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70화 (170/317)

“황제펭귄한테 겁이라고 먹은 거냐?” 

“우우우우!”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투신의 탑을 오르는 도전자들에겐 치욕과도 같은 상황. 

그러나 카라스는 가만히 등을 돌려 경기장을 벗어날 뿐이었다. 

이 결과에 한 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당황을 넘어 황당할 일. 

그리고 그것은 산샤도 마찬가지였다. 

“······ 미친 건가?” 

산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카라스는 일종의 쐐기였다. 

황제펭귄의 한계를 시험하고, 현 챔피언의 시선을 끌기 위한. 

하지만 이래선 죽도 밥도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퇴장해버리면 산샤의 계획과 너무나도 어긋나게 되어버린다. 

“대체 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기권할 생각이었다면, 경기 자체에 참가하지 않았을 터. 

카라스는 분명히 황제펭귄을 알아보고 기권을 던졌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모종의 거래라도 한 걸까? 

‘카라스는 거래가 통하는 놈이 아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카라스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카라스의 유일한 약점을 쥐고 있는 자신만이 놈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약점을 황제펭귄이 알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 황제펭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무언가가 있다. 

투신의 탑에 오르는 자들은 신상의 비밀이 보장되지만, 황제펭귄에겐 자신이 알아야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산샤가 명령하자 탑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관심을 끈 이상 황제펭귄의 정체는 속속들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황제펭귄. 너의 약점은 무엇이냐.’ 

약점을 쥐고, 흔들어주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반신의 치명적인 약점조차 찾을 만큼의 능력이 자신에겐 있었으니까. 

-너는······. 

카라스. 그가 떠나기 전,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카라스의 목소리였다. 

-흉(凶)의 일족이로군. 

그는 단번에 내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그나저나, 흉의 일족이라. 

끔찍한 흉조.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바알과 함께 융화되어 ‘어둠을 피우는 자’가 되었으나, 그 원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카라스가 알아본 건지. 

카라스 역시도 까마귀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컨셉이 아니라 진짜 까마귀였나?’ 

······ 저 얼굴도 컨셉인 줄 알았다. 

그럼 카라스는 까마귀 일족의 신인 건가? 

【Lv. ???】 

【탑에 존재하는 반신의 가호로 인해 존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Tip : 진리탐구의 재능 레벨을 더 올리면 그 이상의 격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벨도, 정보도 보이지 않는다. 

히든 특성 ‘대현자’를 이 탑의 가호가 막고 있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탑의 내부’에 한정할 뿐, 카라스를 ‘탑의 외부’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터. 

게다가 Tip이 예사롭지 않다. 

진리탐구의 레벨을 올리면 신격을 지닌 자들도 꿰뚫어볼 수 있다는 뜻. 

이건 대현자의 히든 특성이 지닌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었으니. 

카라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라진 흉의 일족을 다시 보게 될줄은 몰랐구나. 그대들은 본래 이 탑을 ‘관리’했던 일족인 즉. 그 왕의 후손이라······. 

잠깐. 

흉의 일족이 투신의 탑을 관리했다고? 

까마귀들. 하지만 일반적인 까마귀는 아닐 것이다. 

문득 끔찍한 흉조가 되어 소환했던 까마귀들을 떠올려본다. 

바알을 압박하고자 피가 흐르는 태양을 소환했던 그 까마귀들은, 일반적인 까마귀들과 궤가 달랐다. 

혹시 그 까마귀들이 흉의 일족은 아닐는지. 

이후 카라스는 기권했다. 

흉의 일족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태도. 

도리어 친근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탑의 관리자 산샤를 조심해라. 그는 여태껏 네가 마주했던 자들과는 많이 다른 자일 테니. 

마지막으로 그 말만을 남기고서, 그는 거침없이 등을 돌려 퇴장해버렸다. 

18층. 

이제 챔피언으로 향하는 계단은 두 계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찝찝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산샤가 17층에 카라스를 보낸 저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스는 기권했고, 챔피언에게서도 별반 반응이 없었다. 

‘내 실력을 보고 싶었던 거다.’ 

압도적으로 농락하는 모습은 보여줬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관객들의 호응은 최고였지만 챔피언이 될 재목까진 아직 아니었다. 

하여, 제대로 된 나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 카라스를 내보낸 게 분명했다. 

카라스 정도는 이겨야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다고 여긴 건지. 

당연한 말이지만, 탑의 주인이자 반신인 카라스보다 현재의 챔피언이 더 강하다는 이야기다. 

빌헬름으로도 마주하지 못한 강자. 

뭐 하는 녀석일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답은 하나뿐이군.’ 

보고싶다면 보여주리라. 

남은 건 방법의 문제였다. 

누구를 통해서 보여주느냐. 

지금까지의 상대들은 너무 싱거웠다. 

제대로 내 검을 마주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하리라 여긴 카라스도 기권해버렸으니. 

“‘토끼녀’가 ‘황제펭귄’에게 도전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슈퍼 루키 두 명이 마침내 맞붙습니다!” 

아우릴. 

숨겨놨던 카드를 이제 쓸 때가 됐다. 

아우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전력을 다해 부딪히도록. 나를 죽일 기세로 말이다. 

다시 한 번 란돌프와 붙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이전과 같은 실수는 안 해.’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상대를 파악할 생각도 안 하고 무식하게 검부터 휘둘렀다. 

그 결과, 본 실력의 절반도 채 보이지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란돌프의 욕망이 두렵지 않은 지금이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월계수의 잎도 크게 성장했으니까.’ 

란돌프와 계약한 이후, 아우릴의 월계수 잎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 

그녀의 잎은 다른 엘프들과 비교해 성장이 멈춰있는 수준이었으므로. 

“황제펭귄과 토끼녀! 둘 다 전승으로 탑을 오르는 무서운 신예들입니다!” 

“울화통 유발자와 모든 상대를 3초 내로 끝내버린 토끼녀의 대결!” 

“아··· 이거 누가 이길지 도저히 예상이 안 되는데요?” 

진행자들이 바람을 불었다. 

관객들 역시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둘의 대결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아우릴이 란돌프를 바라봤다. 

저 거대하기 짝이 없는 욕망이, 이제는 두렵지 않다. 

게다가 다른 인간에게서 맡아지던 끔찍한 ‘냄새’ 역시도 나지 않는다. 

확실히 란돌프는 다른 인간과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도리어 더 신경이 쓰인다. 

‘이길 거야. 반드시.’ 

아우릴이 검을 들었다. 

‘이 미련을 이제는 놓아줘야겠지.’ 

챔피언은 여전히 탑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탑의 아래를 보며 빌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탑을 올라 자신에게 도전해주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빌헬름은 대원정에서 사망했으므로. 

마왕에게 죽은 자가 어찌 다시 투신이 탑을 오를 수 있겠는가. 

‘이 별의 기억에 따르면······ 빌헬름의 죽음은 확실하다.’ 

별에 새겨진 빌헬름의 기억. 

전부는 아니지만 그중 몇몇 기억들이 자신에게 흘러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왕에게 죽은 채 몸을 빼앗기는 장면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검술’에 관련된 기억 하나가 묻혀있었다. 

‘빌헬름의 검술. 천지개벽의 벽.’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분만 보았음에도, 전율이 인다. 

빌헬름이 사용하는 검술 천지개벽. 

그중 마지막 ‘벽’은 그야말로 신을 죽이는 검이었으니까. 

그러나 ‘벽’의 사용을 위해선 나머지 빌헬름의 별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모든 별을 모아야만 ‘벽’의 완벽한 사용이 가능해진다. 

당연히 자신이 가진 별. 이 빌헬름의 별을 만약 마왕에게 빼앗긴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할 것이다. 

‘마왕은 빌헬름의 별을 찾고 있다.’ 

하여 챔피언은 확신했다. 

마왕은 빌헬름의 흩어진 별을 찾고 있노라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육체에 깃들었던 별의 위치를 그는 알 수 있을 터. 

먼저 나서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마왕은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절로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되면······ 이 탑 역시 스러지리라. 

산샤도, 카라스도, 그리고 자신 또한, 마왕을 막지는 못할 테니까. 

지금의 마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 

물론,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지만. 

‘그나저나.’ 

챔피언은 눈을 감았다. 

마왕이 자신을 찾기 전까지의 남은 유예 기간. 

미련을 버리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카라스가 기권을 했다고.’ 

문득 어제의 소식이 떠오른다. 

탑에선 반신격의 존재인 카라스가 누군가에게 기권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산샤에 의해 조종당하고는 있으나 경기에 나간 이상 항상 최선을 다하던 게 카라스 아니던가. 

그의 자존심상 절대로 항복을 하지 않을 자다. 

그런 그가, 황제펭귄을 보자마자 항복을 했다. 

왜? 

이길 수 없다고 확신이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황제펭귄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사실이 챔피언의 관심을 움직였다. 

‘한 번 봐야겠군.’ 

챔피언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엔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없는 자. 존재하지 않는 자를 기다리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었다. 

그 멍청한 미련을 일 년이나 지속한 자신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됐다. 

챔피언은 오랜만에 탑의 아래로 향했다. 

카라스를 항복시킨 황제펭귄이 조금은 궁금했으니까. 

토끼녀와 황제펭귄의 대결을 보고자 일 년 만에 직접 움직인 것이다. 

‘엘프?’ 

그러나 챔피언은 황제펭귄보다 토끼녀에게 시선이 꽂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엘프임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숨기고 있으나 챔피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엘프가 왜 투신의 탑을 오르고 있는 거지?’ 

폐쇄적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인 자들이 아니던가. 

참으로 묘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반면에, 황제펭귄은. 

‘저자도 묘하긴 하군.’ 

묘한 게 섞여 있다. 

한, 두 개가 아니다. 

인간이라 하기엔 이미 선을 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카라스가 항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빌헬름만 못하겠지.’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쳐 날뛰게 했던 기사 중의 기사. 

‘······ 이상하군.’ 

그런데 왜일까. 

왜 저 황제펭귄의 자세가 눈에 익은 걸까. 

1년 동안 셀 수 없이 떠올렸던 그 기사의 몸짓이. 

자신보다 그를 더 많이 회상한 자는 없으리라 확신할 만큼, 챔피언은 그와의 대결을 수도 없이 머릿속에 그려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아직 자신이 완전하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뿐이리라.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저··· 검술은······?” 

챔피언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네임드

아우릴은 이전의 싸움을 복기했다. 

‘란돌프 님의 검술은 공간을 장악하는 기술.’ 

그의 공간 내에 있으면 장악당하고, 지배당한다. 

모든 움직임이 읽히고 몸이 굳은 듯 한없이 느려지는 기분. 

하지만 아우릴은 이 기술을 다른 각도로 바라봤다. 

‘진짜 검술의 정체는 마주한 자의 의식을 읽는 거야.’ 

저건 공간을 진짜로 장악하는 검술이 아니라고. 

마주한 상대의 의식을 읽고, 그 의식에 따라 검을 쳐내는 것뿐이라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그를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무의식.’ 

검을 의식하지 않는 경지. 

모든 움직임을 사고하지 않으며, 손이 닿는 대로 그저 뻗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기술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란 결국 몸이 마음대로 반응하게 놔두는 것.’ 

하지만 그녀는 월계수의 전사들 중에서도 검술만큼은 가장 뛰어나다 자부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으니 검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하다. 

아우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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