳐왔다.
청룡각이다.
그리고 이 기술을 쓰는 자를, 나는 알고 있다.
‘······ 청룡전설. 내 부캐의 스킬이다.’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청룡전설.
숨겨진 직업인 ‘청룡의 후예’로 어렵사리 키워놓았던 캐릭터였으니까.
청룡각은 ‘청룡전설’의 가장 강력한 초월스킬이었다.
하지만 챔피언은 절대로 ‘청룡전설’이 아니다.
‘청룡전설’은 투신의 탑과는 아예 연관없는 장소에 있으므로.
그도 그럴게 ‘후예’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아 ‘청룡산’에 박아놓은 캐릭터 아니던가.
구오오오오!
덮쳐오는 청룡을 바라본다.
‘청룡전설’이 사용하던 천룡각보다, 훨씬 더 완성된 형태.
보다 완전한 청룡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 허.’
이건 뭐지?
내가 키웠던 부캐의 스킬을, 보다 완성된 형태로 사용하는 자가 챔피언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이었다.
‘천지개벽의 지(地).’
천지개벽의 지.
모든 공격에 공명하며 파훼하는 검술.
저 청룡은 애초에 내 부캐의 스킬이다.
그대로 검을 내뻗어 청룡의 중심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아아, 역시!”
동시에 챔피언은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평범한 내지르기였을 터.
그것을 알아본 건가?
빌헬름의 검술을, 천지개벽의 원리를 파악했다고?
‘챔피언은 빌헬름의 별을 먹었다.’
게다가 태양의 별을 먹었다.
어쩌면, 빌헬름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이어졌을지도 모르는일.
“사룡의 검!”
왼팔에 검은색의 아지랑이 피어났다. 죽음의 용과 같은 성질을 지닌 검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 부캐, 청룡전설이라면 쓸 수 없는 스킬.
저 또한 초월 스킬이자 고유 스킬이었다.
다른 캐릭터는 가질 수 없는, 기껏해야 한 캐릭터가 하나 갖기도 힘든 고유한 스킬을 대체 몇 개나 쓰는 건지.
‘······ 재밌군.’
확실히 정상적인 놈은 아니다.
그래도 직접 부딪혀보니 대충은 알겠다.
‘뒤섞여 있는 존재. 그래서 가능했을 수도 있겠군.’
뒤섞여 있다는 걸.
챔피언의 전신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많은 조각들이 합쳐져 하나가 된 묘한 경우였다.
키메라와는 약간 다르다.
합성된 키메라는 교체된 육체의 기능만 사용하지만, 눈앞의 챔피언은 육체의 기능과 함께 그 기술마저도 사용할 수 있는 듯싶었다.
챙! 촤앙!
꽈아아앙!
부딪히고, 파훼하며, 공방을 이어나간다.
계속해서 바뀌는 형식의 스킬과 공격은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신검합일!”
놈은 일부러 기술명을 내뱉으며 즐기는 중이었다.
어디까지 내가 막아내는지 실로 궁금한 모양이다.
··· 그런데.
놈이 입에 담은 기술명에 나는 내심 인상을 구겼다.
신검합일?
‘······ 명란젓코난?’
명란젓코난.
1만 SP를 들여 키운 검술의 대가.
하지만 사망했다. 초기회되어 모든 게 날아갔다.
그러나 신검합일은 명란젓코난의 초월검술.
검과 하나되는 경지의 이름을 스킬로 표출해낸 진정한 검의 대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이미 사망한 캐릭터의 스킬을, 챔피언이 사용하고 있다.
‘분명히 지옥벌레구덩이 던전에서 죽었는데.’
지옥벌레구덩이 던전.
우연히 발견한, 나밖에 모르는 던전이었다.
그곳에 있을 시체를 어떻게 찾아낸 걸까?
채에에엥!
생각을 이어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더욱 빨리진 속도.
훨씬 정교해진 칼날의 끝.
신검합일은 회피불가의 공격이기에, 흘릴 수 없다.
또한 30초간 특수 능력치인 치명타율을 100%로 끌어올려준다. 막아낸다 한들 데미지가 누적되는 형식이다.
명란젓코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 스킬.
지속시간동안 부딪히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 정도로 고유 스킬이란 사기적인 것이었으니.
‘대체 몇 개의 고유 스킬을 지니고 있는 거냐?’
이쯤되자 궁금해진다.
이놈이 지닌 고유 스킬의 개수가.
그리고 이놈이 지닌 육체의 비밀이 말이다.
*
역시!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아아아.
챔피언은 행복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황제펭귄은 벌써 10개가 넘는 기술을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빌헬름의 전인이라면 이정도는 해야지!’
기대한 것만큼,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하물며 황제펭귄이 펼쳐내는 검술의 원리는 분명히 빌헬름의 것이었다.
백개가 넘는 고유 기술을 체득한 자신이 펼쳐내지 못한 유일한 검술 말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겠지!’
천지개벽의 천.
천지개벽의 지.
이 두 개만으로 그는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꿰뚫고, 공격을 파훼하면서.
여유인가? 아니면 이게 전부인가?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아직 전부를 꺼내지 않은 것처럼, 황제펭귄 역시도 모든 걸 내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30개까지는······!’
카라스도 70개의 기술을 겨우 막아냈을 따름이다.
산샤에 의해 격이 떨어진 뒤였긴 했지만, 그 이상의 기술을 선보인 적은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더, 더 막아내봐라. 너의 한계를 내게 보여다오! 빌헬름의 전인이여!’
순식간에 20가지의 기술을 선보인 챔피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조차도 막아내지 못했다면 실망이 컸을 테니까.
머지않아 30가지의 기술을 선보인 뒤, 챔피언은 작게 감탄했다.
‘아직도 내 기술을 막아낼 여력이 있구나!’
숨이 고르다. 움직임이 안정적이다.
여유가 있다.
예상대로 빌헬름의 검술은 상상이상이었다.
저 검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마왕마저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제법.’
대결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벌써 60가지의 고유 스킬을 선보였다.
하지만 챔피언 기술은 중첩될수록 강해진다.
여태껏 막아낸 건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부딪히리라.
‘허.’
이놈, 뭐지?
마침내 70가지의 기술을 선보인 챔피언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카라스의 기록을 넘어섰다.
단순히 빌헬름의 전인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실력이지 않나.
‘아직도 여유가 있다고?’
더욱이 놀라운 건 황제펭귄의 상태다.
여전히 두 가지 기술로만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말이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