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저놈, 황금 가면을 쓴 놈과 함께 자신을 내려다보던 저놈의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살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마스터는 굴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스터다. 세계의 정점에 군림할.’
빠드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은 과거의 나약한 돼지가 아니다.
마스터.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의 주인이며 만물의 위에 설 존재가 자신이었다.
자신을 비웃던 자들?
전부 죽였다.
저놈도 마찬가지다.
“모, 몸이 안 움직여!”
“어어? 나는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영역스킬이라.
그것도 ‘혼란’을 입히는 영역 스킬이다.
길게 뻗은 어둠.
이 안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자유를 잃게 된다.
사신교의 일원답게 참으로 음습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역 자체를 파괴하면 될 뿐이지.’
마스터가 오른손을 들었다.
이 ‘어둠’은 아래에서부터 장악해온다.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눈. 저 불길한 흉조의 눈이 모두 떠지면 완전히 장악되고 조종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약자들은 순식간에 사로잡히지만, 초월자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눈이 전부 뜨이기 전에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콰지지직-!
마스터가 주먹을 뻗자 공간이 마치 유리창처럼 깨져나간다.
공간의 균열은 점차 넓어지며 ‘어둠’의 영역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별을 먹고 계승한 공간 파괴술.
영역 사용자들의 천적이 바로 그였다.
“우, 움직인다!”
“아니야! 다시 ‘어둠’이······!”
마스터의 주변 사람들이 신체의 자유를 되찾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깨져나간 영역 위에 새로운 어둠이 물길처럼 흘러내려왔다.
‘내가 파괴시킨 효과는 영구적일텐데.’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가 한 번 파괴한 영역 스킬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데, 저 ‘어둠’은 끈질기게 복구되고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단순한 스킬이 아닌가보군.’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자신처럼 별을 먹고 계승한 권능일 경우.
별의 권능은 오로지 별의 권능만으로 상쇄할 수 있으니까.
이 어둠의 영역 자체가 놈이 지닌 별의 권능이 틀림없었다.
하.
괴물 같은 녀석.
반경 1km이상의 영역 전부를 지배하는 권능이라니.
이런 권능을 내리는 별이 있던가?
‘다수를 상대하는데는 훌륭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파악은 했으니까.
다수를 전부 동원해서 저 괴물을 잡는 건 포기한다.
대신, 소수정예로 움직이면 그만.
2성.
혹은 12레벨의 최강자들이 이곳에만 넷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초고속으로 12레벨의 영역을 클리어한 최강자들이.
‘지면 충돌.’
마스터가 자세를 낮춰 지면을 때렸다.
쿠르르르!
그러자 지면이 깨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바로 12레벨의 강자들이 있는 곳까지.
“음!”
곧이어 몸의 자유를 되찾은 그들이 전방에서 ‘놈’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 어둠을 최대한 빠르게 몰아내야만 한다는걸 본능적으로 깨우친 탓이다.
“멸천의 가호!”
망치를 든 팔라딘이 가호를 부르짖었다.
동시에 마스터를 비롯한 네 명의 머리 위로 구름과 같은 흑점(黑點)이 생성됐다.
“기생해라! 멸뇌충!”
전신을 가리는 긴 옷을 입은 남자의 소매에서, 전기를 머금은 벌레 수천마리가 튀어나왔다.
이윽고 벌레들은 흑점에 모였고 이내 작은 번개구름이 완성되었다.
쿠릉! 쿠르릉!
번개구름에서 튀어나온 번개는 끊임없이 네 명을 때렸다.
바로 저 조합이 12레벨의 영역을 최단기간에 클리어한 수법이었다.
흑왕의 부하들보다도 더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었던 이유.
《‘멸천뢰’ 1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합니다.》
《과부하 10%》
《‘멸천뢰’ 2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4 상승합니다.》
《과부하 20%》
끊임없이 버프를 중첩시키는 무한의 축복.
몸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리지만, 단시간에 초월적인 힘을 내게 만들어준다.
두 스킬이 합쳐져 미칠 듯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콰릉!
《‘멸천뢰’ 5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과부하 50%》
순식간에 모든 능력치가 10이 올랐다.
여기에 장비와 다른 버프들을 합치면, 그들의 능력은 훨씬 더 증폭된다.
그 어떤 괴물이라 할지라도 이 공격을 감히 받아낼 수 있겠는가.
‘죽어라, 사신교의 괴물아.’
마스터가 다시 한 번 파괴술을 사용했다.
토인족의 전사는 높게 올린 발을 내리찍었고, 번개처럼 화한 벌레의 사용자는 놈을 감싸안았다.
‘흑점’의 팔라딘 역시도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날렸다.
한데.
“······ 음?”
“통과했다고······!”
그들의 모든 공격이 동시에 ‘놈’의 몸을 통과했다.
꽈아앙!
그대로 통과한 공격은 서로 맞부딪히며 강렬한 파공음을 낳았다.
마지막에 겨우 힘을 제어하여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데에서 끝났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공멸했을 것이다.
‘설마 무적기?’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팔라딘과 뇌전의 남자가 말했다.
“무적기는 아니다.”
“음. 회피스킬이다. 게다가 한 번 사용하면 강제 지속시간이 있는.”
역시 눈썰미가 좋다.
이런 자들이 대체 어디서 나온건가 싶을 만큼.
“비겁한 새끼.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냐?”
토인족의 전사는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놈’에게 헛발질을 해댔다.
《‘멸천뢰’ 7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4 상승합니다.》
《과부하 70%》
문제는 멸천뢰다.
이 역시 강제성이 있는 버프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는 말이다.
“저런 류의 회피스킬은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
“틀림없이 ‘빛’과 관련된 속성이 약점일 거다. 벌레들이 말해주는군.”
“그런가? 빛이여.”
화아아악!
팔라딘의 전신에 빛이 솟구친다.
흑점을 사용하는 어둠의 팔라딘인 줄 알았건만.
상극인 ‘빛’의 속성도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이어 빛을 머금은 팔라딘이 ‘놈’에게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려는 순간.
쩌어어억!
······ 다시 한 번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 영역은 깨진 게 아니었나?”
“이건 ‘영역’이 아니라 저 그림자 같은 놈 자체가 건 저주다.”
“쯧, 단순히 회피의 기능만 있는 게 아니로군.”
“하지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파악했다. ‘끔찍한 흉조의 눈’, 상당한 레벨의 저주다. 저놈보다 능력치의 합이 높아야 버틸 수 있다.”
“말인 즉, 놈의 능력치 합이 나보다 높다? 멸천뢰 7중첩을 사용한 상태보다도?”
“그래도 여럿을 동시에 묶어서 그런지 약화됐다. 조금만 올리면 될듯한데.”
이놈들 진짜 뭐하는 놈들이지?
이 상황에서도 유유자적 서로 떠들고 있다.
특히 저 벌레술사.
저자의 스킬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그럼 조금 무리할 필요가 있겠군.”
주르르륵.
팔라딘이 혀를 깨물었다.
그러자 피가 흐르곤 증발하며 ‘멸천뢰’에 스며들어갔다.
콰릉! 콰릉! 콰르르릉!
“멸천자여! 저의 성혈을 바치나이다!”
《‘멸천뢰’ 12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4 상승합니다.》
《과부하 120%》
《육체가 한계를 벗어난 과부하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을 입습니다.》
이 미친놈들이 멋대로 멸천뢰를 12중첩시켰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흉조의 눈이 떠지는 게 멈췄다.’
도리어 눈이 감기고 있었다.
몸의 제어권한이 돌아오고, 기운이 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한다.
때마침 ’놈‘의 몸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회피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간다는 뜻이다.
벌컥! 벌컥!
마스터는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들이마셨다.
그 순간.
《알케미스트 특제 ‘거인의 물약’을 섭취했습니다.》
《히든 특성 ‘거인의 항마력’과 융화됩니다.》
《‘전설의 거인’으로 화(化)합니다!》
아끼고 아낀 비장의 수.
마스터의 몸이 순식간에 불어나며 거인으로 변했다.
영역 전체를 파괴시키고, 저놈을 단번에 묵사발 내기 위함이다.
이윽고 지속시간이 전부 지나자.
“······ 생각보다 까다로운 놈들이군.”
‘놈’이 처음으로 말했다.
히죽!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
뭐하는 놈들일까.
저 팔라딘과 벌레술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히든 특성 보유자들이다. 그것도 최소 두 개 이상의.’
팔라딘은 상극의 속성을 지니게 해주는 ‘허무’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벌레술사 역시도 ‘대현자’와 자체적인 관찰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고, 상대를 파악하며, 저주를 풀어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저 정도의 버프 중첩은 엄청나게 무리가 갈 텐데.’
버프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저런 특유의 ‘강제 중첩 버프’는 단시간에 엄청난 무력을 선사하지만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미련없이 사용하여 ‘끔찍한 흉조의 눈’에 저항할 줄이야.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을 감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처음 보는 자들.
저 토인족의 전사도 꽤 인상적이지만, 이 둘에 비하진 못한다.
하물며 팔라딘이 사용하는 스킬들은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어느 교단에서 나온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교단들의 권능 따위가 섞여있다. 그게 가능한건가?’
교단마다 시그니처가 있다.
예컨대 저 흑점. 팔라딘이 만들어낸 검은 구름 같은 흑점은 어둠의 성기사단 ‘발로그 교단’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빛의 폭발.
저렇게 번지듯 빛이 폭발하는 건 여신교의 시그니처였다.
서로 상극이며, 적대하는 두 교단의 시그니처가 한 몸에 존재하다니.
저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를 이용한 추가적인 버프가 있었지.’
어둠과 빛이 전부가 아니었다.
멸천자에게 바치는 성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멸천자라.
내 기억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심지어 빌헬름의 기억 속에도 없다.
신흥 종교이면서,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의 시그니처를 함께 갖고 있는 팔라딘이라.
‘재밌군.’
이건 꽤 흥미가 짙다.
아무래도 알아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양파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수가 튀어나오고 있으니.
‘어둠을 피우는 자’만으로는 여기까지일 듯싶었다.
물론, 어둠을 피우는 자는 아직 성장의 단계다. 그러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제대로 상대해줘야겠구나.’
어둠을 피우는 자가 들어간다.
다시금 인간의 형태를 되찾은 나는, ‘겨울’을 들었다.
콰르릉!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
나 역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빌헬름의 검술 ‘천지개벽’의 ‘개’를 시현합니다.》
여태껏 이 몸으로는 시현할 수 없었던 빌헬름의 세 번째 기술.
세상을 여는 검!
그것이 내 몸을 통해 발휘되었다.
운영자
‘흉조의 눈이 사라졌다.’
마스터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회피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고, 변신마저 풀렸다.
그러자 사람들을 묶어놓은 어둠이, 흉조의 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강력한 권능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
백명에 다다르는 인원.
하물며 ‘최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네 명의 발을 무한정 잡아둘 수 있는 스킬이나 권능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