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몰려옵니다!”
“여왕폐하! 저 이단의 어둠을 벌하시옵소서!”
사막 위에 지어진 왕궁.
그 안에서 전사들이 무릎을 꿇은 채, 왕좌에 앉은 한 여인을 경배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모두 오염되어 있었다.
제대로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 광적으로 따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
하지만 사막여왕은 죽었다.
구심점을 잃은 그 전사들은 더욱 강하게 뭉쳐 새로운 여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혈의 왕좌에 앉은 여인.
피도 눈물도 없는 자만이 앉을 수 있는 냉혹한 자리.
그곳에, 이자벨라가 앉아있었다.
이자벨라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눈빛.
무감정한 눈으로 이자벨라가 전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손 위로 하얀색의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르문간드······!”
“아아, 세계를 삼키는 뱀이시여!”
신비, 요르문간드.
10레벨에 이르면 자연적으로 ‘요르문간드의 별’을 찾아주는 신비다.
그리고 지금, 이자벨라는 그 신비를 일으켜 별을 찾은 뒤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별을 먹은 초월자.
그것도 ‘네임드’의 별을 먹어, 일반적인 초월자들보다도 더 상위의 존재가 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은 사막을 잇는 것.
여왕의 빈자리를 차지는 게 전부였다.
여기에 별을 먹고, 목적도 이뤘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있을 일은 없으나.
‘내 근원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별을 먹고 초월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간 수많은 ‘기억’들에 의해.
제국의 데르시안 가문.
그곳에서 태어나 지내며 ‘신병’에 걸렸던 기억들이.
신병에 걸린채 조종당하며 인형으로 살아왔던 순간들이.
전부 뇌리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버려졌다.’
제국의 데르시안 가문은, 그녀가 신병에 걸리자 새로운 ‘분신’을 내놓았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는 사라진 세상.
근원을 찾아 돌아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돌아가봤자 환영도 받지 못할 테니까.
도리어 자신을 가짜로 몰며 죽이려 들 테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였고, 도려내고 싶은 살점이었으니.
게다가.
‘나를 조종한 자. 플레이어······.’
별을 먹어 각성한 그녀는 훨씬 더 멀리 있는 ‘너머’에 닿았다.
자신의 기억을 지운 채, 멋대로 몸을 움직인 자.
체스의 말처럼 이용한 자가 있다.
그를 ‘플레이어’라고 부른다지.
‘그 남자의 얼굴.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이자벨라는 자신을 조종한 남자 또한 보고 만 것이다.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남자를 말이다.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가문에서 버림받지도, 파이살메르에서 눈을 뜨지도 않았으리라.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몰랐다면, 모른 채로 살았다면, 이러한 감정을 느끼진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각성한 순간, 별을 먹은 순간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떠올랐으니까.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마치 노예의 각인처럼 깊이 새겨진 저주.
그녀는 앞으로 영원히 이 저주를 안고 가야만 한다.
차라리 이곳 사막에서 영원히 묻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후우우.
숨을 깊게 들이마신 이자벨라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어둠은 이제 곧 파이살메르를 덮치려고 하고 있었다.
재회
《‘더 깊은 심연의 바알’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기여도 순위가 공개됩니다.》
《1위 ‘???’ 1,250,000점》
《2위 ‘구원자 그라시아’ 100,000점》
《3위 ‘저주의 종 학살자 바르무슈’ 50,000점》
《4위 ‘버서커 발테’ 20,000점》
《5위, ‘전달자 민트초코맛있어요’ 10,000점》
《6위, ‘미소의 허드슨’ 5,000점》
······.
심연 속에서 워프가 열렸을 때.
그라시아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가 해당하는 창을 보았다.
기여도와 그 순위를.
‘125만점, 물음표라.’
수십만의 사람들을 구조한 자신보다도 열 배가 넘는 기여도를 달성하며, 바알을 혼자서 제거한 자가 바로 물음표였다.
그라시아는 나머지 순위권자들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바르무슈, 발테.’
바르무슈는 저주의 종을 정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버서커 발테, 창술사인 그는 ‘무의식의 극치’를 본 자였고.
저주에 의해 정신이 나가자 ‘무의식’이 발동하여 일정범위 안으로 다가오는 모든 저주의 종을 공격한 것이다.
이처럼 이름 앞에 달린 ‘수식어’는 심연에서의 역할을 설명한다.
‘민트초코맛있어요······ 끝내 놈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은 건 민트초코맛있어요 뿐이었다.
‘전달자. 무엇을 누구에게 전달했다는 거지?’
보낸자가 있으면 받는자도 있기 마련.
그러나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엇을 보내고 누가 어디서 그걸 받은 건지.
분명한 건 민트초코맛있어요도 그 심연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서.
그 상황에서까지 말이다.
‘물음표는 아마도 란돌프일 거다. 오주력 란돌프, 그 끔찍하기 그지 없던 흉조일 터.’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가장 중요한 건 1위의 이름에 관해서였다.
세 개의 물음표는 아마도 오주력 란돌프일 것이다.
그 끔찍하기 그지없던 거대한 흉조.
바알을 제거했다면 그 흉조밖에 없다.
시체 까마귀의 왕, 불길함의 제왕과도 같던 존재.
머리가 바알에게 먹혔으나 바알의 내부를 침식해 죽인 것이 분명했다.
‘······ 이후 오주력 란돌프는 검은 알에서 진화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심연의 모든 이가 워프로 강제 송환되었을 때, 그라시아만큼은 최대한 버티며 ‘검은 알’이 깨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데 ‘검은 알’이 깨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왜 인간의 형태였던 거지?’
잘못봤을 리가 없다.
확신했다.
알에서 나온 것은 인간이었다.
허나 그 끔찍한 흉조가 ‘오주력 란돌프’라면 절대로 인간이 될 수 없다.
백왕이 보낸 공문에도 분명히 ‘시체 까마귀의 왕’이라고 적혀있었으니까.
시체 까마귀가 진화한다고 인간이 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부터 인간이었다면 모를까.
‘검은 알에서 깨어난 존재는 그 어느 것보다도 순수한 상태였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었지.’
바알은 죽었다.
제거했다는 알람과 기여도의 점수를 보면 확실하다.
검은 알에서 나온 게 바알이 아니고, 오주력 란돌프라면, 그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만에 하나, 물음표가 오주력 란돌프가 아니라면.’
흉조를 보고서 오주력을 떠올린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이 틀렸다는 가정도 세워야할 듯싶다.
처음부터 모든 게 그라시아의 착각이고, 아예 다른 존재일 경우.
‘······ 분명히 그 얼굴은.’
자세하게는 못 보았지만, 틀림없이 보았다.
알에서 깨어난 자의 얼굴을 말이다.
그라시아는 그 얼굴을 심연에서 나온 뒤 끊임없이 복기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집착과도 같다.
허나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분명히······ 히드라곤의 주인. 그와 비슷한 얼굴이었을진대.’
*
-팬텀은 뭐하고 있을까?
‘제주도 소실’ 사건 이후 플레이어 톡에 이와 같은 글이 올라오자, 플레이어들이 댓글식으로 답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메인퀘 밀고 있겠지
-8이면 오염원 정화작업이었나?
-왜? 찾아보려고?
-어차피 메인퀘 8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못찾음
-오염원 제거 퀘스트는 도시마다 어느정도 있으니까
메인 퀘스트 8은 ‘오염원’을 하나만 제거해도 성공한다.
그리고 ‘오염원’은 천공에 있는 모든 도시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직접 도시의 주인이 제거할 때도 있지만, 의뢰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하여, 이것만으로 팬텀의 행방을 쫓는 건 불가능했다.
-음. 너무 흔해서 전당에 오르기도 쉽지 않지
-팬텀 정도면 이미 오염된 도시를 공략하지 않을까?
-요즘 그런 도시가 어딨냐?
-맞아. 오염원 생기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거하는데
-아예 오염원만 제거하는 전담자들도 있는 시대잖아
오염원이 나타나면 도시의 주인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을 방치하는 도시의 주인이 있을 리 만무하거니와, 설령 도시가 공백상태일지라도 ‘도시의 계승자’를 항상 두기 마련이었다.
주인 없는 영역일지라도 ‘오염원’이 생기면 그 공간의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제거한다.
일부러 오염원을 제거하지 않는 게 아닌 이상에야, 도시 전체가 오염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일부러 오염원 놔두면 어떻게 됨?
-듣기로는 오염된 다른 종이 태어난다던데
-‘마왕’이 오염원에서 탄생했다는 썰도 있잖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여기 없을걸?
그때였다.
-오염원이 특정 숫자를 넘기면 서로 경쟁을 시작한다. 오염원 하나가 제거될 때마다 다른 오염원은 강화되고, 최후의 오염원이 결국 ‘왕’이 된다.
-???
-진짜임?
-소설 쓰고 있네. 그걸 네가 어케 아냐
오염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의 글.
그가 이어서 또 다른 글을 올렸다.
-그 영역에 있는, 오염에 영향을 받은 자들은 ‘오염원’을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후 ‘왕’이 된 오염원은 추종자들마저 먹어삼키곤 ‘불멸자’로 거듭난다. 반신이라 부르기도 하지.
*
《‘어둠’이 부족합니다.》
《‘어둠’의 충전을 위해선 48시간이 필요합니다.》
오염원 여섯을 제거한 순간이었다.
충전된 ‘어둠’이 부족하다며 전개된 영역이 무로 돌아간 것이다.
48시간. 무려 이틀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받침대. 내놔라, 까악.”
“··· 검은 제가 다루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손을 내밀자, 아리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검술을 모르는 나보단 자기가 휘두르는 게 낫지 않겠냐는 뜻이다.
“내놔라, 까악.”
“······ 알겠습니다.”
허나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자, 아리아는 반쯤 포기한 듯 눈을 꾹 감은 채 북천빙검을 내게 넘겼다.
손에 착 감기는 감각.
휙휙 휘두르자 반응이 왔다.
-꺄악! 어딜 만지는 거야!
음. 에고소드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골통파괴자와는 다른 맛이 있었다.
‘아직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지진 않았나보군.’
하지만 휘둘러보니 확실히 알겠다.
북천빙검은 아직 흉조의 눈에 완전하게 지배당하지 않았다.
완전하게 지배했다면, 아리아와의 계약도 강제로 끊겼을 테니까.
그리고 무언가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휘둘러보면, 답이 나오리라.
휘이이익!
촤악!
그러던 순간 날아온 화살 하나.
닿기 전에 잘라내자 저 멀리서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주력님. 지금은 한 발 물러날 때입니다.”
아리아가 다급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지금까진 거의 버그성 플레이였다.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오염원이 제거됐으니까.
이제부터가 본게임이다.
북천빙검을 들고, 날아오는 화살들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쩌어억-!
허공에 얼음의 막이 펼쳐지며 날아드는 화살을 전부 막아냈다.
“그, 그 기술을 어떻게 벌써······?”
순간 아리아가 경악했다.
단순히 닿은 걸 얼리는 게 아니라, 특정 공간에 얼음의 막을 흩뿌리는 기술은 그녀도 이제 막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므로.
북천빙검을 다루려면 본인의 자질은 물론이거니와, 북천빙검과의 정신적인 교류도 필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얼음의 막이 쪼개지며, 날카로운 고드름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 고드름들은 화살을 날린 바바리안들에게로 향했고.
휘이이익!
수백, 수천의 고드름이 그들에게 역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푹! 푸푸푸푹!
“컥!”
“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