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투샤가 정색하자 다크엘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그렇다면 백왕 측 전력이 절반이 된 건가?”
“원래부터 주력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목표는 오직 백왕뿐.”
주력들이야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백왕이다.
백왕만 죽이면, 북부를 가진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오주력에 관해선 말할 필요가 없겠지.’
다만··· 락투샤는 오주력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토룡은 오주력이 백왕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시체 까마귀 주제에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대토룡이 자신을 흔들기 위해 지어낸 수작일 터.
“백왕 쪽이 아니라면 누굴까?”
“파티를 맺은 종족이 인간과 드라이어드라고 했다.”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로군.”
모두가 1위 파티에 대한 정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도중 락투샤가 말했다.
“60일 뒤에 2층이 열린다.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 공략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한 인원이 5명이다. 한 명이 부족하지 않나.”
“음, 한 명을 새로 구하기 전에는 도전할 수 없겠지. 그것도 반드시 ‘급’에 맞는 녀석으로 데려가야 할 텐데.”
마스터 따위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급’이 맞는 완벽한 파티를 이룰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들 전원은 히든 특성의 보유자였다.
입장 자체는 어렵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2층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개다.
5인을 이루는 파티 전원이 히든 특성을 보유할 것.
마스터가 죽어 4인이 된 이상 60일 뒤에 열린다 한들 즉시 도전할 수는 없다.
“그때쯤이면 ‘그릇’도 어느정도 안정화 되었겠지.”
“아아, 녀석을 데려가면 되겠군.”
그러나 이 또한 문제될 건 없었다.
딱 한명 기대되는 존재가 있었으니.
‘절망의 그릇. 놈을 데려가면 2층은 확실히 클리어할 수 있겠지.’
락투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망의 그릇이된 사왕을 데려간다면 2층 따윈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클리어와 동시에 주어진 미칠 듯한 보상들.
재능을 올릴 수 있는 다량의 SP와 500시간 분량의 황금률의 조각, 업적 점수와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앞선 보상들보다도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최대 레벨 2증가.’
12레벨까지 확장된 나의 레벨 한계선이다.
인간은 오직 10레벨까지만 올릴 수 있고, 그 이상의 강화를 위해선 별을 먹어 초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별을 먹지 않아도 12레벨까지 올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2성의 능력치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레벨이 정체되어 있는 자들은 신났겠군.’
별을 먹지 못하여 10레벨에 정체되어 있는 플레이어는 엄청나게 많다.
별의 개수는 정해져 있으니 조건을 만족해도 더 강해질 수 없었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11레벨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아닌 나였다.
‘······ 언제 12레벨까지 올리지?’
이제 고작 8레벨.
이걸 올리는 데에도 수많은 역경을 헤쳐왔다.
경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니 12레벨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다.
그래도 언젠가 닿을 수만 있다면······ 굴리고 있는 눈덩이는 더욱 커지 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레벨당 최대 능력치를 20% 더 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2층의 클리어 경쟁은 훨씬 더 심해질 거다.’
확실한 건 60일 뒤 열리는 균열의 탑 2층의 경쟁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온갖 종족들과 강자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격변의 시작되리라.
나 역시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휘이이잉!
그때 돌연 빛줄기가 옆으로 쏟아졌다.
시선을 돌리자, 세렝게티의 몸이 빛나고 있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세렝게티도 놀라움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쌓아둔 경험치가 터졌나 보군.’
세렝게티는 그럴 만한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오랜시간 빌헬름의 최측근으로 지내며 온갖 경험을 섭렵했다.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새로운 별이 나타나지 않은 건, 그녀에게 맞는 별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별에도 상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세렝게티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12Lv, ★】
···음?
잘못 봤나?
12레벨?
‘단번에 2레벨이 올랐다.’
······ 쌓인 경험치가 좀 많았나 보다.
그래도 이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12레벨에 도달할 만큼의 경험치가 쌓여있을 정도라면 진즉에 성각자가 나타났어야 했으니.
별의 상성을 따지는 것도 1레벨 수준이지 2레벨의 격차라면 억지로라도 맞는 별을 거머쥐어야 정상이었다.
최근들어 경험치를 축적했다면 또 모를까.
‘마왕의 저주를 겪고 경험치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쌓인 건가?’
아.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마왕의 저주. 그 저주를 버티며 막대한 경험치가 쌓인 것이다.
가파른 세렝게티의 성장에 내가 다 흐뭇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님.”
레벨을 올려 들떠하던 세렝게티가, 한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거대한 용은 왜 저기 쓰러져있는 걸까요?”
“음.”
안 그래도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다.
탑 밖으로 내보내졌다 한들, 이곳은 파티가 아니면 서로 만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멀지 않은 장소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용이 있었다.
‘대토룡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백왕 산하의 주력 중 하나, 대토룡이.
멀지않은 곳에서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
포탈을 열어 미궁 도시로 향한 뒤, 성녀 세아가 대토룡을 치료했다.
기절한 대토룡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급한 상처를 치료해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하였다.
이후 성으로 향하자, 허드슨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마중나왔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허드슨?”
“큰일났습니다.”
“큰일?”
다짜고짜 큰일이라니.
도시는 슬슬 외관이 갖춰지는 중이었다.
모든 게 성황리인 상황.
누가 공격이라도 해오는 게 아닌 이상에야 큰 일이라고 할 건 없었다.
꿀꺽!
허드슨이 침을 삼켰다.
“아이작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아이작이 돌아왔나?”
“예. 게다가 별을 먹고 초월한 상태입니다.”
······?
잠깐.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설마 별을 먹으러 간 거였나?
그런데 초월을 했다고?
‘설마······.’
그럼 설마 아이작도 이자벨라처럼 기억을 떠올린 걸까?
하지만 아이작은 이자벨라와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게임사가 게임을 관리하는지 확인하고자 아이작 캐릭터로 저지른 수많은 악업들.
그것들 전부가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하겠는가.
허드슨의 잔뜩 굳은 표정을 보건대,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아이작이 돌아왔다고 큰일이 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을 움직인 게 나라는 걸 알았다면 이보다 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란돌프 님.”
동시에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아이작.
그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현명 신상공개
무거운 목소리.
그 목소리만큼이나 잔뜩 굳어버린 표정.
하지만 눈빛에서 흐르는 분노만큼은 확실하게 읽혔다.
다짜고짜 나를 향해 쏟아내는 저 분노의 원인.
그 이유는 굳이 안 찾아봐도 훤했다.
【11Lv, ★】
······ 초월했으니까.
이자벨라처럼 초월하며 기억을 되찾은 게 분명하다.
게임의 캐릭터로 활용당하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였던 기억을.
그리하여 저질렀던 무수한 악행들을 떠올린 것이다.
아이작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 다짜고짜 왜 그랬냐고?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
단순히 육체를 빼앗긴 기억만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 알게 된 걸까?
내가 아이작을 움직였던 게이머임을 알아본 걸 수도 있었다.
초월하여 얻은 기억이 이자벨라보다 더 자세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아는지 나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무엇을 말이냐?”
하지만, 알아차렸다 한들 내가 손수 인정할 수는 없다.
인정하는 순간 그건 진실이 되고, 진실이 되면 결국 남은 건 파국뿐이었으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나 역시 단순한 게임이 아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플레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치미를 떼자 아이작의 표정이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제가 왜 이러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진짜 모르겠다.
초월하여 떠올린 기억 때문이라는 건 알겠는데.
게이머가 나라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초월한 것 때문이냐?”
하여 운을 던졌다.
그러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라를 통해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녀도, 저도, 숨겨진 기억이 존재한다는 걸······.”
“그런 것 같더군.”
“항상 궁금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란돌프 님께서 어떻게 크람델에 숨어있던 저를 찾아냈는지.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왜 굳이 저를 고용하려 한 것인지.”
굳이 찾아내려고 찾아간 건 아니지만.
······ 이건 꽤 깊다.
깊게 들어왔다.
하나에 의문이 싹트자 모든 게 의아해진 것이리라.
이자벨라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되며 나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것인지.
“란돌프 님은 처음 만남 때부터 저에 대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자벨라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성각자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진짜 성각자를 만나 보니 그 또한 거짓이었다는 게 확실해졌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이자벨라와 아이작을 만났을 때 나는 나를 성각자라 표현했다.
너희 둘에 대한 모든 걸 아는 건 내가 성각자이기 때문이라고.
너희가 숨겨둔 비밀을 알 수 있는 건 성각자라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지만, 진짜 성각자를 만나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내뱉은 말들이 거짓임이 탄로 난 게다.
“글쎄, 데미갓 특성 던전에서 사실로 판명 난 이야기 아니었나?”
데미갓 특성 던전.
그곳 진실의 방에서 우리는 진실공방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분명히 내가 성각자가 맞느냐는 물음이 나타났고, 나는 긍정했다.
곧이어 데미갓 역시 진실로 받아들였다.
“예. 그래서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란돌프 님은······ ‘성각자’의 명부에 존재하지 않더군요.”
성각자의 명부.
그런 것도 있던가?
그리고 그 명부를 아이작은 어떻게 보게 된 걸까.
“괜찮습니다. 성각자가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자벨라와 저는 같은 ‘신병’을 겪었습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저희를 고용하신 겁니까?”
신병.
이자벨라와 동명의 이름을 가진 데르시안 영애에게서 들었던 병의 이름이다.
그걸 아이작에게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대륙 전역에서 그 존재를 모르는 자가 훨씬 많은 병.
그 병을 겪은 둘을 내가 직접 고용했다.
이게 과연 우연이냐는 뜻이다.
“우연이다.”
“‘신병’에 걸린 자는 기억을 잃고 멋대로 몸을 조종당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이미 수많은 죄를 저지른 뒤였더군요. 그것도 모르고 전부 제가 한 짓인 줄 알고 그동안 얼마나······.”
“아이작.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 왜 그러셨습니까?”
아까부터 묻는다.
왜 그랬냐고.
내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묻는 건가?
자기 몸을 움직여 죄를 저지른 게 나냐고 묻는 거냐?
··· 불신의 눈초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나는 가만히 그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아이작이 이어서 감정을 담아 말했다.
“모든 걸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대체 왜······!”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이작은 내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둘이 신병을 겪은 걸 알고 있으며, 굳이 찾아가서 고용한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건 내가 게이머여서라는 답밖에 안 나온다.
죄인. 이 둘을 조종한 플레이어.
그래서 이렇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다짜고짜 검을 겨누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된 아이작의 말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왜 이자벨라를······ 데르시안 영애와 만나게 하셨습니까?”
······ 뭐?
*
데르시안 영애.
제국 경매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사신교의 간부인 걸 알곤 목숨을 구걸하고자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여 나는 그녀에게 살려주는 대신 몇 가지 요구를 했다.
데르시안 가문 내에 ‘신병’에 걸린 자에 대해 조사할 것.
이후 황금도시 아르카나에서 허드슨을 찾으라고 말이다.
‘내가 균열의 탑에 오른 사이에 데르시안 영애가 허드슨을 찾아온 것이로군.’
시기가 묘하게 갈렸다.
하필이면 내가 탑에 오르고 있는 사이에 데르시안 영애가 허드슨을 찾은 모양.
게다가 가출한 줄 알았던 아이작 역시도 비슷한 시기에 돌아온 듯싶었다.
그 과정에서 이자벨라가 데르시안 영애를 만나버린 것이다.
같은 이름과 출신성분을 가진 두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