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모든 플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수많은 글귀.
그리고 공지사항의 내용은 그들로서도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진리탐구, 차원 이해력, 검은 피······ 재능이 대체 몇 개가 생성된 거야?”
“이런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탑이 오르거나, 심연의 땅이 솟아오른 적은 있어도, ‘새로운 재능’이 모든 플레이어에게 개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떠오른 재능이라는 것조차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균열의 탑과 관계가 있는 건가?”
“보아하니 균열의 탑에서 SP를 얻고 저 재능 찍으라는 소리 같은데?”
“안 그래도 구하기 힘든 황금률 조각을 다량으로 얻을 수 있다니!”
“그런데 레벨 제한 해제는 뭐냐?”
“숙련도 레벨이 해제된다는 거야, 아니면 10레벨을 넘게 올릴 수 있게 된다는 거야?”
공지사항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재능을 찍어보고, 탑을 오르지 않으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들보다도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왜 갑자기 나타난 걸까?”
“공지사항에 적혀있잖아. 누군가가 ‘차원문’을 파괴해서 균열의 탑이 솟았다고.”
“차원문이 뭔데? 그걸 누가 부순거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확실한 건 플레이어는 아니겠지.”
제국과 같은 세력, 혹은 다른 지고의 존재가 그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을 벌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침식률 20%가 다가오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서 이 기회는 천금과도 같았으므로.
그때였다.
《‘메인 퀘스트 8’의 명예의 전당 순위가 바뀝니다.》
필연적인 순간에 나타난 또 하나의 문구.
명예의 전당. 누군가가 높은 점수로 퀘스트를 밀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기일까.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
새로운 재능이 개화하고, 균열의 탑이 떠오른 즉시 전당의 순위가 바뀐 것이다.
“설마······?”
“오염원을 제거하면서 차원문도 없앤 거야?”
“누군데?”
“······ 메인 퀘스트 8이면 한 명밖에 없잖아.”
게다가 메인 퀘스트 8이라면.
그 구간을 압도적으로 밀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후발주자인 주제에, 선발주자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있는 사람.
압도적인 점수로 항상 1위를 놓치지 않은 자.
팬텀!
그러나 이윽고 떠오른 이름과 순위에, 플레이어들은 너나할 것 없이 경악에 찬 시선을 던졌다.
“··· 미친!!”
“뭐야 이거······.”
“······ 실화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주작이지?”
*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가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 아름답군.”
지금 본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그가 지불할 가치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란돌프의 영웅적인 서사는 그가 잊었던 영웅심을 다시 한 번 고취시키고 있었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여. 설마 본 것이냐?”
“허어······ 아무리 그대라도 혼자서 감당하긴 힘들진대.”
모든 성좌가 그를 바라봤다.
그들은 란돌프의 이야기를 외면했다.
그 ‘소모’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안 보려고 애를 쓴 게다.
하지만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달랐다.
유일하게 그만이 ‘란돌프’의 이야기를 접했다.
문제는 그로 인한 별빛의 소모. 란돌프가 달성한 위업은 그의 별빛으로 충당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했으므로.
남아있는 별빛이 없다면, 성좌의 운명은 스러지는 것뿐이다.
허나.
“··· 나는 만족한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모든 별빛이 증발해가는 와중에도 미소지었다.
스러졌던 성좌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란돌프의 이야기는 그들의 공허함을 항상 충족시켜줬으니 말이다.
하물며, 이번 이야기의 만족도는 이전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는 스스로 몸을 던졌다.’
결국 파국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파멸이 예정된 관계.
이번에야말로 깨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큰 오산이었다.
그럼에도 란돌프는 자기희생적인 면모를 보였다.
란돌프는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영웅적이었다.
게다가.
‘마혈왕. 그 우주적인 존재를 소화시키다니.’
어이가 없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어느 누가 그딴 짓을 벌이겠는가.
란돌프가 아니면 불가하다.
유일하게 란돌프만이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다.
“하하하!”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가 있지?
자신의 몸을 담보로 마혈왕을 강제입성 시켜버릴 줄이야.
보통은 오염원을 제거할 생각만하지, 오염원에 오염될 생각은 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에 다른 성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는 거냐?”
“대체 무슨 이야기를 보았기에?”
“거의 웃지 않는 그대가······.”
“말해줄 수 없나?”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은 모른다. 안 봤으니까.
그저 결과만 알고 있을뿐이다.
메인 퀘스트8을 결국 달성했다는 그 짧막한 한 문장만을 말이다.
다른 성좌는 모르는 자세한 이야기를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
그것도 이토록 순도 높은 이야기일 줄은 그들도 몰랐으리라.
그러나 말 해줄 수 없고, 말 해줄 생각도 없었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실로 만족하였다.
‘정산되지 않은 연속된 신화의 달성. 그리고 성좌의 존재를 머금은 별빛. 그대는 유일급의 등장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바알을 제거한 신화, 그리고 마혈왕의 소화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여기에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선뜻 자신의 모든 별빛을 내놓았다.
자신의 존재를 이루던 별빛이라면, 마지막 조건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
빼앗겨서 사라지는 별빛이 아니라 자신이 만족하여 내놓는 별빛이다.
그 양과 질은 감히 차원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 만족했으니까.
채워졌으니까.
공허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고맙다. 란돌프.”
스아아아아.
그의 존재감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
허물이 벗겨지듯, 어둠이 떨어져나간다.
이윽고 나타난 인간의 형태를 보며 아리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 그 모습은······!!!”
분명히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자다.
기절한 상태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검강을 뽑아내는 정황이 합쳐지자, 확신했다.
‘오주력이 인간이라니?’
허나 그는 오주력이다.
크람델은 인간이 가까이 올 수 없는 장소이며, 주력의 자리는 선별하여 인정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크람델의 주민들과 사주력, 그리고 백왕마저 속이고서 인간이 오주력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한거지?
어쩌면 인간의 형체를 한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모습과 돌연 듯 심해지는 냄새는 틀림없이 인간의 것이었다.
아리아는 확증하였다.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었구나!’
그가 모두를 속이고 있노라고.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척 모두를 농락하고 있던 것이라고.
만약 오주력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다른 주력들과 백왕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크람델 자체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대사건이다.
흑왕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는 일.
‘여기서 제거해야······.’
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인간을 혐오한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다.
아리아라고 다르진 않았다.
무엇보다 크람델의 미래를 생각하면, 저 인간은 여기서 자신의 손으로 제거야만 된다.
모든 힘을 잃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 것이니.
기절해있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불가능할테니.
하지만······.
“넌 죽어야겠구나.”
촤악!
그 순간, 몸이 속박되었다.
아리아는 움쩍달쌀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란돌프와 한차례 전투를 벌인 여자가······ 이자벨라가 있었다.
‘눈이······!’
아리아는 이자벨라의 눈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눈은, 살생을 확신한 자의 눈이다.
무저갱 같이 깊고 어두운 눈.
그녀는 란돌프의 실체를 본 자신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속박은 오주력 란돌프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이 속박을 벗어던질 수 있을 리는 없다.
“······ 오주력에 대한 건 누구한테도 말할 생각 없다.”
“아니.”
이자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오염된 바바리안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나, 저 반인반수는 멀쩡히 란돌프의 실체를 봤다.
인간과 짐승을 합쳐둔 모습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 아니고 란돌프를 오주력이라 부른다면, 필시 크람델에서 왔을 터.
이자벨라가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백왕은 알게 되겠지.”
아리아가 크람델에 있는한, 백왕은 묘한 기류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의 감각은 모든 것을 초월해 있었으므로.
오주력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백왕이 알아차려선 안 된다.
게다가 이 모든건 결국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그러니 이자벨라는 여기서 아리아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촤악!
2중첩.
하지만 5중첩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대로 목을 그어 잘라버리면 그만.
이자벨라가 바바리안이 흘린 떨어진 검 한 자루를 쥐었다.
‘······ 아무 말도 통하지 않겠군.’
아리아는 반쯤 포기하였다.
저런 눈을 한 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스르르.
지척까지 다가온 이자벨라가 검을 겨눴다.
그리고 검을 내리치려던 순간.
“그만.”
우뚝!
뒤에서 돌려오는 목소리에, 이자벨라가 멈춰섰다.
이어 시선을 돌리자.
“아!”
란돌프.
그가 깨어났다.
동시에 이자벨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이후 검을 바닥에 사정없이 던져버린 이자벨라가 란돌프에게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
······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영원히 잠들 뻔했다.
그 정도로 ‘마혈왕’을 소화시키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결국 소화시켰고 마혈왕은 히든 특성이 됐으므로.
‘열 다섯 번째 히든특성이로군.’
13개로 시작한 히든 특성이 어느덧 15개가 되었다.
영원의 란돌프와 마혈족의 왕이 추가되며.
솔직히 반신바의였다.
설마 소화된 마혈왕이 히든 특성이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무슨 기능을 가진 거지?’
이 역시 당장은 알 수 없다.
모든 히든 특성은, 직접 경험하고 부딪치지 않으면 그 기능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히든 특성’이라 이름 붙은 만큼, 엄청나게 쓸모가 있으리란 점이었다.
쓸모 없는 히든 특성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몸은 성하신 겁니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걱정하는 이자벨라.
하지만 내 신경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너머, 새로이 떠오른 글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정산과 합산됩니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바로 메인 퀘스트의 정산이 완료되었다는 문구.
당연히 높은 점수일 거라고는 예상되지만 정확히 몇점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전 정산과 합쳐진다는 건 설마 바알의 제거와 합산된다는 건지.
《전례 없는 신화를 이룩한 자여!》
《그대의 신화성은 전대륙에 울려퍼질 것입니다.》
《총점 1,500점》
《‘온전한 황금률’ 한 개와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1,500h)’을 획득합니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최후의 달성을 완료했습니다.》
《새로운 유일 등급의 아이템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아래의 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태초의 빛》, 《묠니르》, 《신을 겨누는 활》, 《황혼》, 《지평선의 저항》, 《통곡》, 《발할라 갑옷》, 《하늘을 무너트린 자의 부츠》, 《용신의 투구》, 《찬란한 수호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