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36화 (136/317)

클리어!

만약 내가 파이살메르로 오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내버려 두었다면 이자벨라는 죽었을 것이다. 

이자벨라의 계획은 자신의 몸에 마혈왕을 강림시켜, 모든 워프를 끊은 뒤 심연에 가라앉을 생각이었으므로. 

“왜······.” 

공간을 찢고 바깥으로 나가자 이자벨라의 떨리는 두 눈이 보였다. 

“대체 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초리. 

왜 내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간단한 이유다. 

네가 죽질 않길 바라니까. 

비록 처음의 이자벨라는 내가 플레이하다가 접은 캐릭터에 불과했으나,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나의 든든한 동료였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였다. 

처음 이 험난한 세계에 떨어져, 함께 호흡하며 나아갔던, 나의 친구였다. 

그러니 이자벨라. 

나는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저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반겨줄 사람도, 머물 집조차도······ 란돌프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자벨라는 초월하며 자신의 근원까지 떠올린 모양이다. 

제국 데르시안 가문에서의 일까지도. 

그곳에서 버림받은 기억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저희는 ‘계약’의 관계일뿐인 것을요. 왜 저 따위를 대신해서 ‘희생’하시려는 겁니까? 대체 왜······?” 

··· 우리는 계약관계일 뿐이니까. 

1년간의 봉사. 

이후 근원을 찾아주고, 자유를 주기로 약속했다. 

계약자와 피계약자. 대가를 주고 고용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내 진짜 정체를 이자벨라에게 알릴 수는 없으니. 

알리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관계. 

동료고, 전우이며, 친구라 여기지만, 거짓으로 점칠된 이 ‘연결’은 사실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모든 게 거짓일지라도.’ 

그래도 괜찮다. 

이 감정을 미안함, 동정심이라 해도 좋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이자벨라는 나로 인해 인생을 잃었다. 

그런데 앞으로의 삶까지도 잃게 할 수는 없지 않나. 

자포자기한 채 삶을 마감하려는 저 여자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아······.” 

이자벨라의 망연자실한 표정. 

이조차도 자신의 실수라 여기는건지. 

하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오염원을 제거하고, 내 몸에 마혈왕을 강림시켜야만 했기에. 

솔직히 나 역시도 확신은 못한다. 

몇 번이나 기적같이 살아난 몸이라 할지라도, 내가 직접 선택한 일에는 히든 특성조차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으니. 

그럼에도, 그저 나아갈 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자’》 

《‘우로보로스의 낙인’의 발동 조건 중 하나가 만족되었습니다.》 

《‘자기희생’으로 인한 ‘신성한 원’이 신체에 새겨집니다.》 

《‘우로보로스의 독’이 ‘신성한 원’을 채웁니다.》 

《‘우로보로스 - 독이 든 성배’의 낙인이 완성되었습니다.》 

《체력이 10 증가합니다.》 

《자연재생력이 1,000% 증가합니다.》 

《자신의 몸을 전부 먹어치울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쓰러지지 않습니다. ‘불굴’효과가 추가됩니다.》 

‘······ 분명히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을진대.’ 

차원문의 너머, 오염의 중추로 향하던 마혈왕은 인상을 구겼다. 

준비는 완벽했다. 

자신의 딸이 실수를 할 리는 없으니. 

완벽을 추구하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게 그의 딸 아니던가.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하다. 

특히 오염원의 상태가. 

‘왜 아직도 장악되지 않은 거냐?’ 

마지막 오염원이 남게 되면 그것의 정신과 육체는 완전하게 장악된다. 

이후 마혈왕인 그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그 껍데기를 자신이 차지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든 존재의 격을 넘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한데, 시작할 수가 없다. 

‘정신도, 육체도, 그 무엇하나 장악되지 않았다.’ 

······ 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으니까. 

최종 오염원은 놈의 겉만을 맴돌며 표류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마혈왕은 곧 알게됐다. 

‘정신과 육체를 감싸고 있는 벽들이 있군.’ 

성과 같이 거대한 외벽이 오염원의 침투를 막고 있는 것이다. 

허. 

마혈왕은 어이가 없었다.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오염시킬 수 있다 여겼거늘. 

이놈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마지막까지 오염되지 않았단 말인가. 

‘오냐, 뚫어주마.’ 

허나, 벽은 뚫고 부수면 된다. 

아무리 단단한 벽일지라도 공성병기로 두드리면 무너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공성병기는 마혈왕의 존재 그 자체였다. 

자신의 존재가 차원문을 타고 넘어온 이상, 설령 아무리 견고한 벽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부수는 벽이다. 

훨씬 더 간단한 일. 

‘무너져라.’ 

쿠르르르릉!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송골송골 맺어나는 땀은 어느덧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고 악다문 입과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내릴 때 즈음. 

【‘거인의 항마력’이 ‘마혈왕’에게 뚫렸습니다.】 

오염원을 막아서던 거인의 항마력이 마침내 뚫려버렸다. 

까드득! 

그 순간 고통은 배가됐다. 

다리가 잘려나간 듯이 아팠다. 

우로보로스의 낙인에 의해 체력과 자연재생력이 오르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까무라쳤을 고통. 

꿈틀! 꿈틀! 

동시에 다리부분의 피부 표면이 일어난다. 

정신과 육체가 서서히 오염되어 침식하는 증거다. 

【‘비스트 로드’가 ‘마혈왕’에게 뚫렸습니다.】 

코가 강제로 뜯겨져 나간 것만 같다. 

허나, 나의 육체는 모든 히든 특성으로 재조립되었다. 

단순히 ‘거인의 항마력’이 뚫렸다고 모든 걸 내어주진 않는다. 

놈이 뚫어야할 히든 특성은 아직도 12가지나 남아있었다. 

‘엄청난 놈이군.’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히든 특성을 강제로 뚫고 들어올 정도의 존재일 줄이야. 

만약 이런 놈이 세상밖으로 나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황금의 은총’이 ‘마혈왕’에게 뚫렸습니다.】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바닥에 손을 대고, 애써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올 마스터’가 ‘마혈왕’에게 뚫렸습니다.】 

양쪽 다리에 고통이 몰려오더니 이내 감각조차 사라진다. 

일어서진 못할 것 같았다. 

히든 특성이 이 정도로 몰아붙여진 적은 처음있는 일. 

【‘돌연변이’가 ‘마혈왕’에게 뚫렸습니다.】 

시야를 잃었다. 

빌어먹을. 

벌써 다섯 개. 

피눈물이 흐르며 눈알을 뜯어버리고픈 감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허무】, 【웨폰 마스터】, 【대현자】, 【올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도합 아홉 개의 히든 특성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뭐 이딴 놈이 다있나 싶었으나, 이쯤되자 이자벨라가 필사적으로 놈을 심연에 가라앉히려던 마음을 알겠다. 

세계를 삼키는 뱀, 네임드인 요르문간드가 마혈왕을 왜 ‘최강의 존재’라 언급했는지도, 잘 알겠다. 

덕분에 이미 나의 몸은 탈진상태였다. 

정신도 약에 취한 듯 몽롱하기 그지 없었다. 

《‘불굴’효과가 발현됩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인내가 500% 상승합니다.》 

그 찰나, 온몸에 다시금 활력이 돌았다. 

사막에 쓰러진 상태로 물 한모금을 마신 듯 청량한 기분. 

모든 갈증이 채워지진 않았으나,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다시 놈과 전쟁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까드드득! 

나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열 개. 이제 남은 건 네 개로군.’ 

마혈왕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무너트린 열 개의 벽. 

그것들은 일종의 ‘진리’와도 같았으나, 자신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앞으로 남은 건 네 개. 그런데 이 네 개의 벽은 이전의 것들과 좀 다르군.’ 

벽에는 각기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방금 ‘손재주’를 쓰러트렸으니, 남은 건 네 개. 

‘천상,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 영원군주의 심장, 영원의 란돌프라.’ 

마혈왕이 턱을 쓸었다. 

이것들은 뭘까. 

그로선 처음 보는 것들이다. 

자신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진리이자 이름들이었다. 

이 앞전 열 개의 벽들은 어느정도 알 것 같았지만, 이 네 개는 도통 모르겠다. 

‘내가 쓰러트린 벽들은 모두 기원(紀元)이다.’ 

기원. 

기준, 혹은 시작의 이름. 

기준이 되는 모든 것들은 ‘진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열 개의 벽은 모두 기존에 존재하던 진리였다. 

‘내가 쓰러트린 벽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들이다. 다른 기원적인 존재들이 깨우쳤던, 태초의 열쇠들.’ 

얼추 알겠다. 

저 특성들의 정체를. 

누군가가 깨우치고 남겨둔 이름이라는 걸. 

어딘가로 닿기 위해 만들어놓은 열쇠라는 것을! 

‘이만한 진리들을 사용해서도 닿지 못한 곳. 대체 어디로 향하고자 이것들을 남겨둔 것이냐?’ 

꿈에 그리던 이상향이라도 존재하는 건지. 

확실한 건 이 정도의 진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이, 하나 같이 닿으려다 실패한 곳이 있다. 

앞의 열 개는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남은 네 개의 벽은 모두 ‘새롭게 쓰인 진리’다. 

마혈왕 자신이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우주적인 존재. 

우주의 모든 비밀에 통달한 그가 이토록 무지해지다니. 

‘이놈은 정말 신이라도 되는건가?’ 

게다가 한 몸에 이만한 진리를 품은 자는 그도 처음보았다. 

보통 이만한 진리가 한데 뭉치면 버티지 못하고 터져야 정상이다. 

일개 인간의 몸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만한 격을 쌓고 그릇을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 

신. 혹은 신에 근접한 자신 정도가 아니고서야. 

‘나는 진리탐구자. 내가 파헤치지 못할 비밀은 없다.’ 

실로 흥미롭다. 

이 인간의 몸은. 

이 인간이 품은 열네 개의 진리는. 

그중 마지막 남은 네 개의 진리는 특히나 흥미로웠다. 

마혈왕은 턱을 쓸었다. 

그리고 남은 네 개의 벽 중 하나를 선택했다. 

‘천상.’ 

머리로 통하는 문이자 벽. 

저곳을 무너트리고 정복하면 나머지는 쉬울 듯했으니. 

마혈왕이 천상이라 이름불리는 벽에 손을 댔다. 

그러자. 

‘음?’ 

벽의 위로, 자신의 앞에 거대한 눈 하나와 입이 튀어나왔다. 

눈은 마혈왕을 바라봤으며. 

입은. 

히죽!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불굴이 발동하자 고통이 사라졌다. 

정신은 고요해졌으며, 포기하지 않는 의지마저 더해졌다. 

비록 손재주까지 무너트렸지만 아직 모든 히든 특성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남은 건 네 개. 

그리고 그 내 게의 히든 특성은, 무너진 앞 열 개의 히든 특성과도 확연히 달랐으니. 

‘멈췄다.’ 

직후 마혈왕의 폭주가 멈췄다. 

폭주한 기관차처럼 벽을 뚫고 다니던 마혈왕이. 

남은 네 개의 특성 중 하나를 건드리곤, 멈춰 선 것이다. 

뭘 하는 거지? 

내심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르르르!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며, 가시를 삼킨 듯 불편했던 뱃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꼬르륵! 

······ 소화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히든 특성 ‘마혈족의 왕’이 추가됩니다.》 

《새로운 재능이 개화합니다.》 

《‘새로운 재능’에 관한 ‘공지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SP를 사용하여 관련된 재능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균열의 탑’이 떠오릅니다.》 

《‘균열의 탑’에선 SP와 황금률의 조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층수에 따라 레벨 제한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공지사항이 두 개 등록되었습니다.》 

······. 

《‘메인퀘스트 8 - 도시의 오염원 정화하기’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점수를 정산 중입니다.》

전례 없는 신화를 완성한 자

“······ 새로운 재능?” 

“균열의 탑?”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