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염원’을 제거했습니다!》
《남은 ‘오염원’은 둘입니다.》
《업적 ‘오염된 자들의 비명’을 달성합니다!》
멈추지 않는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전진할 뿐이다.
고작 며칠만에 대부분의 오염원을 제거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리아는 진심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검술을······.’
오주력 란돌프.
그는 검을 쓸 줄 알았다.
그것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처음에는 몇 가지 기술을 보이며 학살을 이어갔지만, 근접전으로 바뀌자 태도가 완전히 돌변했다.
눈빛도, 몸의 자세, 호흡 마저도.
진정한 검사의 근본과도 같은 모습.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검술을 본 아리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달인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아리아가 보기에도, 그의 검술은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그러나 시체 까마귀가 어찌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아무리 형태가 변하는 진화를 이루었더라도 그 근본은 시체 까마귀다.
저만한 경지에 이르려면 오랜 세월을 오직 검만 휘둘러야 했다.
‘게다가 마지막에 보인 건 분명히······.’
이번 오염원을 쓰러트릴 때, 순간적으로 검에서 기가 흘러나왔다.
검기.
아니, 검기보다도 더 정형화된 기운.
게다가 그 색과 형태는.
‘검······ 강.’
아리아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담았다.
검강.
그녀가 알기로, 검강을 흩뿌릴 수 있는 자는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인간.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연달아 검강의 사용자를 만날 수 있을까.
평생을 가도 볼 수 없는 게 검강의 사용자이건만.
‘바알로 착각했던 것도 그럼······.’
생각해보면 처음 란돌프를 보았을 당시,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바알’처럼 보였던 것도 그런 맥락이지 않을는지.
본능적으로 너무나 강하고 두려운 자라는 걸 깨닫고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모습으로 그를 비춘 게 아닐까.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이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로 착각한 것이다.
‘아.’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그 전율은 이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란돌프. 이 자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늪처럼, 무저갱처럼, 혹은 심연처럼.
이런 자는 처음이었다.
이토록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벽과도 같은 존재는.
그렇게 파이살메르에 입성하자.
‘왜 멈춰선 거지?’
폭주하여 달리던 란돌프가 처음으로 멈췄다.
아예 가만히 선 채로 어딘가를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그만두거라.”
동시에, 수많은 바바리안들과 함께 나타난 여인.
흰색의 거대한 뱀을 두른 오염된 자들의 여왕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우로보로스
누군가가 워프를 타고 ‘오염원’을 제거하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자벨라는 별반 동요하지 않았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사막도시, 파이살메르.
굳이 찾아올 자도 없을뿐더러, 찾아온다한들 위협은 되지 않을테니.
기껏해야 오염원 몇 개만 제거하곤 떠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자벨라의 그런 생각은 틀렸다는 게 순식간에 밝혀졌다.
‘빠르다.’
오염원을 제거하는 속도가.
파이살메르를 향해 나아가는 속도가······.
단순한 빠름을 넘어, 불가사이한 수준이었다.
오염원 하나가 제거될 때마다 다른 오염원들은 급격하게 강해진다. 난이도가 점점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럴진대, 저 거리낌없는 움직임은 대관절 뭐란 말인가.
그냥 막히지 않은 길을 쭉 걸어와도 저것보단 느릴 것 같았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초월자로구나.’
분명한 건, 외인은 초월자다.
그것도 최소 2성의 초월자가 틀림없다.
어둠이 가까워질수록 이자벨라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쉬이이익.
세계를 삼키는 뱀이, 요르문간드가 반응하기 시작했으므로.
왜 그만한 초월자가 이 먹을 것 없이 척박하기만 한 땅에 나타났을까.
외지인과도 별 접점 없는 고립된 사막을.
‘아직 모든 오염원이 제거되어선 아니 된다.’
허나 정신을 차렸을 땐 오염원 두 개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고.
“으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주물렀다.
다른 오염원들이 줄어들 때마다 그녀의 기운은 강해지고 있다.
반대로 이지 역시 조금씩 상실해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지금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이살메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지막 하나가 남게 두어선 안 된다.’
도시를 오염시킨 이 오염원들은, 평범한 오염원들이 아니니까.
파이살메르에 도착한 그녀는 오염된 도시를 목격했고, ‘오염원’에 보다 근접할 수 있었다.
이후 파이살메르의 여왕이 되어, 다른 오염원들을 억지로 방출하여 억제하는 중이었다.
‘사막여왕. 너의 뜻대로 되게 두진 않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오염은 전대 사막여왕에 의해 일어난 것.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납치하고, 생명을 갈취하여, 사막여왕은 은밀한 밀실에서 무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그 지옥같던 모든 과거가 전부 사막여왕이 행한 실험의 일부였다.
덕분에, 이자벨라는 ‘오염’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됐다.
‘오염은 천공병 따위가 아니다.’
대륙이 천공으로 떠오르며 생긴 풍토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이 실험은 절대로 완성되어선 안 된다.
이자벨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어둠’과 마주했다.
*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메인퀘스트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백성전의 성좌가 관심을 가졌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
일전 데미갓 특성 던전에서도 지대한 집중을 보였던 자.
그 뒤로 계속해서 내게 관심을 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의외였다.
사흉 바알의 제거와 동시에 27명의 성좌가 빛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 역시도 내 이야기에 상당한 가치를 지불한다는 의미.
결과에 따라 보상을 올려주는 일 자체가 부담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다른 성좌는 보이지 않는군.’
찬란한 영웅의 성좌를 제외한 모든 성좌가 보이지 않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여태껏 소모한 것을 아직 채우지 못해 ‘성좌 회의’마저도 끝내지 못한 상태 아니던가.
하여, 아예 안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타났다.
아마도 나와 이자벨라의 관계에 흥미를 가진 것이리라.
“불길한 자여.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나 역시도 놀랐으니까.
······ 미친.
하마터면 왜 네가 여기서 나오냐고 말할 뻔했다.
메인 퀘스트 8이 시작되며 눈앞에 떠오른 파이살메르의 지도.
그 지도 위에 새겨진 점 하나.
오염원을 나타나는 그 점이, 정확히 이자벨라의 위치에 그려져있었으니.
‘오염됐다.’
이자벨라는 오염되어 있었다.
오염자들이 추앙하며 따르는 건 오직 오염원뿐이므로.
하지만 이자벨라는 다른 오염원과는 조금 달랐다.
‘변형은 이루어지지않았다. 다만······.’
변형 대신 흰색의 뱀이 이자벨라를 감싸고 있다.
저건 신비이나, 신비가 아니다.
‘초월자의 별. 그것도 구체화한 네임드 별이다.’
별이 저토록 선명하게 구체화한 경우는 거의 없다.
특정 ‘네임드’의 별들만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별들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지닌다.
요르문간드. 세계를 삼키는 저 뱀은 여태껏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별.
이자벨라에게 무슨 능력을 부여했을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이자벨라, 까악.”
“······?”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까악?”
“············?”
찰나지간 이자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불길한 저것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
이 특유의 간드러지는 ‘까악’소리를 그녀가 착각할 리 없었다.
이런 소리를 내는 존재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불길한 것’은 시체 까마귀가 아니다.
저건······.
‘아.’
이자벨라가 비틀대려는 신체를 겨우 바로잡았다.
머리가 아프다.
깨질 듯이 아파왔다.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 그리고 그런 이자벨라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오염의 영향인가보군.’
도리어 오염원이 되어서도 아직까지 정신을 지키고 있는 게 용하다.
어쨌든 내 말에 반응을 했다는 건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
“이자벨라. 왜 돌아오지 않고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다, 까악.”
“······ 닥쳐라. 제국의 악령이여.”
그러자 이자벨라의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
저 불길한 것은 제국에서 자신을 제거하고자 보낸 악령이다.
누군가를 흉내내고, 거짓된 말로 유혹하여 자신을 꾀어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촤아아악!
이자벨라의 손에 어느덧 새하얀 채찍이 들렸다.
뱀의 비늘로 뒤덮인 채찍을 휘두르자.
쉬이익!
피할 겨를도 없이, 몸이 속박됐다.
‘강제속박!’
공간을 격하여 강제로 속박시키는 스킬이다.
마치 뱀에게 둘러싸인 듯 온몸이 조여오기 시작한다.
··· 본래 없었던 게 생겨났다.
게다가 거인의 항마력도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이자벨라가 초월하며 얻은 능력임이 확실하다.
촤아악!
채찍을 한 번 더 휘두르자 압박에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뱀의 속박’이 2중첩되었습니다.》
《5중첩되면 요르문간드가 당신을 삼킵니다.》
단순 속박만이 아니라 중첩시 효과가 더해져있다.
한데, 요르문간드가 삼킨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사망효과인가?’
하기야 먹혀서 멀쩡하진 않을 테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요르문간드는 신성의 뱀. 어둠화를 쓰는건 자살행위다.’
그럼 어찌해야할까.
마지막 남은 수가 하나 있기는 있었다.
《‘속박’된 상태에선 ‘어둠’ 영역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촤악!
《‘뱀의 속박’이 3중첩되었습니다.》
··· 돌겠군.
영역스킬마저 억제시키다니. 뭐 저런 사기적인 능력이 다있나.
확실히 웬만한 수로는 이 속박 상태를 풀 수가 없을 것 같다.
‘최소 5초. 채찍을 휘두르기 직전 속박이 약해진다.’
그러나 세 번의 속박으로 알아낸 게 있었다.
속박이 약해지는 타이밍이 있다는 것.
5초에 한번씩 채찍을 계속 휘둘러야만, 속박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5초를 세고 다음 채찍이 휘둘러지기 전에.
《‘검강’이 발현되어 피해량이 50% 증폭합니다.》
《‘검강’이 ‘뱀의 속박’을 잘라냅니다.》
쩍!
속박이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내 몸을 두른 뱀을 잘라냈다.
이제 중첩은 피했······.
촤악!
《‘뱀의 속박’이 4중첩되었습니다.》
빠르게 속박된 자리를 벗어나, 허공에서 이자벨라를 노리려 하자.
······ 나는 허공에 속박되었다.
게다가 중첩효과도 그대로였다.
‘까다롭군.’
속박된 자리에서의 중첩이 아니라 속박 그 자체의 중첩이었나?
이거 생각이상으로 귀찮다.
1대1의 상황에선 특히나.
보통 이런 별의 능력은 별의 능력으로만 대처할 수 있다.
아니면 그조차도 압도하는 능력이 있거나.
‘휘두르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된다.’
압도적인 속박의 능력이긴 하지만, 미루어보건대 사정거리가 짧다.
긴 사정거리를 지녔다면 굳이 내앞에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
게다가 휘둘러야만 중첩되며 속박이 되는 듯싶었다.
그리하여 다시 5초.
훅!
순간적으로 튀어나가, 이자벨라의 머리맡에서 북천빙검을 휘둘렀다.
날아드는 채찍과 북천빙검이 부딪혀 휘둘러지는 건 막았다.
이로서 마지막 중첩은 피했을 터.
“···어리석은 놈.”
《‘뱀의 속박’이 5중첩되었습니다.》
······ 그런데 전부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속박이 시작됐다.
설마 처음부터 채찍을 휘두르는 행동 자체가 페이크였나?
원래의 이자벨라라면 이런 페이크를 쓰지 못한다.
내 옆에서 내가 싸우는 걸 보며 배운 게 분명하다.
···제법이군.
결국 마지막 5중첩이 이뤄졌다.
스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채찍이 거대한 뱀으로 변한다.
캬아아아아.
뱀은 입을 열고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며 나를 삼키려했다.
속박되어 뱀의 먹잇감이 된 나를 보며, 아무런 감정없는 눈빛으로 이자벨라가 입을 열었다.
“요르문간드에게 먹혀 죽거라. 제국의 악령······ 아!”
이자벨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러자 요르문간드의 움직임도 멈췄다.
···휴.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닿았으니까.
《상대에게서 ‘어둠’이 피어납니다.》
《‘끔찍한 흉조의 눈’이 눈을 뜹니다.》
닿기만 하면, 상대를 어둠 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
어둠 스킬의 보유자는, 항시 어둠의 상태였으므로.
그리하여 끔찍한 흉조의 눈을 강제로 띄울 수 있었다.
주인이 못 움직이니 요르문간드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요르문간드’가 당신을 삼킵니다.》
음?
분명히 요르문간드는 눈앞에 있다.
아직 나를 삼키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런 문구는 왜 떠올랐을까.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쩌어어억!
······ 요르문간드는 나를 삼킨 게 아니라, 바로 옆에있던 이자벨라를 삼켜버렸다.
스아아아아아아!
그러자 ‘끔찍한 흉조의 눈’의 속박이 풀리며, 요르문간드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뭐냐 저건.’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저게 진짜 별이라고?
네임드는 하나같이 괴랄하다지만, 저딴 별은 처음봤다.
주인을 삼키고 멋대로 움직이는 별이라니!
캬아아아아!
《‘요르문간드’가 당신을 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