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대기방에 소환된 사라들은 그림자의 형태로만 판별될 따름이었다.
‘하나의 영역이 클리어되고 소환된 정도의 숫자가 아니다. 훨씬 많은 영역이 동시다발적으로 클리어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함은 남았다.
모두가 자신의 레벨에 맞는 영역에 들어갔을 터.
영역에 분포된 도전자의 숫자도 모두 다르고, 같은 레벨이라 할지라도 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
이토록 동시에 모든 영역이 클리어되는 건 불가능하다.
“모두 비슷한 상황인 것 같군요. 각자 몇 레벨의 영역에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상황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마스터는 연기를 했다.
우선 이유는 알아봐야했으니까.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말문을 틀었다.
“저는 7레벨 영역이었어요!”
“저는 8레벨이었습니다.”
“5레벨요.”
예상대로 레벨의 분포는 골랐다.
가장 높은 건 마스터를 포함한 12레벨이지만, 그를 제외하면 8레벨이 가장 높은 듯싶었다.
‘아래 영역에서부터 차례대로 클리어되고 있다. 단순히 난이도 차이인가?’
영역이 마구 섞여있지 않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기야 레벨이 낮을수록 난이도가 낮은 건 당연한 일.
순서대로 클리어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보라가 치면서 클리어됐습니다.”
“저도요!”
“커다란 마혈족들이 나타나서 작은 마혈족들을 납치했어요.”
“‘그 남자’··· 그 남자가 마혈족들을 부려 영역보스를 죽였습니다.”
뭔가가 이상하다.
모든 레벨의 영역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클리어되었다는 말.
눈보라, 혹은 마혈족을 이끄는 정체불명의 남자.
하지만 분신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 이상, 자신의 레벨대의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게 가능할진대.
그때였다.
《너무 많은 대기방의 도전자로 인해 게임이 변경되었습니다.》
《‘O/X 퀴즈쇼’가 시작됩니다.》
《가장 많은 퀴즈를 맞춘 도전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갑니다.》
《도전자들끼리 더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 퀴즈입니다.》
《현재 ‘버그 사용자’가 탑에 존재하고 있다. O/X》
갑자기 퀴즈라니.
허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던전이나 탑은 그 주인에 따라 내용물이 완전히 다르다.
그저 균열 탑의 주인이 이러한 성향일뿐.
‘버그 사용자가 있다.’
그리고 마스터는 확신했다.
앞선 대화들로 미루어보건대 레벨 영역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
그야말로 버그성 플레이다.
곧이어 허공에 O와 X가 떠올랐다.
마스터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O로 향했다.
《두 번째 퀴즈입니다.》
《만약 ‘버그 사용자’가 존재한다면, 나는 ‘버그 사용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O/X》
이어진 두 번째 퀴즈.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퀴즈라고?’
이건 더 이상 퀴즈가 아니었기에.
*
《영역 전체가 얼어붙습니다.》
《진행률 100%》
《9레벨의 영역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9레벨의 영역 보스가 사망했습니다.》
《총합 120 SP를 획득했습니다.》
《총합 황금률의 조각 75h를 획득했습니다.》
《다음 영역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파티원 전체 점수 합산 850점》
《1위 - 란돌프(580)》
《2위 - 세렝게티(100)》
《3위 - 발테(80)》
《4위 - 롬멜(60)》
《5위 - 앤드류(30)》
《전체 13,788 파티 중 단독 1위입니다.》
《파티 2위의 점수 총합은 580점입니다.》
《파티 3위의 점수 총합은 520점입니다.》
점수를 획득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나는 쏜살같이 10레벨의 영역에 도달했다.
10레벨의 영역까지 쉬지 않고 돌파하자 파티점수 합산 850점에 다다른 것이다.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점수 총합에 따라 솔바렌의 전투력이 35% 줄어듭니다.》
그리고 점수 총합이 올라갈수록, 솔바렌의 전투력도 약화됐다.
대략 10점당 1프로 정도.
이론상 1,500점에 다다르면 솔바렌의 전투력이 0%가 된다는 말.
‘잘하면 0%가 가능할수도 있겠군.’
9레벨의 영역을 모두 돌파하며 내가 얻은 점수만 580점이다.
10레벨, 그 이상에 도달하면 천 점에 가까운 점수를 모으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터.
‘현재 내 수준은 능력치만 따져도 13레벨에 다다른다.’
유일급 검 ‘겨울’이 모든 능력치 10을 올려준 덕에, 단순히 능력치만 따지자면 13레벨에 가까운 미친 보정이 완료됐다.
물론 비슷한 수준에서 정상적으로 레벨을 올리거나, 초월한 자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쉽게 패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이 초월하며 얻은 초월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수가 내겐 있었으니까.
‘어둠을 피우는 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마혈종의 두 번째 군집이 완성됐다.’
이제는 군단이라 불러도 될 수준의 숫자가 워프를 함께 넘어왔다.
자그마치 천 마리가 넘는 마혈종이.
네크로맨서도 이만한 군단을 이끌기 쉽지 않다.
정말 사왕 수준이 아니고선 천 단위의 언데드를 어떻게 부린단 말인가.
“뭐, 뭐야?”
“마혈족? 조금 다른데?”
“도망쳐!”
10레벨의 영역에는 과연 사람이 제법 있었다.
워프를 넘어온 즉시 마혈종 무리를 발견한 도전자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단 두 명을 제외하고.
휙! 휘휘휘휘휙!
붉은 갑주와 투구를 쓴 채, 미친 듯이 창을 휘둘러대는 남자.
그는 마혈종 군단에게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건······ 발테로군.’
단번에 알아봤다.
버서커 세트를 착용하고 창을 휘두를 남자는 발테 말고는 없다.
수련자의 산에서 데려온 녀석.
한데, 발테는 누군가와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과연 ‘버그 사용자’의 ‘파티원’답군. 10레벨에 이만한 수준이라.”
여유롭게 창을 피해내며 감탄을 자아내는 남자.
처음보는 남자지만, 문제는 그의 레벨이었다.
《Lv.12》
12레벨의 초월자가 왜 10레벨의 영역에 있는 걸까.
바위 같이 단단한 피부.
대륙 남부의 주민인 토인족이다.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 덕에 토인족의 전사는 모두 맨손의 격투를 사용하며 날렵한 몸짓으로 적을 토벌하는 강자였다.
그가 발테의 창을 피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음? 설마 ‘버그 사용자’? 이거 운이 좋군.”
토인족의 남자가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었다.
마혈종 군단을 보고서도 유유자적하다.
이 정도는 혼자서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창술사여. 너에겐 흥미가 식었다. 단번에 끝내주마.”
토인족의 전사가 주먹을 쥐곤 그대로 일격을 뻗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꽝! 꽝! 꽈앙!
빠르게 연격을 쳐내자 공기가 터지며 폭발이 일었다.
이에 발테의 갑옷이 찌그러지며 주춤 뒤로 밀려났다.
“호오. 이걸 버텨?”
하지만 발테는 연격을 맞고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갑옷 역시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리곤 예상하지 못할 순간에.
촤자자자작!
발테가 역공을 시작했다.
창술은 점차 매서워져간다.
연달아 창을 휘두를 때마다 더욱 부드럽고 강력하게 압박해나갔다.
그렇게 10연격이 다다르자.
‘난무.’
마치 수십, 수백개의 창으로 공격당하듯 폭발적인 난무가 펼쳐졌다.
저 수많은 창들 전부가 진짜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창술사의 오의, 난무!
“으음······! 생각보다 귀찮은 놈이군!”
토인족의 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죽을만큼 위협적이진 않지만 생각보다 귀찮기 짝이없다.
쾅! 콰아앙!
이어 난무가 끝난 뒤 몇 번이나 공격을 가했음에도, 발테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토인족의 전사가 기겁하며 말했다.
“네놈 설마 의식이 없는 거냐?”
······ 그렇다.
발테는 진즉부터 의식이 없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오랜시간 ‘무의식 영역’의 수련을 해온 발테는, 의식하고 있을 때보다 무의식일 때가 훨씬 더 강했다.
그래서 ‘버서커 세트’와 찰떡궁합이었고.
자신이 죽거나 상대가 죽을 때까지 발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놔두면 위험하다.’
아무리 그래도 2레벨의 차이는 크다.
특히 10레벨을 넘어선 순간부터의 차이는 보다 극명했으니.
직접 손을 쓰려는 순간.
“‘버그 사용자’다!”
“‘버그 사용자’가 저기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맛살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레벨대로 분포된 자들.
그중에는 12레벨의 강자도 몇몇 포함되어있었다.
게다가, 그 가운데엔 익숙한 얼굴도 한 명 보였다.
“저놈이 우리의 점수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 탑을 오르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솔바렌의 첩자가 틀림없다!”
마스터.
제국 경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해간 놈.
놈은 돼지로 변해서 사신교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균열의 탑 10레벨 영역에 나타나선, 나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 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균열탑의 주인.’
그나마 의심되는 건 균열 탑의 주인뿐이었다.
영원 군주의 심장으로 조건을 제거하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만든 길을 걷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
그래서 클리어된 영역의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낸 모양인데.
‘나를 버그로 인식하고 있군.’
어쨌든, 균열탑의 주인이 나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 건지는 확실해졌다.
신비의 탑에서 신비를 얻을 때와는 다르게 내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도리어 나를 적대하고, 억지로 제거하려 들고 있었다.
‘저들의 상태도 정상적이진 않다.’
나를 바라보는 자들의 알 수 없는 적대감.
두 눈에 불을 켠 채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단순히 영역을 클리어하고 점수를 빼앗았다고 보일 수 없는 적대감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히든 특성 ‘어둠을 피우는 자’가 발동합니다.》
《넓은 영역에 ‘어둠(4Lv)’이 펼쳐집니다.》
《‘끔찍한 흉조의 눈(10Lv)’이 뜨여집니다.》
*
저 멀리 보이는 남자.
마혈족의 무리 가운데에 있는 저자가, 버그 사용자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방해물.
‘마혈족 자체는 별게 없다. 전력은 우리가 더 강해.’
마스터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현재 보이는 마혈족은 숫자만 많을뿐이다.
레벨은 기껏해야 7에서 8레벨 정도이리라.
반면 여기는 12레벨의 초월자만 넷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나선다면 제아무리 버그 사용자라도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인데······.’
멀리서 보이는 버그 사용자의 얼굴이.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머지않은 과거에 만난 것만 같은 느낌.
그런데, 갑자기 버그 사용자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스터가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저 모습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고 역시도 정지해버렸다.
하지만, 이내 마스터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너, 넌······!!”
경악하며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절로 분노가 치밀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언뜻 비추는 황금색 염소의 얼굴.
비록 그 당시 검은색 탈과 색깔은 다르지만, 틀림없었다.
저놈은 제국의 경매에서 보았던······ 사신교의 일원이 분명했다.
자신을 돼지로 만들고 모욕을 주었던 그 빌어먹을 사신교의 일당 말이다.
‘최강’의 넷 vs 란돌프
‘역시 제국에서도 탑을 오르고 있었구나!’
경추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
버그 사용자이자 1위 파티의 정체는 제국, 사신교다.
저 남자가 사신교를 대표하여 균열의 탑을 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날의 치욕은 절대로 잊을 수 없지.’
제국의 특급 경매에 설레며, 팔 수 있는 모든 유적을 급하게 처분했다.
그리하여 골드를 싸 들고 제국에 입성했으나 돌아온 건 치욕뿐이다.
그들은 죄인을, ‘플레이어 의심자’를 모아둔 채 시험을 진행한 것이다.
마스터는 통에 든 가루의 정체를 얼추 파악하곤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나는 그날······ 돼지가 됐다.’
허나, 마스터는 인간조차 아닌 짐승이 됐다.
돼지로 변하여 꿀꿀 울어대자 제국의 귀족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신교도 마찬가지다.
그 비웃는 눈빛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