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진 빌헬름의 별을 먹었다.
동시에 엄청난 기억들이 쏟아지며 챔피언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빌헬름이 죽고, 빌헬름의 별을 먹은 이후, 현재 그 혼란은 최고치에 달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지?’
반신 카라스
-보십시오! 빌헬름! 그가 신화를 완성해갑니다!
-와아아아아아!
-빌헬름! 빌헬름! 빌헬름!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버서커냐?
-저게 진짜 기사도지!
-날 가져요 빌헬름!
근 몇 년간 가장 뜨거웠던 탑의 도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투신의 탑을 오랫동안 관람해온 관람객들은 모두 ‘빌헬름’을 꼽을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그가 등장했을 땐 모두가 냉대했다.
풀 플레이트를 입은 채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모습은, 야생과 같은 이곳 투신의 탑과는 크게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관람객들이 원하는 건 날 것 그대로의 싸움.
하지만 빌헬름은 상대를 배려하고, 치켜세우며, 명예를 말했다.
‘어울리지 않아.’
후에야 인기가 생겼으나 산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신화의 탑에 기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는 투기장이다.
보이는 게, 퍼포먼스가 가장 중요한 장.
저렇게 전신 갑옷을 입은 채 얌전을 떨어대는 자가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면, 탑의 기조가 전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탑의 기조가 바뀌면 매출도 떨어진다.
매출이 떨어지고, 인기가 식으면, 투신의 탑은 존재 의의를 잃게 될 터.
-18층! 벌써 챔피언의 자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 명예로운 기사가 과연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현 챔피언 역시도 빌헬름의 경기를 매번 직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이건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거겠죠?
-챔피언과 빌헬름이 서로 눈빛을 교환합니다!
-이거 오늘 잠 못 자겠는데요?
빌헬름은 강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졌다.
그가 펼쳐내는 검술은 황홀했으며, 그의 족적 하나하나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보고 있노라면 그저 압도되기 바빴으니.
‘챔피언과 빌헬름이 싸운다면.’
과연 누가 이길까?
모든 이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투신의 탑에서 챔피언은 그야말로 신화 같은 존재다.
탑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리 빌헬름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탑 안에서만큼은 챔피언은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챔피언 역시도 빌헬름과의 대결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산샤는 그것만큼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19층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자를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19층만 넘어서면 20층. 챔피언의 자리입니다.
-빌헬름을 막을 19층의 문지기는······ 예? 잠깐.
-카라스?
-이전 챔피언 아닙니까?
이전 챔피언, 카라스.
은퇴하였던 그를 산샤가 직접 데려왔다.
본래 이 탑의 주인이었던 자이며 동시에 ‘투신’이라 불리었던 신화적인 존재.
-아······ 이전 챔피언이자 탑의 주인이 나왔군요.
-현 챔피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은퇴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힘들겠습니다.
-빌헬름의 전설도 여기까지일까요?
산샤는 자신했다.
카라스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빌헬름의 패배를 점쳤다.
카라스는 반신과도 같은 자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현 챔피언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나 그것은 일신상의 이유에서였다.
탑 내부에선 반칙과도 같은 괴물.
‘많은 걸 포기하고 데려왔으니, 어디 날뛰어 보거라. 반신 카라스여.’
산샤는 미소를 지었다.
빌헬름은 절대로 카라스를 이길 수 없다.
이곳 탑 내부에선 절대로.
하지만 그런 자신은, 미소는, 머지않아 깨지고 말았다.
그날.
산샤는 보고 만 것이다.
“······ 뭐냐, 저 괴물은.”
*
“토끼녀!”
“오늘도 섹시하다!”
“제발 가면 한 번만 벗어줘!”
······ 아우릴은 질끈 눈을 감았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하는 중이었지만, 도저히 적응되질 않았다.
이곳은 욕망의 집합소와 같은 곳.
그녀와 같은 엘프에겐 존재 자체가 독인 장소였으니까.
“제법 소란을 떨었다만, 10층의 벽을 느끼게 해주지.”
어느덧 10층.
상대는 마치 닭의 갈기와 같이 붉은 깃털을 머리 위에 세운 창잡이였다.
얼굴도 정말 닭처럼 생겼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관객들을 향해 요란한 자세를 잡으며 자신의 몸매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보아라! 너같이 가냘픈 몸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우람한 근육을! 10층의 관객들은 나를 더 좋아한······.”
“우우우우!”
“닭대가리는 꺼져라!”
“아, 씨 눈 버렸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현재 투신의 탑에서 아우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
그녀만 한 실력자가 확실한 팬서비스와 함께 탑을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과 달리, 아우릴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더러워. 냄새나.’
저 닭대가리는 스컹크와 같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층을 오르면 오를수록 악취는 더 강해져만 갔다.
주변에서 풍기는 욕망도 더 강렬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욕망의 화신 같은 존재인 란돌프를 겪어서일까?
아니면 그와 계약을 진행해서일까?
차라리 저들보단 란돌프가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으으······ 창피해. 죽고 싶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란돌프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런 부끄러운 복장으로 탑을 오를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네년이 내 관객들마저 현혹시켰구나! 당장 죽여······!”
닭대가리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바닥에 몸을 눕혔다.
더러운 것을 만진 듯 손을 털어내며 어느덧 옆으로 아우릴이 지나가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인간은 너무 불결해!’
*
15층.
불과 일주일 만에 초고속으로 나는 탑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일정이 잡히고 있다는 건.
‘산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빌헬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때의 산샤는 빌헬름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온갖 애를 썼다.
반면 지금은 총력을 다해 밀어주는 중이다.
그러나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속도.
‘설마 산샤는 챔피언의 교체를 원하고 있는 건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듣기로, 챔피언은 지난 1년 동안 다른 도전자들의 도전을 받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산샤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
상념을 접고 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거칠게 압박해오는 전사.
하지만 전사의 얼굴은 붉은 기가 가득했다.
스악!
슈웅!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있었으니까.
하아아암.
나는 입을 벌려, 손을 맞대며 하품을 했다.
농락이다.
그것도 철저한 농락이었다.
“하하! 좀 맞춰봐라!”
“저렇게 못 맞추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
“더블엑스 마스터의 칭호가 운다 이놈아!”
“황제펭귄! 오늘도 재밌게 해달라고!”
관람객들도 함께 비웃었다.
나는 전사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 어깨동무를 하거나, 양쪽 다리 아래로 슬라이딩을 하며 바지를 죽 잡아당겼다.
하의가 실종된 전사는 결국 울화를 터트렸다.
“으아아아아! 이 개 같은 새끼야!!!”
“크하하하! 화났나 본데?”
“역시 울화통 유발자!”
“오늘도 대성공이로구나!”
일명 울화통 유발자.
그게 탑을 오르며 생긴 내 별명이었다.
*
“매출이 일주일 사이에 20% 상승했습니다.”
“황제펭귄의 경기는 두 배 넘는 가격에 암표로 팔린다고 합니다.”
“토끼녀를 보러 오는 관람객도 상당한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으며, 산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둘은 넝쿨째 들어온 보석이 따로 없다.
밀어주는 만큼, 밀어주는 것보다 더 강렬한 파급력을 불러오고 있으니까.
특히 황제펭귄.
놈은 물건이었다.
“울화통 유발자라······.”
상대의 화를 돋아 결국 쌍욕을 나오게 만드는 울화통 유발자.
그가 고여있는 투신의 탑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오랜 시간 군림하던 강자들을 농락한다. 관객들 입장에서 이보다 재밌는 그림은 나오지 않겠지.’
고고한 백조마냥 호숫가에 잔잔히 떠 있는 강자들.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격랑을 부르는 존재의 출현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게다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너무나도 강해서 그만한 여유를 보이며 농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빠르게 끝내지 않고, 확실한 퍼포먼스와 함께 재미마저 선사해주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이 나타난 걸까?
마음에 들어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챔피언의 반응은?”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은 없습니다.”
“음.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보군.”
산샤는 턱을 쓸었다.
황제펭귄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든다.
여태껏 이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존재는 현 챔피언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 대결에서 중요한 건 챔피언의 반응이다.
챔피언은 분명히 빌헬름 때 강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만난 듯 애처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대결이 무산되자, 이후 챔피언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만큼 눈에 띄는 도전자가 나타난 것 역시 아니었으니.
황제펭귄도 아직 챔피언의 시선을 잡기엔 여러모로 자극이 부족한 듯싶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챔피언이 황제펭귄에게 반응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결국 챔피언이 수긍하지 않으면 경기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실력으로 농락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보여줘야 하나 보군.’
황제펭귄의 진짜 실력을 이끌어 낼 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황제펭귄의 끝을 알 수가 없다.
너무 강한 대상을 붙여줬다간 도리어 당할 수도 있으니까.
‘황제펭귄과 함께 나타난 토끼녀.’
그나마 떠오르는 존재라면 토끼녀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펭귄과 달리, 모든 경기를 3초 내로 끝내버리는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여자.
그녀와 황제펭귄을 맞붙인다면 어떨까?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하지 않나.’
맞다. 너무 뻔한 그림이다.
그런 뻔한 그림은 자극이 되지 않는다. 토끼녀와 황제펭귄의 싸움이 큰 자극이 되기엔 조금 더 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산샤는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 나갔다.
투신의 탑을 올랐던 최강의 강자들.
역대의 강자들을 모조리 불러와 볼지, 아니면 더 큰 모험을 해볼지.
한참의 고민 끝에 산샤는 결정을 내렸다.
“······ 녀석을 한 번 더 불러야겠군.”
*
어느덧 17층.
고속으로 질주하는 나를 막아선 자를 나는 매우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가 여기서 나타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작 17층. 아직 세 계단이나 남은 상태에서 설마 이만한 강자가 나를 막아설 줄이야.
까마귀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지닌 반인반수.
살아있는 신화이자 반신격의 괴물.
카라스!
“너는······.”
한데, 그 역시도 나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과거 빌헬름으로 투신의 탑을 오를 때 마지막으로 싸웠던 대결자.
그와는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운 기억이 있었다.
이곳 투신의 탑에서 그는 진정한 반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빌헬름이 아니다.
카라스 역시도 내가 빌헬름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관리자인 산샤도 못 알아봤으니.
이어 카라스가 왼쪽 손을 들어올리곤 입을 열었다.
“기권하겠다.”
빌헬름의 별
“기권?”
“카라스가 기권이라고?”
“거짓말이지······?”
사상 초유의 사태에 모두가 경악했다.
한창 떠오르는 샛별과 전 챔피언의 대결.
이 대결을 관람하고자 모여든 관람객으로 관람석은 이미 만석이었으니까.
웃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경기였건만, 카라스가 기권하겠다 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적이 있던가?”
“없어. 카라스가 경기에 나와서 기권한 적은 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