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염원구슬도 사용하지 않았나.
어찌 됐든 하루에 최대 400개의 알을 산란할 수 있으니, 이세라 공략에 큰 차질을 빚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캬캬캬!
난데없이 공간을 격하며 나타난 녀석.
“어디 갔다 온 거냐?”
의아해하며 묻자 헬이 주섬주섬 앞섬에 손을 넣었다.
그러곤 천천히 물약 두 개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보곤 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 저장된 경험치 물약?”
헬이 내민 건 ‘유니온의 저장된 경험치 물약’이었으니까.
나는 한참이나 헬과 경험치 물약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걸 녀석이 어떻게 가져온 거지?
그것도 일반적인 경험치가 아니다.
정말 방대한 양이 저장된, 경험치의 보물창고와도 같은 물약이었다.
*
물약의 확인이 끝난 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쨌든, 유니온에게 헬을 보이는 작전은 성공이었다.
그것도 대성공.
황금률의 마법사가 제국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내 추측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이세라의 위치와 이세라의 목적마저 알게 됐으므로.
심지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니온의 경험치가 든 물약까지 가져왔다.
헬은 그야말로 트로이의 목마 그 자체였다.
“······ 용신사냥이라.”
이세라. 왜 잠잠하다 싶더니, 역시 다른 꿍꿍이를 숨겨놨다.
‘내가 먼저 찾아야겠군.’
그리고 놈의 목적을 알게 된 이상 먼저 용신을 찾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침 용신을 찾을 방법에 대해서도 예상되는 게 있었으니.
‘메인퀘스트를 마저 밀 때가 됐다.’
메인 퀘스트 10에 다다르면, 광룡 아인하사르를 만나게 된다.
광룡 아인하사르가 바로 용신으로 통하는 창구가 되어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만찬을 즐길 시간이었다.
꿀꺽!
꿀꺽!
나는 천천히 유니온의 경험치가 든 물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가 10% 상승합니다.》
······ 잠깐. 10%?
마신 직후 다시 한 번 놀랐다.
하나에 무려 10%라니.
············ 대체 몇 레벨 수준의 경험치가 담겨있는 거지?
심지어 이거 하나가 전부가 아니다.
헬이 가져온 건 두 개.
또한,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을 유니온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투신의 탑
2차 침공이 시작된 이후.
‘플레이어 톡’은 더없이 활성화되는 중이었다.
-지금 공격당하는 곳 있냐?
-너무 고요한데?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음
-초반에만 공격해오고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는 중
즉각적인 정보의 교환을 위해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들.
하지만 모든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라는 것이었다.
침략이 시작된 직후 약간의 소란은 있었을지언정, 본격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침략해온 건데?
-마계의 지옥 순서 아님?
-1차 침략이 아흐람이었잖아
-대원정 참가해본 사람은 알겠네, 그럼
-거의 다 1차 침략 때 도망쳐서······.
아흐람과 그가 이끄는 지옥의 망자들.
그리고 첫 번째 지옥인 ‘망자의 늪’ 자체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게 한, 둘이 아니다.
마계의 지옥이 몇 번까지 있는지, 그 지옥의 군주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한정적이었다.
-초열지옥. 아마도 이세라일듯
-이세라?
-불사신이야. 숨겨진 약점을 찾지 못하면 영원히 못 죽임
-약점 찾아내는 데 한 사흘 걸렸던 거 같은데
-아 PTSD 온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나마 2차 지옥인 초열지옥까지는 꽤 많은 사람이 경험한 상태.
문제는 그 끔찍한 난이도 덕분에 더 많은 사망자와 포기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세라의 약점을 찾는 데에만 무려 4일이 소요됐다.
앞에서 빌헬름과 기사들이, 뒤에서 사제들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그사이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럼 이번에도 똑같겠네?
-다르지. 앞에서 버텨줄 빌헬름이 없잖아
-ㄹㅇ빌헬름 아니었으면 이세라 약점 못 찾았을걸
-약점이 뭐였는데?
-버프시간
-버프시간······?
-내가 받는 모든 버프가 5초 아래로 남았을 때 공격해야 통함
-뭐야 그게?
그래서 사흘이나 걸렸다.
사제들의 축복으로 인해, 버프가 끊이질 않았다.
수많은 버프로 둘둘 겹쳐진 상황에서 ‘모든 버프가 5초 아래로 남았을 때 공격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탓이다.
그 약점을 찾기까지가 너무나도 강행군이었기에 경험한 사람들은 진절머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똑같을까?
-아니. 이세라는 자기 약점을 자기가 설정할 수 있음
-와 그럼 어떻게 찾냐
-빌헬름을 조종한 게 팬텀이니까 팬텀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란돌프? 란돌프 성장세가 미치긴 했어도 빌헬름 수준까지 가려면 멀었음
-하긴, 빌헬름이나 되니까 앞에서 탱킹했던 거지
-그런데 왜 잠잠한 거지?
-이세라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라 긴장 풀면 안 됨
아무리 세상이 고요해도 침략이 시작됐다.
모든 플레이어는 이미 초긴장상태였다.
특히 이세라를 아는 사람들은 더더욱.
-방금 ‘8영웅회’가 이세라 공략을 천명했음
-갑자기? 걔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되나?
-전세계의 연합을 하나로 모으겠다는데. 참가할 사람 있음?
-아니, 공식계정에 영상 올린 거 봐봐. 대박임
-··· 미친.
-내가 본 게 진짜냐?
-다크스타가 3성 초월자?
8영웅희의 공식 SNS 계정에 ‘다크스타’가 등장했다.
그는 영웅회의 공식입장을 발표함과 동시에, 자신이 ‘3성의 초월자’임을 증명하는 영상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었다.
바로 그라시아와의 대련영상.
······ 다크스타가 그라시아와 맞수를 이루고 있는 영상이었다.
-다크스타가 그라시아랑 동급이라고?
-영상 주작 아님?
-사왕한테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던 게 엊그제인데?
-다크스타만이 아니라 다른 영웅회의 영웅들도 한단계씩 더 초월했다 함
-단체로 별을 먹었다고? 설마 마스터 별임?
-몰라. 게다가 연합에 참가하고 성과를 내면 ‘별’과 판게니아의 ‘도시’를 내어주겠다는 피셜이 있음
-··· 무슨 별이 복사가 되냐? 마구 뿌리게?
영상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시아는 다른 영웅회의 영웅들과는 격이 다른 최강자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니까.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한참 아래로 취급받던 다크스타와 쌍벽의 대결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간간이 밀리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식계정으로 올린 눈앞의 영상이 조작된 것일 리는 없었다.
-그라시아가 거품이었던 거 아니냐?
-실력에 비해 너무 과대포장 되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진짜로 다크스타가 3성 초월자가 된 거라고?
-몇번을 봐도 믿기지가 않네
해당 영상은 순식간에 1억 뷰를 넘겼다.
그라시아와 다크스타가 맞수라니!
이는 곧 영웅회의 입지가 다시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라시아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더 있다면, 당연히 믿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궁금해서라도 연합에 대거 참가하겠군
-저 정도면 이세라 공략도 해볼만 하겠는데?
-란돌프는? 어디서 뭐함?
-어딘가에서 또 이상한 짓 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2차 침략인데 여기 지키고 있겠지
-맞아. 아무리 그래도 판게니아보다 지구가 훨씬 중요할텐데
-그럼 란돌프도 연합에 참가하는 건가?
-본인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침략 저지하는 거면 그게 훨씬 가능성 있을 듯?
-나도 연합에 몰래 참가한다에 한표
-두표
-세표
······.
*
《메인 퀘스트 9 - ‘투신의 탑 오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투신의 탑에서 경쟁하며 점수를 획득하세요!》
《점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지급됩니다.》
투신의 탑.
강자들과 힘을 겨루며 올라가는 형식의 탑이다.
‘메인퀘스트 3 - 탑 오르기’를 진행할 때 가장 먼저 사람들이 떠올리는 탑 중 하나이기도 한 이곳을 지금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용신을 찾기 위해선 먼저 메인 퀘스트를 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메인 퀘스트 8 ‘오염원 정화하기’까지만 밀어놓은 상태였으니.
‘최소 14일간 이세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지금 내가 판게니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다.
이세라가 ‘용신 사냥’을 완료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놈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놈을 잘 안다.
이건 단순히 4일간 약점을 찾고자 붙어봐서가 아니다.
대원정 전부터 나는 이세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계로 들어가기 전, 지옥의 군주들에 대한 조사는 필수적이었으므로.
‘이세라는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놈이니까.’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메인 퀘스트 9를 밀어야만 했다.
적어도 14일 내로는 말이다.
“줄 서세요!”
“오늘 일반 관람표는 매진됐습니다!”
“암표 팝니다.”
투신의 탑 근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의 대결은 판게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거리 중 하나였으므로.
관람을 위해 판게니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투신의 탑으로 모여들곤 했다.
“······ 저도 함께 올라야 합니까?”
엘프 아우릴.
그녀가 찝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엘프인 그녀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
하물며 투신의 탑을 오르며 구경거리가 된다는 생각에 입장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너도 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얄짤없이 말했다.
나 혼자 탑을 오르면 너무 눈에 띈다.
아우릴을 통해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 이런 걸 쓰고 말입니까?”
“왜? 생긴 게 별론가?”
“토끼 가면······.”
얼굴을 가리고자 미리 준비해온 가면을 보곤 아우릴이 더욱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뚝 솟은 귀와 토끼의 형상을 한 가면.
하지만 ‘투신의 탑’은 콘셉트 또한 중요한 장소다.
단순 대결만이 아닌, ‘관람객의 인기’도 점수에 포함되는 탓이다.
더 높은 곳에 빠르게 오르기 위해선 확실한 콘셉트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물은 뭡니까?”
아우릴이 나를 바라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는 내가 쓴 탈을 보면서.
“펭귄이다.”
“예?”
“황제펭귄이다. 너는 모를 수도 있겠군.”
따듯한 숲에서만 살던 아우릴이라면 당연히 모르는 동물일 터.
아응 황제펭귄의 탈을 쓰고, 바바리안마냥 웃통을 벗었다.
야만펭귄 전사의 콘셉트.
절대로 이곳에서 겹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코스튬이었다.
가장 빠르게 인기를 얻고 탑을 오르기 위한 수.
“이것도 입어라.”
“이건······.”
내가 건넨 옷을 보며 아우릴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버렸다.
몸을 부르르 떨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것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듯싶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나는 아우릴을 향해 담담하게 현실을 인식시켜주었다.
“바니걸이다.”
“·········.”
*
탑의 관리자 ‘산샤’는 쥐어진 서류 더미를 살피며 혀를 차고 말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신인이 하나도 없군.”
“그래도 테스트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류를 건넨 남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보나 마나다. 관객들의 눈살만 찌푸릴 형편없는 놈들뿐이야.”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전원 탈락 처리할까요?”
투신의 탑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많다.
이곳은 금은보화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니까.
하루에도 수십 명의 지원자가 찾아오는 현황.
하지만 투신의 탑을 오르기 위해선 산샤의 허가가 필수적이었다.
산샤는 벌써 20년 넘게 탑을 관리한 자.
서류에 적힌 내용만 봐도 이놈이 진짜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었다.
‘웃기는 놈들이 몇 있기는 한데.’
다만, 그냥 탈락시키기엔 유별난 자들이 몇 있었다.
하여 산샤는 전원 탈락에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흐음. 이벤트 형식으로 진행하지.”
“이벤트 형식이라 하시면?”
“이번 신인들을 전부 ‘오우거’와 대결시킨다.”
“······ 그러다간 다 죽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전에 고지는 해야겠지. 죽을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