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말하면 살려줄 거냐?”
“당연하다마다.”
“네 상태창을 본 나를 살려준다고······?”
불신의 눈초리.
상태창을 본 이상 살아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게 왜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지.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네놈 따위를 죽여서 내가 득을 볼 게 없지 않느냐?”
“상태창만이 아니다. 네 얼굴도······.”
“보았다? 확신하나? 이게 내 본모습이라고?”
“······.”
마스터가 입을 꾹 닫았다.
이미 한차례 변신을 하였으니, 지금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제국에서의 내 모습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제국에선 바바리안처럼 행동하고 있었지.’
그땐 진짜 바바리안처럼 웃통도 벗고 있었으니.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믿어도 이상할 게 없다.
무엇보다.
“그리고 네가 본 것을 말한들 누가 믿을까?”
“그건······.”
마스터가 망설였다.
당연한 것이다.
나라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8레벨에 거의 3성에 다다르는 능력치를 지녔고, 15개의 히든 특성을 지닌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꿈꿨냐며 타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팬텀.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가 아닌 자.’
게다가 나도 궁금했다.
팬텀을 사칭하며,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가 아닌 자라니.
마스터와 다른 ‘자칭 영웅’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채 이 모든 판을 짠 흑막이 있다.
대원정을 방해하고자 마왕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
‘마왕과 접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소리겠지.’
마왕은 대원정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나를 잡고자 마계의 절반을 갈어넣어 함정을 준비해놨으니까.
만약 세렝게티가 별의 권능으로 위치를 바꿔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마왕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도 잡히지 않는다.
마계에 틀어박힌 마왕과 따로 접선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지옥의 군주들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마왕은 오직 여덟지옥의 군주들만 알현할 수 있다.
다른 마족들은 감히 마왕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덟 군주가 플레이어일 리는 없고, 팬텀을 자칭하지도 않을 테니, 외부의 누군가라는 뜻일진대.
‘정말 운영자라도 되지않는 이상에야.’
그 정도로 마왕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처럼 정석으로 마계를 정벌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제국의 황제쯤이나 되면 만나줄까?
아무리 낮게 잡아도 백왕이나 흑왕급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흑막을, 마스터는 분명히 알고 있다.
“정 믿기지 않으면 계약을하지. 네가 나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하는 금제를 걸겠다. 그만하면 나도 안심이 되어서 굳이 죽이진 않을듯한데.”
“······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 기사왕 빌헬름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빌헬름······ 신의의 왕.”
“그래. 믿음과 의리빼면 시체인게 빌헬름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스터의 두 눈이 격하게 떨렸다.
빌헬름의 대서사를 안다면 믿지 않을 수 없는 유혹.
마스터는 허드슨과 비슷할 정도로 판게니아에 심취해있다. 이곳의 자신을 진정한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이.
빌헬름을 두고 본인 입으로 ‘신의의 왕’이라 떠드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네가 원하는 방식의 ‘계약’을 진행해도 좋다. 그럴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만.”
“······ ‘혼의 맹약’을 하지. 그럼 믿겠다.”
혼의 맹약?
‘겨울’로 계약을 걸 생각이었는데, 따로 생각한 게 혼의 맹약이라.
마스터가 중요한 사람들을 지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그가 끼고있는 ‘혼의 반지’를 이용해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
서로가 조건을 거는 등가교환의 계약이라 한 번 맺으면 거부할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고민 없는 모습을 보곤 마스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어 그가 터진 입술을 매만지며 피를 닦아내곤, 혼의 반지 위에 흘렸다.
“피 한방울을 이 반지 위에 뿌려라. 이후에 서로가 원하는 조건을 하나씩 말하고 악수하면 계약이 완료된다.”
손을 작게 꼬집어 상처를 낸 뒤, 거침없이 피 한방울을 반지 위에 뿌렸다.
이윽고 반지에서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게 피해를 주지 말 것. 이게 내 조건이다.”
마스터가 먼저 조건을 말했다.
정말 미치도록 살고 싶나보다.
아예 피해 자체를 주는 행동을 삼가라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면 죽기 전까지 고문했을텐데.
제법 머리를 잘 굴렸다.
하여, 나도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함구할 것.”
화르르르륵!
반지의 빛이 더욱 크게 번져나간다.
마스터가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마스터의 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혼의 맹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반지에서 쏟아진 붉은 빛이 내 전신에 스며들며 계약이 성사됐다.
자. 해달라는 건 다 해줬으니, 이제 남은 건 약속의 이행뿐이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과연 마스터는 약속을 지키려고 할까?
“······ 어느날이었다. 자신을 ‘팬텀’이라 소개하며 내게 다가온 자가 있었다.”
마스터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신의에 찬 내 모습과 거침없이 허용하는 내 행동을 보곤, 마음이 열린 건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대원정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지. 마치 메시아처럼······ 그가 말한 미래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과연.
마스터가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믿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미래를 읽는 자라······ 미래시하면 떠오르는 건 백왕이다.
하지만 백왕도 자신의 위험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느낌적으로 파악할뿐이다.
자세한 미래를 읽어내진 못했다.
“그 덕분에 나는 유적도시 룬델라의 주인이 됐다. 여러 이득도 취했지.”
“접근한 시기가 생각보다 오래전인가보군.”
“대략 1년 반 전이다. 내가 플레이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하여간에······.”
꿀꺽!
마스터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헀다.
“그는 유독 대원정을 강조했다. 절대로 참가해선 안 된다고. 빌헬름이 죽어야만 ‘멈춰있던 것’이 다시 시작된다고······.”
“멈춰있던 것?”
작게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 흑막은 빌헬름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빌헬름이 죽어야만 멈춰있던 것이 시작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게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가끔 나를 찾아왔다.”
“변신을 했다는 건가?”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변신의 수준이 아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메시지를 내게 전해왔다. 한 번은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한 번은 판게니아인의 모습으로, 한 번은 괴물의 모습으로······.”
“아예 다른 존재가 됐다? 단순한 변신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 상태창을 보는 ‘정보 공개’는 오직 플레이어에게만 걸 수 있다. 분명히 처음 봤을 땐 플레이어였는데, 이후에는 플레이어가 아니더군.”
“동일인물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동일인물이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으니.”
마스터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플레이어임을 확인했다면, 이름도 봤을 텐데?”
상태창을 확인했다면 이름을 알 것이다.
내 상태창을 보고 내가 란돌프임을 확신했 듯이.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봤다. 그때······ 상태창에 표시된 이름은······.”
마스터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
“분명히 ‘민트초코맛있어요’였다.”
“······? 민트초코?”
잠깐. 민트초코라니?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한다.
‘민트초코맛있어요’는 대표적인 은둔자였으니까.
팬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일전 ‘심연 미궁’에서 라일리에게 도전했다가 후퇴한 바가 있지 않던가.
알려진 바로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영환술사‘다.
강시를 다루는 자.
마찬가지로 다른 시체로 마스터에게 접근한 건 아닐는지.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놈은 아니지.’
그러나 죽은 강시와 살아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만큼 마스터가 멍청이는 아니다.
그럼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여러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자인건가?
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닐 때도 있었다면······.
“추측컨대······ 그는 여러 캐릭터에 빙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플레이어가 아닐 때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단순히 내 능력이 부족해서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키우던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으면, 그 캐릭터에 빙의한다.
이후 1레벨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지막으로 플레이어했던 한 캐릭터에게만 빙의할 수 있었다.
한데, 다수에 캐릭터에 빙의할 수 있는 자라.
······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상상이상으로 위험한 놈이다.
캐릭터가 죽으면 현실의 몸도 죽는 패널티가 놈에겐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또, 그는 이 ‘탑’에 대해서도 말했다.”
“균열의 탑에 대해서?”
“정확히 이름을 지칭하진 않았지만, 아마 맞을 거다. 빌헬름이 죽고나면 ‘탑’이 솟아오를 거라고 했으니까. 또 그 탑의 꼭대기에 ‘천상계’가 존재한다고 했지.”
천상계.
설마 천상인이 사는 장소를 말하는 건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내용이었다.
마스터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심연과 반대되는 곳. 천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 엄청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흑왕의 무리들과 탑을 올랐던 거로군.”
“그래. 아무튼, 내가 아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진짜 팬텀이여.”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스터 나름대로 신의를 지킨다고 지킨 것이다.
계약이 묶여있으니, 어차피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게다.
“나도 너에 대해 함구하겠다. 서로가 이제 갈 길을 가면 될 것 같군.”
“서로가 갈 길이라. 그래. 그래야지.”
동의한다.
우리는 서로가 가는 길이 너무 달랐기에.
나는 천천히 ‘겨울’을 들었다.
그리고 심장을 옥죄던 ‘붉은 빛’을 베었다.
동시에.
《‘지고의 겨울’이 하위 계약을 베어냅니다.》
《‘혼의 맹약’이 파기되었습니다.》
마스터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지, 지금 뭐하는······?!”
락투샤
지고의 겨울이 가진 진정한 능력.
그것은 ‘계약’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이냐면, 고등급의 계약조차도 이처럼 베어내어 내 마음대로 무효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혼, 혼의 맹약을 어떻게······!”
혼의 맹약도 마찬가지.
서로가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다면 피해 갈 수 없다.
일그러진 마스터의 표정과 거칠게 흔들리는 눈빛.
마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맹신하고 있던 게 사라졌을 때의 모습.
그야말로 겁에 질린 토끼와도 같았다.
······ 제국에서 놓쳤을 땐 얼마나 아쉬웠던가.
“패, 팬텀. 아니, 빌헬름!”
“지금 나는 빌헬름이 아니다.”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빌헬름이 기사왕이며 신의를 아는 자라 불리었던 건, 내가 그런 콘셉트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지고지순하게 명예만 좇는 이었다면 ‘아이작’이란 캐릭터를 생성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판게니아의 운영자가 게임을 관리하는지 확인해보고자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반면에, 마스터는 콘셉트에 잡아먹혔다.
허드슨은 그래도 현실과 판게니아를 구분은 했지만, 마스터는 혼연일체(渾然一體)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너는 명예를 아는 자가 아니었나······?”
“나는 명예를 모른다.”
마스터의 표정에 당황이 서린다.
전부 들어주는 척, 명예를 아는 척 연기했을뿐이다.
맹약까지 걸었으니 그야 믿었을 테지.
서로에게 건 조건도 별게 없었으므로.
‘내가 만약 흑막에 대해 말하라는 조건을 걸었다면 딱 거기까지였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내 정체를 함구하라’는 조건만 내걸었을 뿐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흑막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음을 열고, 묻지 않았던 부분까지 술술 털어놓은 것이리라.
애당초 나는 계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부, 분명히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 말하지 않았더냐! 살려다오, 제발······!”
“너는 선을 넘었다.”
아무리 뒤에서 마스터를 조종한 자가 있다 한들, 그간 마스터가 보인 행위는 분명히 선을 넘었다.
대원정의 방해, 스피커 노릇을 하며 진실을 왜곡시킨 것.
빌헬름의 업적을 나눠먹고 영웅이라 으스댄 것.
마스터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모를 내가 아니다.
뿐만인가.
놈은 오직 자신의 명성을 위해 제주도를 포기하라 말했다.
바알의 토벌에 참가하지도 않은 주제에.
하지만, 위에 열거한 사실들보다 무엇보다 더욱 악질적인 행위는, 그가 행한 수많은 ‘실험’이었다.
‘허드슨이 모두 알아냈지.’
허드슨은 대원정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정보를 찾아냈다.
특히 8영웅이라 일컬어지던 자들, 그중 마스터의 악행에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놈이 행한 악행들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놈은 온갖 실험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왔다.
특히 ‘히든 특성’에 관한 실험으로.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해 탑을 오르게 만들지 않았나.
제대로 준비조차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들어오면 십중팔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었다.
“맹약! 맹약을 다시 맺자! 조건을 바꾸겠다. 너의 노예가 되라면 되고, 개가 되라면 개가 되어주마. 그러니······!”
마스터가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