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유일급의 장비를 얻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목록의 이름이다.
대다수가 여태껏 등장하지 않은 유일급의 무구들이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 또한 존재조차 모르는 것들 말이다.
지고의 검
마스터는 집무실에 앉아 웬종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대륙 지도를 바라보며.
툭. 툭.
지도의 남쪽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마스터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남은 돌파구는 흑왕뿐이다.’
대륙 남부의 패자.
흑왕은 대륙 중앙쪽으로 세를 급격하게 확장중이었다.
중앙대륙의 제국조차도 두렵지 않다는 방증.
하여, 마스터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올라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곧 대륙전역에 피바람이 불거다. 모두가 어느 우산을 써야할지 선택해야할 때가 올 거야.’
흑왕만이 아니다.
대원정 직후부터 대륙의 정세가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앙의 제국.
남부의 흑왕.
북부의 백왕.
서부의 엘프들까지도.
뿐만인가?
‘마왕이 회복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빌헬름이 진행한 대원정은, 실패했다.
결국 빌헬름은 죽었지만 마왕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힌건 맞는 듯싶었다.
그 다음부터 마계의 움직임 자체가 주춤거렸으니까.
하지만, 근래에 들어 마왕이 완전하게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 그러니 이 거친 폭풍 속에서 살아남으려거든, 선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가 흑왕에게 올라탄다면, 그동안 자신을 무시했던 모든 것들을 짓밟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농락한 제국과 그를 비웃던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마스터의 이름을 재차 각인시킬 수 있으리라.
‘더이상 실패를 겪을 순 없다.’
물론 마스터가 조급해진 이유가 있었다.
최근 그가 계획한 모든 것들이 연달아 실패를 맛보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뛰어나갈 때 그만 혼자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격이었다.
‘······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망해.’
정말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
경매의 실패로 룬델라의 재정도 바닥을 보이고 있고, 지구에서의 평판 역시 최악이다.
더 망하기 전에 선택해야만 한다.
그나마 선택이라도 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알려진 것보다 흑왕은 훨씬 더 강하다. 세력도, 힘도, 무엇하나 빠짐 없이.’
또한 그가 따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흑왕이라는 동앗줄은 썩 괜찮은 선택지였다.
조사하면 할수록 흑왕의 이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제국도, 백왕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흑왕이 나선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하지만,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는 건 괴물 따위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던 찰나.
《‘새로운 재능’이 개화합니다.》
《‘균열의 탑’이 솟아오릅니다.》
돌연히 떠오른 글귀들.
마스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재능, 균열의 탑?’
재빨리 등록된 공지사항을 확인한 마스터가 등받이에 기대 턱을 쓸었다.
이후 순식간에 내용을 파악하곤 감탄을 터트렸다.
“이건······ 대박이군.”
재능이란 무엇인가.
성장가능성. 캐릭터의 미래다.
허나, 재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따로 있었다.
‘히든 특성.’
재능의 연계에 따라 열리는 히든 특성들.
한데 새로운 재능이 여러 가지 분류로 개화했다는 건.
‘새로운 히든 특성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 새로운 히든 특성이 등장했다는 말과 같다.
어떠한 연계로 열릴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저 재능들을 줄기로하여 개화하는 히든 특성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히든 특성은 지금껏 존재해왔던 것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새로운 재능이 나타난 것 자체가 전례가 없던 일이므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군.’
벼랑 끝에 몰리자 또 다른 동앗줄이 내려온 느낌.
어쩌면 이 기회로 말미암아 날개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새로운 재능과 함께 SP를 수급할 수 있는 탑이 왜 솟아올랐겠는가.
‘새롭게 나타난 히든 특성을 얻는 자가 왕이 된다.’
가장 먼저 새로운 히든 특성을 얻는 자가, 왕이 된다.
지금 시점에서 이것을 알아차린 플레이어는 없으리라.
히든 특성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실험을 진행했던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그 사실에, 마스터가 작게 웃으며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빠르게 탑을 독점하고 선두에 설 마지막 기회.
그 순간이었다.
《‘메인 퀘스트 8’의 명예의 전당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마스터의 입가에 웃음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도리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마스터는 이맛살을 구겼다.
‘설마······.’
내심 부정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도시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메인 퀘스트 8의 내용.
그 선두에 선 자가 마스터였다.
룬델라를 정화하며 압도적인 점수로 1등의 자리에서 서 있던 것이다.
아무리 놈이라도, 그 점수를 넘기는 어려우리라 확신했거늘.
“이게 무슨······.”
순위와 점수를 확인한 마스터는 숨이 턱 막혔다.
이후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1위, 1,500점. 란돌프》
《2위, 430점. 마스터》
······ 이런 미친놈을 봤나.
1,500점이라니.
저런 점수는 본 적도 없다.
천 점이 넘는 점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오늘 처음 알았다.
아니,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천 점에 근접한 점수도 마찬가지로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버그를 쓴 거냐?’
여태껏 란돌프가 깨어온 모든 메인 퀘스트의 점수가 압도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백 보 양보해서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
그런데 지금 떠오른 점수는 천 보를, 만 보를 양보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대륙 하나를 통째로 정화한 게 아닌 이상에야······!’
룬델라를 모조리 정화하고도 430점이었다.
1,500점은 뭘 해야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메인 8의 순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권상점일진대.’
새롭게 오픈되는 상점.
순위에 따라 상점에서 보이는 물건이 다르다.
그리고 마스터는 그간 1등의 순위로, 이권상점에서 꽤 많은 득을 봤다.
빠드득!
‘천 오백점이면 대체 뭘 얻는 거지?’
게다가 점수에 따라 얻는 보상도 달라지기 마련.
저 점수라면 웬만한 성좌들도 보상등급을 올리는 데 동참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 그래.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메인퀘스트의 보상은 신화등급이 최고다.’
메인퀘스트의 보상은 한계가 있다.
그가 알기로는 신화등급이 마지노선이었다.
그 너머는 유일등급 뿐인데, 메인퀘를 밀며 유일급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화 등급 무구를 두 세 개쯤 선택할 수 있게 되겠지.’
물론, 보상의 개수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그래도 천 오백점이라는 점수에 비하면 아쉬울 테지.
하지만, 마스터의 이런 예상은 가볍게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습니다!》
······ 나타났으니까.
새로운 유일급의 장비가 제작되었다는 문구가 하필이면 동시간에 떠오르다니.
다른 사람이 제작했을 리 만무했다.
이건 분명히.
‘······ 란돌프가 유일급 장비를 얻었다.’
란돌프!
놈이 거머쥔 것이다.
메인 퀘스트 1,500점을 달성하면서 보상으로 주어진 게 분명했다.
아마도 천 점이 넘는 점수는 유일급의 보상으로 치환이 되는 듯싶었다.
대체 어떻게?
아무리 놈이 팬텀이고 판게니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도, 이런 버그성 플레이를 연달아 하는 게 말이 되나?
빠드드득!
마스터가 다시 이를 갈았다.
이빨이 갈려나갈 것처럼 갈아댔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란돌프는, 혼자서 제트기를 타고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도 더 올라가야만 한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혼자서만 뒤처지는 이 감각이 마스터는 너무 싫었다.
그런데.
《‘??의 유일급 장비’가 탄생했습니다!》
······ 아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고?
심지어 제작도 아니고 탄생은 또 뭐란 말인가.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억눌렀다.
아무래도 자존심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마스터는 선택했다.
흑왕의 동아줄을 붙잡기로.
*
무엇을 골라야하는가.
떠오른 목록은 많으나, 내가 고를 수 있는 보상은 단 하나였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보상 외에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었으니까.
‘이건 정보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귀중한 정보.’
저 많은 목록의 이름들이 모두 유일급이다.
현재 이 대륙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유일급들의 이름일 터.
이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엄청난 정보이자 보물이었다.
‘이름으로 기원을 추측할 수 있지.’
예컨대 ‘태초의 빛’도 특정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아마도 ‘태초의 숲’이라 불리는 엘프들의 도시.
‘지평선의 저항’ 역시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곳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름과 관련된 정보를 토대로 다른 유일급의 행방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 고민되는군.’
정말 행복하기 짝이 없는 고민이었다.
여태껏 메인퀘를 밀며 마주했던 보상과는 차원이 다르므로.
당연히 내게 가장 맞는 것을 택해야겠지만.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가 최후를 달성하며 보상이 유일등급으로 올라갔다. 그렇다면 그와 관련된 유일급의 장비도 이곳에 있겠지.’
마음에 걸리는 건 찬란한 영웅의 성자다.
유일하게 그만이 내게 관심을 던졌다.
그리곤 스러지며 최후를 달성했다.
보상목록 중에 그와 관계된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오직 ‘이름’만을 보고 선택해야한다는 것이다.
판게니아에서 정보가 곧 무기이고 힘인 이유가 이것이다.
‘이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두 개다. 신을 겨누는 활과 용신의 투구.’
두 개다 내가 만들려고 했던 장비니까.
만들다가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포기하긴 했지만, 저 두 개의 장비가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특히 ‘신을 겨누는 활’은 거리제한없이 상대를 겨눌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무기다.
알고 있는 걸 고른다면 적어도 실패하진 않을 터.
‘한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은 고유의 기능에 모든 능력이 몰려있다는 뜻이지. 특히 황혼, 통곡. 이 두 개가 그렇다.’
가장 고르기 껄끄러운 것도 이 두 개였다.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데, 겨우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이것들이 내게 쓸모없는 기능만을 담당할 수도 있는 탓이다.
어지간하면 내가 잘 아는 것을 선택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모든 이름에 특수한 이펙트가 붙어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이펙트, 번개가 치는 이펙트, 빛이 스며오는 이펙트 등등.
보상의 목록으로 떠오른 모든 이름에는 특수한 효과가 더해져 있었다.
유일급인만큼 이름부터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여길 수도 있으나.
‘별빛이, 머물러있다.’
하나의 이름에 ‘별빛’이 머물러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별빛이,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남기고 간 것이라고.
이내 결심한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습니다!》
《태초, 모든 영웅의 기원이 되었던 찬란한 영웅왕》
《그가 스러지며 남긴 ‘황혼’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영웅왕과 황혼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최후의 황혼’이 완성되었습니다.》
최후의 황혼.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허나, 최후의 황혼은 장비가 아니다.
무기도, 방어구도 아니었다.
이건······ 룬이다.
특별한 존재가 새겨놓은 글자.
보통 이러한 ‘룬’은 ‘혼’에 새겨져있다.
예를 들자면 ‘히드라곤의 혼’과도 같은.
존재 자체를 새겨넣는 작업인 것이다.
‘이 룬어를 새겨놓을 곳.’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북천빙검이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없이 ‘최후의 황혼’을 북천빙검에 새겼다.
그러자 별빛이 쏟아지며.
《‘북천빙검’의 모든 계약 위에 새로운 계약이 새겨집니다.》
《‘북천빙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겨울’이 당신에게 완전하게 귀속됩니다.》
《‘최후의 황혼’이 검의 격을 더욱 격상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