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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60화 (160/317)

인간 따위에게 엘프가 고개를 숙이다니! 

그것도 엘프의 장로나 되는 이가. 

하지만 아루웬은 엘프들의 반응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경건한 표정으로 말할 따름이었다. 

“부디 아우릴의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래만 주신다면 제 목이라도 내놓겠습니다, 드루이드님.” 

“······!” 

“······ 드루이드?!”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드루이드라니! 

그들은 자연계열의 최상위 종족이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전설 속의 존재들 아닌가! 

“흠.” 

아루웬의 말에 남자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남자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루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제야 아루웬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남자는 일반적인 드루이드가 아니다. 

남자가 보인 기적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혹시······ 하이 드루이드이십니까?” 

하이 드루이드! 

드루이드들을 이끄는 수장. 

그 역시 ‘멸망’과 맞서며 스러졌다 알려져 있었다. 

대자연을 다루며 만물과 공존하는 자연 그 자체가 바로 하이 드루이드였다. 

눈앞의 남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먼 옛적 사라진 하이 드루이드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의 눈이 남자의 입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아······!!” 

아루웬이 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드루이드. 그중에서도 하이 드루이드라면, 지금의 실수는 단순히 자신 하나의 목으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이 드루이드라면 저런 거대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자연을 넘어 만물에 간섭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게 하이 드루이드였으므로. 

감히 말하건대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대자연만큼이나 욕망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목을 내놓겠다고?” 

“원하신다면······!” 

아루웬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드루이드라면 세계수와도 통할 수 있는 자. 

어쩌면, 지금 말라가고 있는 세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 하나쯤이야 기꺼이 내놓으리라. 

“자, 장로님!” 

아우릴 역시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저지른 실수입니다. 목을 내놔도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아우릴. 제대로 말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장로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세요!” 

아우릴 역시도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데드를 보고 달려 나간 자신의 죄가 맞았으니까. 

이런 다혈질적인 성격 탓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잎의 성장이 늦은 것도 있었다. 

“부디 장로님 말고 제 목을······!”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같이 온 엘프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목을 자르라며 앞다퉈 나섰다. 

진귀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평생 보기도 힘든 엘프들이, 하나같이 인간의 앞에서 용서를 빌고 있었으니까. 

‘어찌한다.’ 

······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나는 턱을 쓸며 고민했다. 

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내가 가진 히든 특성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이들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곤 장로가 직접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앤드류가 목놓아 이름 불렀던 장로의 목을 진짜로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보단 실리를 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나는 ‘겨울’을 들어, 아우릴의 목에 갖다 대었다. 

“자비를 보여 실수를 저지른 자만 단죄할 것이다. 너의 목을, 생명을 내놓도록.” 

“기꺼이······!” 

아우릴이 몸을 떨며 수긍했다. 

이 참사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상대가 하이 드루이드라면, 자연계열 최상위의 존재다. 

자연에 속한 자라면 그저 따라야 하는 지도자. 

아우릴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데 이어진 남자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생명을 내놓겠다 했으니, 내 노예가 되어라.” 

“············?”

최종 콘텐츠

‘노예?’ 

아우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귀가 좋은 엘프의 특성상 잘못 들을 리가 없다는 사실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노예라니. 

종. 소유물. 모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물건과도 같은 신세. 

차라리 죽을지언정 인간의 노예로 부려질 순 없는 노릇이건만. 

특히나 아우릴은 엘프로서의 긍지가 하늘까지 닿아있었다. 

상대가 하이 드루이드라도 마찬가지다. 

그냥 따르는 것과, 노예가 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기에. 

“······ 예. 그걸로 노여움이 풀리신다면.” 

“자, 장로님······?!” 

하지만 대답은 아우릴이 아닌 아루웬 장로에게서 나왔다. 

‘아우릴. 고개를 끄덕이세요.’ 

게다가 저 눈빛. 

노예가 되어서라도 목숨만은 부지하라는 뜻이다. 

아우릴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루웬 장로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승낙하지 않으면 장로님의 목부터 날아갈 지경이다. 

다 같이 죽느냐, 저 남자의 노예가 되느냐. 

아우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되······ 되겠습니다······.” 

“무엇이 되겠다는 거죠?” 

확인사살과 다를 바 없는 말. 

아우릴은 아루웬 장로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어찌 됐든 다짜고짜 검을 들이민 건 자신이었으니. 

“노······ 예가······ 흑!” 

엘프는 희귀한 종족이다. 

워낙에 폐쇄적인 탓에 알려진 것도 거의 없거니와, 그들이 ‘세계수’와 소통하는 방식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애당초 세계수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므로. 

‘세계수는 천공에 떠오른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세계수가 세계의 근원이 되는 기물 중 하나라는 걸. 

심연에 가라앉았던 대륙을 떠올리고 연결하게 한 건 두 여신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륙이 유지될 리가 없다. 

세계수는 떠오른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 중 하나. 

‘그러니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들은 대륙을 지탱하고 있다 봐도 무방하지.’ 

이것도 빌헬름을 플레이할 때 종장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종장에 가서야 알게 됐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엘프는 최종 콘텐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엘프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이유다. 

최대한 우호적으로, 아우릴을 노예로 부리며 비밀을 파헤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리라.

최종 콘텐츠. 

내가 아직 겪지 못한, 혹은 업데이트되지 않은 뒤의 이야기. 

빌헬름이 죽은 뒤 ‘멈춰있던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게 나는 이 업데이트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빌헬름이라는 마지막 게이머의 캐릭터가 죽으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콘텐츠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게이머일 시절 보았던 동시접속자의 숫자는 항상 0 아니면 1이었다. 

내가 접속할 때는 1을 유지했으나, 이는 사실 모든 게이머가 플레이어가 되어있던 것이다. 

이게 업데이트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마왕을 죽였으나 결국 죽이지 못한 것처럼, 게이머의 캐릭터 자체에 락을 걸어 모두가 플레이어가 됐을 때 업데이트가 진행되도록 하지 않았을는지. 

‘내가 예상보다 오랫동안 빌헬름으로 플레이한 탓에, 업데이트가 늦어졌다······.’ 

그야말로 없데이트였다.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콘텐츠도 나온 게 없었다. 

하지만 내가 플레이어가 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마침내 모든 게이머가 플레이어로 각성하며 ‘시작’된 것이다. 

‘멸천자도, 균열의 탑도 본래는 없던 것이었으니까.’ 

없던 게 생기고, 존재하지 않던 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레벨의 제한이 확대되고 더욱 강력한 자들이 출현하는 중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빌헬름의 죽음이 업데이트의 방아쇠가 되었다는 말 아니겠는가? 

하물며. 

‘태초의 숲과 엘프는 그간 스토리상으로만 존재하되,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너무나도 이상하다. 

오랜 시간 플레이하면서도 엘프는 본 적이 없다. 

태초의 숲에 들어갔다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연결된 워프도 없어.’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라면 최소 3개의 워프가 이어져 있고, 어딘가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아무리 세계수가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라지만 위의 ‘규칙’은 천공의 대륙이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그런데 종장에 가서나 겨우 언급될 정도였다. 

그것도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이지, 엘프나 태초의 숲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물론 내가 모르는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여신의 지도에도 연결된 워프가 없었지.’ 

나는 모든 도시의 이름과 워프 연결지점을 알고 있다. 

일명 ‘여신의 지도’라 칭해지는 아이템을 갖고 있었으니. 

존재하는 모든 도시와 워프를 볼 수 있는 그 지도상엔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의 지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 이번에 새로 업데이트 된 거다.’ 

그러니 만약에, ‘업데이트’ 된 것이라면? 

정말로 최종 콘텐츠와 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내가 먼저 먹어야지.’ 

선점해야 한다. 

반드시.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일 수도 있었다. 

“······ 하이 드루이드시여. 저희와 함께 ‘균열의 탑’을 오르지 않으시겠습니까?” 

성의 내부. 

손님을 맞이하는 화려한 방 안에 앉아, 아루웬 장로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찾은 용건이 아무래도 ‘균열의 탑’과 관계된 모양. 

나는 상석에 앉은 채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균열의 탑을 함께 올라야 하는 이유가 내게 있나?” 

“저희가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된다? 글쎄, 내 옆으로 오지도 못하는 것들이 말이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루웬 장로는 겨우 인내하고 있지만, 다른 엘프들은 저 멀리 떨어져서 겨우 나를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는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2층을 클리어하겠나. 

1층도 정말 버그 수준의 플레이로 겨우 클리어한 건데 말이다. 

영원군주의 심장과 면죄부 무한 복사가 없었다면 클리어는 꿈도 못 꿨을 터. 

후룩.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로, 잔을 들어 밀크티를 마셨다. 

그러자 아루웬이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 저희 엘프는 ‘욕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이 드루이드님의 ‘욕망’이 너무나도 거대해 쉽게 다가가지 못할 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욕망. 욕망이라. 

그러나 내가 가진 욕망이 다른 사람에 비해 비대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저들이 대체 내게서 무엇을 본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단순히 욕망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시간을 투자해라? 리스크가 너무 크군. 내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어.” 

균열의 탑 2층은 고작 60일 이후 열린다. 

그 시간까지 적응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놈들과 함께하라는 건 시간 낭비일 따름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원하냐고? 

그야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 지점들.” 

“······ 예?” 

“말해봐라. 태초의 숲은 어느 도시와 연결되어있나?” 

내 물음에 아루웬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허나, 이 지점만 확인하면 모든 게 확실해질 것이다. 

폐쇄적인 엘프들이 워프 지점을 더 늘릴 리는 없을 테니. 

“그, 그건 말할 수······.” 

“없다? 그럼 이 거래도 없던 걸로 하지.” 

강하게 나갔다. 

균열의 탑을 클리어하자마자 바스락 숲을 찾고,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급한 건 엘프 쪽이었다. 

아니면 균열의 탑이 엘프들과 연결되는 콘텐츠의 시작점일 수도 있고. 

하여간 당장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다. 

아루웬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알테미아··· 입니다.” 

“알테미아?” 

“······ 예.” 

“흠.” 

잔을 내려놓고, 턱을 쓸었다. 

이건 또 예상 외였다. 

왜냐하면 ‘알테미아’라는 도시명을 처음 들어보는 탓이다. 

‘이것도 신규 도시인가 보군.’ 

아직 등장하지 않은 땅. 

역시 엘프는 새로운 콘텐츠들과 연관이 있나 보다. 

내가 몰랐던 이름을 속속 말하는 걸 보면. 

“그리고? 알테미아 하나뿐이 아닐 텐데?” 

“··· 발망산, 팔란티어.” 

반쯤 포기한 듯 아루웬이 연거푸 이름을 꺼냈다. 

그나마 이중 하나는 귀에 익다. 

‘발망산!’ 

그곳은 내가 아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발망산은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 지점이 없었다. 

없는 게 생겨났다. 

이제는 확신이 든다. 

‘··· 신규 콘텐츠가 업데이트 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그간 밀렸던 일정이, 마치 장맛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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