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화. 제법 흥미로웠지.’
마스터의 거인화는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
이 물약으로 거인화를 하거나, 혹은 제조한 알케미스트를 알아낼 수 있다면 본전 이상의 값어치는 보장된 셈.
‘염원구슬은 랭커의 필수템 중 하나다.’
또한, 염원구슬은 랭커라면 하나씩은 갖춰야 할 도구였다.
하물며 ‘용신’이라 이름 붙은 염원구슬.
닳고 닳았긴 했지만 충전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다방면으로 유용할 터.
‘미친 발톱자국의 핵. 히드라곤을 특수하게 진화시키는 핵.’
이동수단인 히드라곤도 슬슬 챙겨줄 때가 됐다.
내가 강해지는 것만큼이나 히드라곤 역시 강화되어야 더 고레벨의 사냥터에서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니.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앤드류의 딸 안다사르에겐 결국 이게 필요하다.’
앤드류가 탑을 오른 이유.
그가 없었다면, 군주 솔바렌의 공략은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그는 계시를 읽었고 덕분에 레이드를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탑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를 나는 이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왕에 의해 듀라한이 된 앤드류의 딸 안다사르는, 현재 무척이나 불안정한 상태.
그녀를 안정화시키려면 결국 다시 이 흑마법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다. 다시 흑마법서에 사로잡히진 않을 거야.’
무한정 복사되는 면죄부와 내가 가진 별의 축복이 존재하는 한, 예전처럼 흑마법서에 사로잡혀 무차별한 학살을 벌이진 않으리라.
하여튼 간에.
‘황금률 상점은 이만하면 됐다. 남은 건 SP 사용과 업적 상점인데.’
1층을 클리어하며 얻은 SP는 7만여 가량.
이걸 전부 재능에 쏟아부으면 새로 개화한 재능 하나쯤은 맥스 레벨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업적점수 3,000점 또한 ‘수호벽’의 레벨을 올리는 등 쓸 수 있는 곳은 많았다.
‘······ 생각해보니 비밀경매장에 올려둔 물건도 있었지.’
아.
워낙에 급박해 잠시 잊고 있었다.
탑을 오르기 전에 비밀 경매장에 올려둔 ‘불멸의 워프석’이 하나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안정적인 도시 재정을 위해 급전을 구할 생각으로 올려둔 그것 말이다.
《비밀경매장에 입장합니다.》
《현재 판매된 물건이 한 가지 존재합니다.》
《‘불멸의 워프석’이 ‘????’에게 500,000,000G에 판매되었습니다.》
“······?”
잠깐. 5억 골드?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금액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기껏해야 1억 골드 정도를 생각했건만.
‘아무리 희귀해도 도시당 하나밖에 설치할 수 없는 건데.’
비밀경매장에선 판매하는 아이템의 설명이나 옵션 따위를 전부 보여준다.
그것을 봤다면, 5억 골드의 값어치까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었다.
대체 누가 산 걸까?
그때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구매자’가 남겨둔 메모가 존재합니다.》
《‘불멸의 워프석’을 3개 더 구매하고 싶소. 20억 골드에. 하지만 직접 만나서 거래하고 싶군. 판매를 희망한다면 ‘아슬란 상회’에서 ‘아슬란’을 찾으시오.》
······ 아슬란 상회라.
대륙 3대 상회 중 하나다.
대륙의 경제를 휘어잡은 거대 상단이며 웬만한 왕국 뺨치는 전력을 갖춘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그곳의 아슬란이면, 당연히 상단주의 이름이고.
‘3개를 20억 골드에 사고 싶다. 직접 만나서.’
개당 5억 골드 이상을 쳐주겠다는 것이다.
20억 골드면 번성한 도시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내가 제국 경매에서 사용한 골드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의도가 걸린다.
직접 만나야 하는 이유.
······ 아슬란. 네임드 엔피시.
그는 플레이어가 확실하게 아니다.
다만, 판게니아에서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인간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아르혼 제국의 건립과도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 아슬란은 플레이어와 함께하고 있다.’
아슬란은 플레이어가 아니지만, 비밀경매장은 플레이어만 이용할 수 있다.
말인즉슨, 아슬란은 플레이어를 이용할 줄 아는 자다.
죄인이라 불리며 금기시되는 자들을 몰래 다루고 있다.
아마도 플레이어의 특혜 등을 모조리 섭렵하고 있을 터.
잠깐의 고민.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시기상조다.’
3대 상회는 아직 건드리기 위험하다.
특히 아슬란 상회의 이명 중 하나가 ‘도시 사냥꾼’이다.
거기에 플레이어까지 다룰 줄 안다면 위험도는 더 커진다.
미궁 도시가 더 번성한 뒤라면 모를까, 지금 접선하는 건 여러모로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슬란이라.
이건 쓰기에 따라 후에 좋은 카드가 하나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천천히 나머지 작업을 이행했다.
《재능 ‘진리 탐구’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히든 특성 ‘대현자’의 기능이 추가됩니다.》
《재능 ‘차원 이해력’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입장할 수 없는 곳에 입장이 가능해졌습니다.》
《펫 ‘헬’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지옥 군주 이세라.
그는 마족들과 함께 2차 침공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이세계를 침략할 워프도 완성된 상태.
멍청한 아흐람 따위 같은 실수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중이었다.
“······ 신기한 인간이로군. 너 정도의 인간이 내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때, 웬 인간 한 명이 자신을 찾아왔다.
강자. 이세라가 감탄할 정도의 고수.
하지만 인간 중에 이런 자가 있던가?
이 정도 강자라면 이름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그것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인간이다.
한데 처음 듣고, 처음 보는 이가 갑자기 이세라의 수하를 자처해온 것이다.
“나도 함께 ‘이세계’로 건너가게 해다오. 저 ‘침략의 워프’라면 가능할 테니.”
“넘어가서? 뭘 할 작정이냐?”
“복수.”
“복수?”
“죄인들을 쓸어버릴 거다.”
이세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걸 가능케 해준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바칠 거지?”
“전부!”
“영혼까지 말이냐?”
“영혼, 그 이상까지 바치마.”
“그럼 말투부터 고쳐야겠군.”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아르혼 제국의 첫 황궁마법사이자 ‘황금률의 마법사’라 불렸던 ‘유니온’이 지옥군주 이세라 님께 모든 걸 바칩니다. 부디 저의 복수를 이행케 해주십시오.”
아빠?
“······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앤드류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건넨 물건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엘드리치의 흑마법서.
과거, 그의 딸 안다사르를 ‘엘드리치’로 만든 물건이니까.
‘빌헬름 캐릭터로 직접 정화작업을 벌였지.’
판게니아를 그저 게임으로 알았을 게이머 시절.
앤드류는 훌륭한 ‘명예 작업 퀘스트’를 주는 NPC였다.
앤드류의 퀘스트를 끝없이 진행하여 호감도를 끝까지 쌓으면 ‘엘드리치 정화’의 숨겨진 퀘스트를 주었는데, 그 엘드리치가 바로 자신의 딸 안다사르였던 것이다.
여신교 정규 사제의 딸이 리치라니.
발각 즉시 파문일 정도의 대사건이다.
하여, 앤드류는 자신의 비밀을 지켜줄 명예로운 자가 필요했다.
명예를 아는 자.
명예와 관련된 모든 퀘스트를 마무리 지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임무.
‘하지만 정화작업 후 안다사르는 앤드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화된 안다사르가 향한 곳은 크람델이다.
정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언데드 상태였지만.
결국, 안다사르는 사왕에게 발견되어 듀라한이 됐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크람델에서 내가 망자왕 아흐람을 긴고아에 봉인하고, 듀라한이 된 안다사르를 앤드류의 품에 안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앤드류. 안다사르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한 걸 알고 있다. 그대가 탑을 오른 이유 역시도 이걸 구하기 위해서였겠지.”
“······.”
문제는 안다사르의 상태.
사왕에게 문제가 생겨서일까?
급격하게 안다사르의 기운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나마 남은 이지마저 잃어버린 채 평범한 언데드 괴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앤드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정말 맞는 방법일까요, 후계자님?”
“이미 한 번 겪었으니 어느 정도 내성은 있을 거다. 흑마법서에 쉽게 잡아먹히진 않겠지.”
“설혹 성공한다 한들······ 결국 다시 엘드리치가 되는 거 아닙니까?”
“앤드류. ··· 듀라한보단 엘드리치가 낫다.”
진지한 조언이었다.
목 잘린 듀라한.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만큼 지능이 낮다.
차라리 엘드리치가 되면, 높아진 지능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전부 찾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대화는 될 테니.
예전처럼 흑마법서에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나와 그대가 있지 않나. 어떤 불의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는.”
“모, 모르겠습니다. 이게 정말 딸을 위한 일인지.”
“······ 이건 딸을 위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너 자신을 위한 일이다. 앤드류.”
하지만, 정확히 짚고 가야 할 건 짚고 가야겠다.
나는 재차 앤드류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딸은 언데드가 됐다. 생명을 잃고, 죽은 상태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계속 질질 끌고 있는 건 전부 그대의 의지다. 그대의 욕심이고, 그대의 만용이다.”
인간이었던 안다사르는 이미 죽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옆에 두고자 하는 건 오직 앤드류의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앤드류.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 그, 그건······.”
앤드류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기야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것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언데드가 된 자신의 딸을 극구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곳 ‘기사의 정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다사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나를 포함한 극소수뿐.
그야 죽은 딸에 대한 미련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언데드가 된 딸을 끝내 못 놓아주고 있는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 앤드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드시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딸의 어미와 관련된. 그걸 못 전해준 채로,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상태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또 다른 이유가 확실히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안다사르는 현재 기억을 잃었다.
지금 전해줘봤자 의미가 없기에 기억을 떠올릴 때까지 옆에 두었던 게다.
내가 귀를 기울이자, 앤드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다사르의 친모는 인간이 아닙니다. ······ 엘프지요.”
“그대가 친부 아닌가?”
“예, 맞습니다.”
“그럼······ 하프엘프?”
생긴 건 영락없이 인간이었건만.
나도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태초의 숲에 기거하는 엘프들.
그들은 극단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간다.
엘프의 피가 다른 종족과 섞이는 걸 금기시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안다사르를 낳았단 말인가.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저지르는 불법 사제였군.’
······ 앤드류.
여신교의 정규 사제이자 상급 사제.
청렴하며 믿음이 강한 인간만 이룰 수 있다는 그 자리에 올라선 사람치곤 저지른 금기가 너무 많지 않나.
게다가 이제는 면죄부까지 무한으로 복사할 수 있다.
여신교 본단에서 알게 되면 경을 칠 일.
앤드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친모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게 후회되나?”
“예. 안다사르는······ 계속해서 친모를 궁금해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알려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태초의 숲으로 돌아갔으니.”
하지만 밝힐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하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태초의 숲으로 돌아간 엘프를, 어찌하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태초의 숲은 인간의 피가 섞인 하프엘프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터.
“기억만 되돌아오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 안다사르를 듀라한으로 만든 자의 상황이 불확실해졌다. 제대로 된 마력 공급이 되지 않아서 불안정해진 거다.”
“크람델의 사왕 말입니까?”
안다사르를 데려올 때 이미 전해준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죽었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직면해있는 것 같다.”
“사왕이나 되는 자가······.”
“그러니 지금 안다사르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건 엘드리치의 흑마법서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설령 그렇다 해도, 제가 어떻게 그걸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앤드류. 그대가 없었다면 어차피 탑도 클리어 못했을 거다. 게다가.”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앤드류. 그에게 족쇄를 씌우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
앤드류만이 아니다.
“안다사르는 미궁 도시의 훌륭한 수호자가 될 거다.”
“······ 예?”
“엘드리치를 이곳에 숨겨두면 안 들킬 것 같나?”
“아니······.”
“어차피 이 도시와 워프도 연결됐으니, 언제든 보러올 수 있을 터. 내가 생각해도 이만한 선택지는 없는 것 같군.”
“그게······ 예?”
*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것뿐.
《‘엘드리치의 흑마법서’가 ‘안다사르’를 잠식합니다.》
아아아아아!
조용히 죽어가던 안다사르에게 흑마법서를 쥐여 주자, 예전과 같은 잠식이 일어났다.
흑마법서가 펼쳐지며 그곳에 적힌 수많은 글자들이 안다사르에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라면 버티지 못하고 흑마법서에 완전잠식 당해야 정상일 터이나.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는 악업을 지운다.
엘드리치의 흑마법서는 강제로 잠식하는 대상자의 악업을 키워 ‘카오’ 상태로 만든 뒤 의지를 빼앗는 책.
이 역시 앤드류 사제의 면죄부 무한 복사는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면죄부의 악업 지우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안다사르’의 ‘한계저주’가 ‘별의 축복’으로 무효화됩니다.》
별의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