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읏.
락투샤가 검을 들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만난 이상,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기에.
*
군주 솔바렌.
제1 영역의 주인이자 탑의 수호자인 그는, 도전자들을 절망으로 물들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무적기를 두루 갖췄기에 뚫리지 않는 철벽과도 같았으며,
타격이 쌓일수록 강해지는 성장의 특성까지 갖고 있었기에, 적어도 이 영역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시시하군.’
첫 파티의 도전.
나름 강한 놈들이었으나 제대로 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의 철벽을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일찍이 깨닫고는 빠르게 도망친 건 제법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무리하게 뚫으려고 했다면 도리어 군주 솔바렌은 강화되었을 테니.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만족시킬 자가 없는 건가?’
그는 균열 속에서 셀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군주’라 불리기까지 균열의 존재들을 수없이 상대했으며 마침내 탑에게까지 인정받은 게다.
이후 다음 도전자가 나타날 때까지 솔바렌은 다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보답이 이래서야.
너무 기대 이하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나를 약화시키는 방법까지 알려주었거늘.’
점수 총합 500점 이상일 시, 10점이 추가될 때마다 솔바렌은 1%의 전투력이 약화된다.
전투력은 곧 솔바렌의 무력과도 같았다.
솔바렌은 레벨이나 장비, 스킬 따위의 총합을 ‘전투력’으로 볼 수 있었기에.
‘차라리 첫 도전자들이 다시 도전했으면 좋겠군.’
비록 도망쳤으나, 그들의 전투력은 꽤 인상적이었다.
가장 높은 놈은 40만의 전투력을 넘겼었으니까.
다만, 솔바렌의 무적기를 해결하지 못해 후퇴했을 따름이다.
만약 놈들이 점수를 조금 높여서 재차 도전한다면 꽤 재밌을 듯했다.
‘그래봤자 내 철벽을 뚫지는 못할 테지만.’
하지만, 점수를 높이는 건 한계가 있다.
각자 주어진 레벨의 영역에서만 점수를 올릴 수 있는데, 영역보스마저 클리어하면 더 이상 점수를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방법이라면 같은 레벨 영역대의 도전자들을 죽이는 것뿐.
물론, 그리하여 도전자들을 죽인들 군주 솔바렌을 이길 순 없다.
‘자. 도전해보거라. 다음 도전자는 누구이냐?’
절망을 주는 자.
군주 솔바렌은 또 다른 도전자들에게 절망을 줄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자신을 상대하며 좌절하는 모습을 볼 생각에,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파티가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합니다.》
《파티의 점수 총합은 1,520점입니다.》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99.9% 감소합니다.》
······?
“······?”
잠시, 군주 솔바렌의 사고가 멈췄다.
1층 영역의 설정 권한은 오직 군주 솔바렌에게 있다.
레벨별로 균열시켜, 얻을 수 있는 점수 총합은 아무리 높아도 1,000점이 한계다.
군주 솔바렌이 직접 그렇게 설정해놓았다.
그것을 넘어서는 점수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1,520점이라고?’
그런데 뭐냐.
자신이 설정한 점수대를 훌쩍 넘어선 점수는?
버그인가? 잘못 본 걸까?
《점수의 총합에 따른 전투력 감소가 시작됩니다.》
《999,999의 전투력이 최소값인 1,000으로 감소합니다.》
《존재의 지탱을 위해, 크기가 줄어듭니다.》
군주 솔바렌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철갑을 두른 철벽의 군주.
우람하기 그지없던 그의 다부진 몸집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낮아진 만큼 몸을 지탱하기 위한 힘이 부족한 탓이다.
‘이건······.’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는 꿈을 꾸는 존재가 아니지만, 이건 필시 꿈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이처럼 급격한 전투력의 감소는 말이 안 된다.
저 점수는 더더욱 말이 안 됐다.
한데, 단순히 몸집만 작아진 게 아니었다.
《철갑이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철의 방패가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철의 투구가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
《‘철벽의 솔바렌’ 스킬 레벨이 급감합니다.》
《‘무적의 솔바렌’ 스킬 레벨이 급감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미친.
그야말로 모든 게 떨어지고 있다.
철갑도, 철벽도, 무적기조차도.
이후 변한 솔바렌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육신과 약점이 그대로 노출된 맨몸의 상태.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훅하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지 않은가······.
‘이건······ 무언가가 잘못됐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대체 어느 놈이 자신의 설정을 뚫어내고 이런 상황을 연출했단 말인가.
‘설마 영역에 있는 모든 도전자들을 도륙한 건가?’
5인의 파티.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다른 도전자를 전부 도륙했어도 1,520점은 말이 안 되지만, 그나마의 가능성은 그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했다면.
‘그러면 나를 죽일 수 없다.’
군주 솔바렌은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런 경우라면 자신을 죽일 수 없다.
포기하고 돌아가거든 다시 재정비하면 된다.
지이이잉.
이윽고, 그의 눈앞으로 워프가 나타났다.
군주 솔바렌은 눈을 부라렸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확인하고자.
“도전한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으음.”
가장 먼저 워프를 넘어온 건 사제다.
【31,050】
기껏해야 3만 대의 전투력.
허접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사제라서 전투 자체도 거의 불가능할 터.
어떻게 도전자들을 죽인 건지는 몰라도, 같잖다.
“형제여! 내가 왔다! 어디 갔는가?”
이후 나타난 건 드라이어드.
보아하니 하이 드라이어드인 것 같다. 그것도 신록의 축복을 받은.
【98,700】
사제에 비하면, 확실히 전투력도 높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아하다.
정말 저 조합으로 1,520점을 도달했다는 말인가?
“여긴? 아, 저 오우거처럼 생긴 놈이 솔바렌인가요? 생긴 건 정말 형편없군요.”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
【115,600】
처음으로 10만을 넘긴 강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첫 도전자의 파티보다는 훨씬 약하다.
지이이이잉.
곧이어 남은 두 개의 워프가 진동을 일으켰고.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창잡이가 나타났다.
【74,800~?】
음······?
이놈은 조금 애매하다.
특정 조건에서 더 강해지는 부류인 듯싶은데.
그래도 나타난 수치만 보자면 여전히 형편없다.
‘어이가 없군. 대체 뭐지?’
설마, 탑의 오류인가?
이 정도의 놈들이 그 점수를 획득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오류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이어,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란돌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파티의 수장인가?
군주 솔바렌이 눈에 불을 켰다.
그러자.
【217,400~?】
으음.
이놈은 조금 강했다.
확실히 다른 놈들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수장의 자격은 있는 셈.
그래봤자 첫 파티만큼은 못하지만.
그때였다.
‘뭐?’
솔바렌이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놈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숫자가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곤 전부 물음표로 대체됐다.
······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 저놈이라는 것.
“‘약점’이 노출됐대도 네놈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군주 솔바렌에 당당하게 외쳤다.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
군주 솔바렌을 죽이기 위해선, 다섯 개의 ‘약점’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약점’의 해체를 위해선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을 알아내지 못하는 이상, 설령 알아낸다 하더라도······ 놈들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그때, ‘사제’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악업’이 존재하면 공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호라.
식견이 상당한 사제인 모양이다.
그걸 보고 알아낼 줄이야.
하지만, 알아낸다 한들 ‘악업’을 지울 방법은 없다.
영역을 돌며 다른 도전자들을 살해했다면 엄청나게 높은 악업이 쌓여있을 터.
군주 솔바렌이 무적을 자처하는 이유다.
그걸 파악해냈다면 더욱 절망해라.
절대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포기해라.
군주 솔바렌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 보십시오, 후계자님. 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후아아앙!
사제의 손에서 면죄부가 무한하게 복사되기 시작했다.
정산시간
면죄부.
그것은 오직 ‘여신교’의 정규 사제만이 발급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단 3번, 악업을 일정량만큼 지워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설령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아무리 면죄부라 할지라도 다수의 죄를 모두 지워주진 못한다.
‘영역의 도전자들을 전부 도륙했다면 몇 장의 면죄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처음, 사제의 손에서 면죄부 한 장이 튀어나왔을 때, 솔바렌은 생각했다.
음. 여신교의 사제였나보군.
딱 그 정도의 감흥.
그런데 면죄부가 두 장을 넘어, 세 장에 다다르자.
‘여태껏 한 번도 면죄부를 발급해 본 적이 없는 사제인가?’
그걸 여기서 전부 사용한다고?
하지만 솔바렌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악업이 0이어야만 자신의 ‘약점’을 타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악업 0은 개인이 아니라 파티 전체를 의미한다.
저 3장으로 파티 전원의 악업을 0으로 만들 수 있을까?
휘아아앙!
‘······.’
휘아아아앙!
‘······.’
휘아아아아아아앙!!
찬란하고 거룩한 빛이 사제의 손에서 끊임없이 쏟아진다.
면죄부가 마치 복사되듯 무한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뭐냐, 저건······.’
벌써 몇 번째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균열의 첫 군주인 그조차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면죄부만 벌써 열 장이 넘어간다.
그것을 사용해 모두의 악업이 하나씩 지워지는 중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주 솔바렌의 악업마저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무조건 3장이 끝 아니었나? 교황일지라도 마찬가지일 텐데.’
균열이 흡수한 지식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다.
하여, 확신한다.
교황이라 할지라도 3장 이상의 면죄부를 만들어내진 못하리라고.
그럼 저 사제는 뭐란 말인가.
교황도 하지 못할 기적을 이뤄내고 있다.
진짜 신의 사도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건······ 이건 상정하지 못한 일이다. 할 수 없는 일이고.’
탑의 1층.
균열된 레벨의 영역.
이곳의 모든 건 군주 솔바렌이 직접 설정한 것이다.
500점에 도전할 수 있고, 10점을 더 얻을 때마다 자신의 전투력이 1%씩 깎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파티가 500점 이상을 얻으려면 같은 영역의 도전자들을 죽여서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럼 자동으로 악업이 쌓이고, 군주 솔바렌의 공략은 물거품이 되는 식이다.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탑에 갇혀있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나의 공략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또한 설정해놨으니.’
하지만, 다른 공략방법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건 모든 파티가 정확히 500점을 맞춘 뒤, 강철을 담금질하는 느낌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모든 도전자가 유대를 맺으며, 희생을 자처하며, 포기하지 않는 강철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두드리는 방법 말이다.
‘그렇게 죽는다면 기꺼이 문을 열어 주리라 생각했거늘.’
군주 솔바렌.
그는 명예롭게, ‘군주’답게 죽고 싶었기에.
······ 하지만 이런 식의 방식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상정 못 한 점수로 도전하고 면죄부를 복사해 공략하는 방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