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라가 이맛살을 구긴 채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침음하고 말았다.
“······ 누님.”
데려온 하위 마족 중 하나.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세라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또 마왕님 몰래 나오셨습니까?”
“나온 건 아니다. 내 본체는 어디까지나 마계에 있으니.”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회피한 존재.
바로 이세라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일곱 번째 지옥을 담당하는 지옥군주였다.
“마왕님께서 아시면······.”
“그런다고 놈이 나를 나무라겠느냐?”
“놈이라니요. 불충한 발언입니다.”
“하하, 이세라. 너는 여전히 모범적이로구나.”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이세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새로 얻은 몸을 실험한다고 바쁜 녀석이다. 나를 신경쓸 틈이나 있을까?”
“··· 누님. 저는 괜찮지만 제발 다른 군주들 앞에선 자중하십시오.”
“나보다 약한놈들 앞에서 말이냐?”
이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소불위의 강자.
다른 군주들도 한 수 접어주는 존재였으니.
심지어 그 ‘마왕’조차도 말이다.
당연히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나저나, 묘한 녀석을 하나 데려왔더구나.”
“유니온 말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
인간이지만, 묘한 녀석이었다.
“도움이 될겁니다. 녀석이 들고 있는 ‘인벤토리’에는 신기한 게 많습니다.”
“너무 가까이하진 말거라. 옛적부터 제국의 인간치고 멀쩡한 인간이 없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이세라가 고개를 숙였다.
콧대 높은 그가 고개를 숙이는 건 딱 두 명밖에 없었다.
마왕과 그의 혈육인 누님 외엔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는다.
피식 웃은 그녀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지구. 푸른 행성.
문명의 수준은 확실히 판게니아보다도 앞서가는 세계.
“··· 누님. 그런데 이곳엔 왜 나타나신 겁니까? 혹시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나의 피를 나눈 너다. 못 미더울 리가 있겠느냐?”
“그럼?”
“그냥 궁금해서 말이다.”
“무엇이 말입니까?”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그녀가 궁금증을 느끼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녀가 궁금해할만한 게 이곳 지구에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이었다.
하여 묻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유일하게 나를 죽인 인간이 이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 빌헬름은 죽었습니다.”
그 괴물 같던 빌헬름도 마왕에게 죽었다.
그 괴물의 육체는 마왕이 빼앗았으니, 남아있는 흔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곱 번째 지옥의 군주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빌헬름을 움직인 진짜 본체. 그 본체가 나는 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죽이지 못한 나를 죽인 유일한 남자를 말이다.”
용신
영국 왕실.
엘리자베스 3세의 서거 이후 영국은 여전히 혼란 속이었다.
흔들리는 국내 정세와 정체 모를 괴물들의 침략으로부터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가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정통의 후계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며, 왕실 권력에 빈틈이 생긴 것도 이 현상에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왕정은 물러가라!”
“절대 왕정 타도!”
궁전의 앞에 모인 수많은 시민.
그들은 입 모아 왕정의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흰색의 차 한 대가 들어섰다.
“······ 오늘 꼭 참석하셔야겠습니까? 올리버 님. 시국이 좋지 않습니다.”
집사 멜슨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올리버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비춰야지요. 다 제가 죽은 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도 정통한 계승권자입니다. 순위는 좀 낮지만.”
집사 멜슨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섬에 숨어서만 살던 올리버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세상으로 나온 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게 하필 왕정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순위가 높은 계승권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는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암살.’
누군가가 고의로 죽이고 있는 게다.
현재 영국 왕실은 세 개의 파벌이 서로를 견제 중이었으니, 올리버가 참전한다면 고래 등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또한, 멀쩡히 혈연들도 살아있는 상황에서 올리버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결코 좋은 모습으로 비치진 않을 것이다.
‘더 숨어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올리버는 당당히 어깨를 폈다.
물론 멜슨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판게니아에서 허드슨으로의 삶이 그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
비록 결혼식은 미뤄졌지만, 덕분에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세렝게티에게 당당하기 위해선 지구에서의 자신 역시도 당당해야 한다고.
‘내가 힘이 있어야 란돌프 님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양쪽 모두의 세계가 위협받는 상황.
힘의 균형을 맞춰놓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올리버는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우.
직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대책 회의가 진행 중일 터인 궁의 안으로 발을 옮겼다.
*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배.
마족의 군단장과 그를 보필하는 고위 마족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유니온은 참석했다.
“인간이 이 자리에?”
“아무리 군단장님의 뜻이라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
“······ 우리와 함께하기엔 격이 부족한 듯한데.”
고위마족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세라의 뜻이라고는 하나, 인간이 이 중요한 자리까지 함께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애초에 그들과 비교해도 유니온의 격은 한참이나 낮았다.
‘멍청한 놈들. 내가 레벨을 고의로 낮추고 있다는 것도 모르다니.’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이세라만 알았다.
이세라는 자신을 본 즉시 유니온이 일부러 ‘레벨 다운’을 해놨다는 걸 알아봤다.
유니온은 물약에 자신의 경험치 다수를 담아두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이는 허락받지 않은 인간인 그가 차원을 넘기 위한 방법이었다.
-캬······.
‘···나오면 안 된다.’
유니온은 다급히 튀어나온 헬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는 사이, 군단장 이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모였군.”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성을 맹세한 유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히 헬을 숨긴 채로 어색하게 무릎을 꿇은 유니온이 슬쩍 고개를 들어 이세라를 바라봤다.
‘옆에 있는 건 누구지?’
그런데 못 보던 이가 이세라의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고위 마족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한 번 본 건 절대로 잊지 않는 대마법사.
그렇다는 건 고위 마족이 아니라는 뜻인데.
‘수백만의 마족을 이끄는 군단장 이세라와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자. 그런 자는 같은 지옥의 군주들 뿐일진대.’
저 오만한 표정.
이세라 앞에서 일개 마족 따위가 저랬다간 바로 소멸당할 것이다.
자신이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게 있다는 사실에 유니온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더욱이 놀라운 건 다른 마족들은 별반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신에겐 인간이라는 이유로 온갖 말들을 일삼던 마족들이, 이세라의 옆에 선 하위 마족에게만은 아무런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다른 마족들은 알고 있는 건가? 저자가 누구인지?’
대체 누굴까.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이세라가 말했다.
“침공이 시작됐으나 본격적인 침략을 하지 않는 것을 모두 궁금해하고 있을 것으로 안다.”
맞다.
유니온이야 나타나자마자 메테오부터 갈겼지만, 그건 그가 마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족들은 이세라의 명령 없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숨죽인채 바라보자 이세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본래 이세계의 침략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첫 번째 침공을 계획한 망자왕 아흐람이 했어야할 일이지.”
첫 번째 지옥의 군주.
망자왕 아흐람.
하지만 그는 침략조차 제대로 못 하고선 스러졌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멍청한 아흐람은 그 선행된 일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어딘가에서 혼자 자멸해버렸다. 그로 인해 내가 해야할 숙제가 되어버렸지.”
아흐람의 자멸은 마계에서도 난리가 난 사건이다.
침략을 해야할 아흐람이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는 대형사건.
분명한 건 침략 전에 모습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이끄는 대규모의 군단과 함께 말이다.
“그 숙제가 무엇입니까, 군단장님?”
측근의 마족이 묻자 이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 수호자’의 사냥이다.”
“균열 수호자라 하시면······ ‘용신’ 말입니까?”
“잘 알고있군.”
균열 수호자.
세계의 균열을 지키는 자를 일컫는 말.
그들을 용신이라 부르며, 사냥한다 이야기하는 중이다.
처음 듣는 행보였기에 유니온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곳 ‘지구’의 ‘용신’은 현재 꽁꽁 숨어있는 중이다. 하나인지 다수인지 파악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다 멍청한 아흐람 때문이다.”
멍청한 아흐람.
진심을 담아서 다시 말했다.
아무 것도 못한 채로 사라졌으니, 그야 욕을 먹을 만도 하다.
허나 아흐람에 대한 이세라의 혐오는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듯이.
“허나 ‘용신’을 유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니온, 그대의 일인즉.”
“제가······ 해야할 일이 있습니까?”
불현듯 호출되자 유니온이 긴장한 채 물었다.
용신의 유도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설마 이런 경우까지 예상해서 자신을 받아준 건가?
그렇다면 이세라······ 보통 놈이 아니다.
하물며 이 자리에서 명한다면, 목숨을 다해 따라야하는 것이다.
이세라가 입을 열었다.
“감춰둔 힘을 해방하거라. 균형이 깨지면 수호자는 자연히 나타날 거다.”
“······.”
아.
유니온이 내심 경악했다.
경험치 물약을 먹고 레벨을 수복하라는 의미였다.
애초에 물약으로 경험치를 숨길 수 있는 능력은 자신 외엔 없었다.
그걸 한눈에 꿰뚫어보고 이 침략에 가담시킨 것이다.
단번에 힘을 수복하면 균형 수호자들이 움직일 테고, 그때 이세라가 직접 사냥할 작정으로.
실로 치밀하고 무서운 자였다.
난데없이 출현한 자신마저도 이용할 계획을 그때 바로 세웠다는 것 아닌가.
“······ 시간이 필요합니다, 군단장이시여.”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다.
“얼마나 필요하지?”
“한꺼번에 힘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 한 달은 걸립니다.”
“흠. 한 달이라.”
물약에 경험치를 담아놨다는 걸 이세라는 모른다.
모르니, 변명을 만들 수 있다.
“이주 주마. 그 안에 회복하지 않으면 실망이 클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단장님.”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주. 겨우 14일의 시간.
‘그 안에 내가 원했던 목표를 먼저 이뤄야겠군.’
유니온에겐 원대한 목표가 있다.
이 지구에서 해야할 일이 있었다.
자신을 조종한 죄인을 찾아 직접 복수하는 게 첫 번째이고, 특별한 ‘원형의 클래스’를 찾는 게 두 번째였다.
그러기 위해 14일은 무척이나 부족한 시간이지만.
‘······ 날 왜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이세라의 옆에 있는 마족.
그 마족이, 자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비웃고, 모멸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
《첫 번째 여왕의 이름이 ‘하나’로 결정되었습니다.》
《여왕이 자신의 이름에 흡족해합니다.》
《여왕이 산란을 시작합니다.》
《알을 낳기 위해선 왕의 ‘혈액’이 1% 필요합니다.》
《Tip : ‘자연재생력’을 늘리면 혈액의 생성이 빨라집니다.》
《Tip : ‘하나 여왕’이 낳은 마혈종의 최소 레벨은 6입니다.》
《Tip : 여왕의 특성에 따라 희박한 확률로 특수한 개체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알 하나에 피 1%.
그러나 인간은 잔존 혈액의 30%가 빠져나가면 죽는다.
‘자연재생력.’
여기서 도움이 되는 게 바로 자연재생력이다.
혈액의 수급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는 건 자연재생력뿐이었다.
‘현재 내 자연재생력은 1,300%가량.’
대략 열세 배에 달하는 수급률.
하루에 30개의 알을 만들 수 있다치면, 390개를 산란하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기껏해야 400개 안팎. 최대 천 개에는 못 이르는군.’
여왕의 산란기능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자연재생능력을 3,300% 부근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자연재생력은 쉽게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로보로스의 낙인으로 천 프로 올린 게 거의 전부이니.’
나머지는 바알 세트가 약간의 도움을 줬을 따름이다.
이처럼, 재연재생력을 올려주는 무구는 보통 신화등급 이상의 것들이었다.
‘진조 세트를 구해야 되나?’
진조(真祖)의 세트 무구.
자연재생력을 파급적으로 올려주는 장비들 중 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
하지만 진조 세트를 구한다 해도 3,300%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턱을 쓸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세라 공략은 이만하면 됐다. 자연재생력에 너무 매진할 필요는 없지.’
더 매몰되는 건 주객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