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르르르르릉!
백왕전이 크게 흔들린다.
콰르르르르르!
백왕전의 벽면이 무너지며, 고막을 뚫은 듯한 파공음과 함께, 크람델 전역에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
크람델의 괴물들은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이만한 지진은 여태껏 전례가 없었다.
지진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공격해온 것일진대.
문제는 이 흔들림의 진원지가 백왕전이라는 것이다.
“설마 백왕전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는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백왕님을 공격한다고?”
“대체 어디서?”
“그럼 메두사님이 먼저 발견했을텐데?”
외부의 공격은 아니다.
누군가가 내부에서 백왕전을 공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사주력의 눈을 피해 백왕전까지 흘러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백왕전이 공격받은 것은 크람델이 생긴 뒤 두 번째였다.
“······ 백왕께서?”
궁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을 준비하고자 백왕전을 떠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게다가 이 공격은 분명 백왕이 발산한 것이었다.
지면을 뒤엎는 ‘용오름’은 백왕의 주특기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왜?
갑자기 백왕이 백왕전에서 용오름을 사용한 이유가 뭘까.
현재 백왕전에 있는 자는 딱 셋이다.
백왕, 아리아, 그리고······.
“······ 오주력!”
궁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오주력이 있었다.
아리아와의 만찬을 맞이하고자.
백왕의 심기를 거슬리고, 백왕이 직접 공격할 정도의 존재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오주력뿐이었다.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기가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갔다.
*
궁기와 메두사, 대토룡.
현재 크람델에 남아있는 모든 주력들이 소란을 느낀 즉시 백왕전으로 향했다.
콰릉! 콰르르릉!
반쯤 무너진 백왕전의 위치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건 용오름 직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곤 먼지가 피어나며 번개가 내리치듯 검은 태풍이 만들어졌다.
저 안쪽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근처까지 다가간 주력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끝났군.’
······ 끝났다고.
첫 ‘용오름’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반응이나 공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용오름’에 의해 한 방에 분쇄되었다는 말.
하기야 용오름을 정면에서 맞고 살아있을 존재는 없다.
이는 다른 주력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저 가공할 공격을 어찌 버티겠는가.
아마도 상대는 오주력일 터.
“오주력이 죽었나보군.”
쯧쯧쯧. 대토룡이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백왕에게 기어오르다가 이 사단을 낸 게 분명하다.
언제까지 백왕이 참아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결국 넘을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미친 까마귀여.’
처음부터 알아봤다.
까마귀가 미쳐도 곱게 미쳤어야 하거늘.
결구 미친 까마귀가 선을 넘었고, 임계점이 온 것이리라.
그간 백왕을 너무 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백왕은 한 번 돌아서면 가차없는 자다.
특히 적, 혹은 배신자라 생각한다면 죽을 때까지 물고 놓지 않는다.
‘역시 생각보다 별볼일 없던 놈인 게 틀림없다.’
다만, 그 미친 까마귀가 조금은 반격을 할 줄 알았다.
처음 등장부터 요란하기 그지 없었으니.
백왕도 하지 못한 신화의 탑을 완성하고, 망자의 왕 아흐람을 봉인했으며, 심연 미궁까지 접수한 그 저력만큼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 방이라.
과대평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보여준 업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체는 허약한 시체 까마귀일 따름.
백왕에 비하면······.
“허억! 백왕전이!”
“주, 주력님들. 백왕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백왕께선 무사하신 거죠?”
크람델의 주민들도 덩달아 몰려들었다.
크람델 중심부에 있는 백왕전이 무너졌으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수천의 규모로 늘어난 괴물들.
하지만 그들의 물음에도 주력들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 태풍이 걷힌다.”
궁기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말마따나 태풍의 위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곧이어 검은 태풍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풍의 눈’안에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
“저건···!”
“백왕님이 오주력님을 왜?”
동시에 괴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악을 내뱉었다.
특히 오주력을 알아본 자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백왕의 손이, 오주력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한데, 이상하다.
······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살아있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오주력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가슴팍이 꿰뚫렸다면 즉사해야 정상이건만.
그것도 평범한 존재도 아닌 무려 백왕의 공격이다. 격이 다른 그 공격은 자르지 못하고 꿰뚫지 못할 게 없었다.
심지어 영혼마저도 베어낸다.
그런데 오주력이 살아있다.
너무나도 멀쩡하게.
도리어.
“왜 둘다 안 움직이는 거지?”
“백왕님의 가슴팍에 웬 눈이······.”
“까마귀의 눈?”
그랬다.
오주력을 꿰뚫은 채 정지한 것처럼 멈춰있는 백왕.
그의 가슴팍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까마귀의 눈이 돋아 있었다.
저 눈에 의해 백왕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저 까마귀의 눈이 전부 뜨이면······.
꿀꺽!
모두가 긴장한 채 두 명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부녀가 쌍으로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버릇을 지녔구나, 까악.”
······ 오주력이 입을 열었다.
*
부전자전.
아니, 부전여전이 이런 걸까.
말을 채 듣기도 전에 먼저 공격을 해오는 건 아리아나 백왕이나 똑같았다.
《‘어둠을 피우는 자’의 스킬 ‘어둠화’에 의해 공격을 무시합니다.》
《다만, 주의하십시오. 이 상태에서 ‘어둠을 피우는 자’는 ‘빛’과 ‘신성’ 계열의 공격에 1,000%의 추가된 타격을 입습니다.》
《‘끔찍한 흉조의 눈(10Lv)’이 발동합니다.》
《백왕이 ‘피어나는 어둠’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백왕의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어둠 그 자체가 되는 ‘어둠을 피우는 자’의 스킬, 어둠화.
무적은 아니지만 그만한 수준의 무시를 해버리는 놀라운 스킬이다.
지속시간은 30초.
물론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한 번 켜면, 내 마음대로 끌 수 없다.
게다가 이 상태에선 태양빛마저도 아프다.
정통으로 빛, 혹은 신성 계열의 공격에 당하면 진짜 뒤가 없을 것 같다.
허나 백왕은 그 두 가지의 속성을 지니지 않았다.
또 상대가 나를 공격 못하듯이, 나도 공격을 못한다.
‘끔찍한 흉조의 눈은 어둠화 상태에서도 쓸 수 있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은 바로 ‘끔찍한 흉조의 눈’이었다.
북천빙검의 소유권을 일시적으로 강탈한 스킬이 바로 이것이다.
“재밌는······ 장난을 치는구나.”
문제는 백왕이 진짜로 미친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백왕의 가슴팍에 떠오른 ‘끔찍한 흉조의 눈’이, 전부 떠지지 않았다.
눈을 전부 떠야 강탈해오는데 백왕이 그것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백왕은 조금씩 ‘본체’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
그래서일까.
흉조의 눈이 조금씩 감겨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어둠화도 풀리고, 흉조의 눈도 감길 터다.
그 이후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아리아는 살아있다, 까악. 아니면 끝을 보자는 거냐, 까악?”
“살아있다······ 고? 허나 너는 분명히 ‘귀속’을······.”
“그래서 맛보기로 보여주지 않았느냐, 까악. 나의 ‘강탈’의 권능을 말이다, 까악.”
“······.”
백왕이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이 눈.
북천빙검에 새겨진 까마귀의 눈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게 오주력의 권능이리라.
귀속의 장비마저 빼앗는 절대적인 권능.
직접 겪어보니 이해가 뙨다.
그럼 지금 오주력은 자신의 오해를 풀고 이해를 돕고자, 직접 새겨넣었다는 말인데.
“계속 할 테냐, 까악?”
격렬한 저항이 사라지자, 나는 천천히 ‘끔찍한 흉조의 눈’을 풀었다.
그도 그럴 게, 나 역시 이미 한계였으니까.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게 그나마 최선일 정도로.
‘지금 상태로도 몸을 묶는게 고작이로군.’
그래도 많이 따라왔다.
예전이라면 저 ‘용오름’ 한 방에 먼지가 되었을 테니.
도리어 반격까지 한 지금의 내가 말도 안 될만큼 강해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백왕이 아니라 주력이었다면, 더 해볼만 했으리라.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허나, 오해였다면 사과하마.”
자유의 몸이 된 백왕이 빙결된 아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용케 아리아는 무사했다.
그만한 스킬을 쓰면서 이 정도로 세밀하다니.
허나 놀라고 있을 때만은 아니었다.
-뭐, 뭐야! 그만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흉조가 다시 눈을 뜨자, 북천빙검의 자아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놈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지배하긴 했어도, 아리아를 얼린 건 내 의지가 아니다.
그건 북천빙검이 얼린 것이다.
‘부숴버려야겠군.’
-부, 부수지마. 알았어, 미안해! 히잉!
흉조가 눈을 전부 뜨려하자 결국 북천빙검이 백기를 흔들었다.
이윽고.
스으으으으으.
빙하가 녹았다.
아리아의 몸이 떨어지기 전, 백왕이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
“······ 살아있군.”
“그러니까 말은 끝까지 들어라, 까악. 그리고 먼저 날 공격한 것도 그 녀석이다, 까악.”
“아리아가······?”
백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수긍했다.
아리아라면 그럴 수 있다.
설마 오주력에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파르르르.
백왕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이어, 그가 내게 말했다.
“······ 미안하다.”
백왕이, 사과했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지만 단순히 ‘사과’로만 넘길 수도 없는 노릇.
“오주력이여. 무엇을 원하느냐?”
아리아와 자신의 실수를 무엇으로 보상받고 싶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