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 회의
‘대참사라.’
흉신 바알을 처리하고 심연을 벗어나자 떠오른 수많은 창들.
압도적인 기여도와 함께 백성전의 성좌 스물일곱이 빛을 잃었다.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을 때도 열일곱 성좌가 빛을 잃었지.’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을 뿐만이 아니다.
라일리를 쓰러트려 거짓 신화를 완성했다. 특히 황금률의 사용 시간이 합산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점수를 얻었다.
그때와 같지만, 그때보다도 더 많은 성좌가 사라진 상황.
‘··· 바알과 관련된 퀘스트는 계속 급을 높였으니.’
처음 바알이 등장했을 때에는 ‘토벌’에 중심을 뒀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참가할 수 있게끔 말이다.
하지만 이후 다섯 도시가 가라앉고 심연에 떨어지자, 바알은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어버렸다.
대상이 진화했으니 퀘스트의 등급도 올라가는 게 인지상정.
문제는 그 이후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고, 그 너머 ‘더 깊은 심연’의 완성 직전까지 간 것.
끝없이 퀘스트의 등급이 오르며, 약간의 기여도조차 엄청난 점수로 돌아오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거기다 나 혼자 바알을 처리했으니.
정해진 보상의 규격을 넘어선 규격 외의 기여도.
‘강제로 보상의 등급을 올리는데, 백성전의 성좌들이 투입된 거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보상의 등급도 올리면 된다.
그리고 보상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성좌’에 달렸다.
결국 나를 지켜본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투여됐고, 기여도에 맞는 보상의 등급까지 강제로 올리며 그 결과 27명의 성좌가 빛을 잃은 것이다.
전례 없는 대참사.
《‘성좌 회의’가 시작됩니다.》
《회의가 완료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들 역시도 처음 겪는 일이었을까.
바로 보상목록을 내놓지 않고, ‘회의’를 하는 건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물론, 약간의 의문은 있었다.
이미 보상등급을 올려서 확정된 것 아닌가?
아니면 101단계의 보상등급을 올려도 부족해서인지.
‘뭔가가 더 있나보군.’
그래도 주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터.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조급한 건 내가 아니라 저 성좌들일 테니까.
*
“······.”
백성전.
백 성좌의 자리.
그중 27개의 빛이 스러진다.
이어 존재감을 잃으며, 사라졌다.
남은 73명의 성좌는 침묵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만한 ‘이야기’가 완성되리라곤 그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스러졌군.”
찬란한 영웅의 성좌.
과거 데미갓 특성 던전에서 내기를 걸었던 존재.
그가 빈자리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쓸데없이 ‘별빛’을 풀어댔으니까. 게다가 저런 놈이리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모험의 성좌.
‘모험’의 별자리를 맡은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런 놈이란, 란돌프를 말하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열일곱의 성좌는 란돌프의 가능성을 너무 낮춰 봤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별빛’을 인간들에게 마구 뿌려댔고, 미처 회수하기도 전에 이번 이변으로 인해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 일은 과하다. 이 이야기의 ‘가치’가 너무 높게 책정된 것 아닌가?”
‘저주받은 성좌’가 불만을 쏟아냈다.
그들은 책을 읽는 독자에 가까운 존재들.
멀리서 바라보는 별들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려면 ‘가치’를 지불해야만 했다.
특별한 이야기는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게 당연하다지만, ‘란돌프’의 이야기는 유독 높은 가치로 측정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이야기는, 필요 이상으로 과하다.
“비싸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안 보면 되지 않나?”
모험의 성좌가 빈정댔다.
안 보면 되는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지만, ‘란돌프’의 이야기는 애써 안 보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신화. 불가능의 도전. 역격과 낭만. 이색적인 방식까지.
그 모두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그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는 좀처럼 없는 탓이다.
모험의 성좌가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보라고 협박한 것도 아닐 텐데. 무엇보다 저만한 ‘집필자’는 그가 유일하다. 그의 이야기는 공허한 우리를 채워주며, 격을 높여주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래서 아닌가?”
“······ 너는 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나보군.”
“난 오히려 적다고 생각한다만. 이제는 같은 이야기를 본 게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군.”
모험의 성좌는 흥분하고 있었다.
란돌프의 모험은 언제나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가 란돌프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라일리와 지고룡’에 관한 것이지만, 이번 ‘바알 사냥’ 역시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격차.
그것을 ‘가장 찬란한 빛의 성좌’로 뒤집었다.
끔찍한 흉조가 되어 바알을 압박했으나 ‘버그’로 인해 사망했다.
이어진 ‘영원의 란돌프’에 의한 부활까지!!!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는 명작이다.
버그를 더한 버그로 찍어 누른 격.
라일리의 이야기는 감동을 주었지만, 바알 사냥은 순수한 재미 면에선 대적할 게 없을 만큼 훌륭한 완성이었다.
그것을, 과하다고?
“그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우리가 저 기여도를 ‘상쇄’시키지 않으면 더한 ‘혼돈’이 일어날 것이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막아섰다.
성좌끼리의 다툼이 좋을 리가 없으므로.
지금은 대책을 회의할 때였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보상등급을 올리며 27명의 성좌가 빛을 잃었지만, 아직도 저 ‘기여도’는 상쇄되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처럼 우리의 보물을 내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한 성좌가 의견을 꺼냈다.
하지만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물을 구체화할 정도의 별빛을 지닌 자가 있나?”
손을 드는 성좌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번 ‘바알 사냥’을 통해 막대한 ‘별빛’을 소모했으니까.
이번뿐만이 아니다.
‘란돌프’의 이야기는 몇 번이나 그들을 탕진시켰다.
“또한, 저 기여도는 보상으로 ‘유일급’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유일급 보상이라니?”
“찬란한 영웅의 성좌여. 신화 등급을 넘어서는 보상은 우리에게 권한이 없다.”
그렇다.
유일 등급의 보상은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올려줄 수 있는 보상의 등급은 최대 신화급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에게 ‘특혜’를 제안하여, 보상을 인정하게 하는 것.”
그러자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백성전의 성좌가 집필자와 거래를 한다고?”
“전례가 없던 일이다.”
“대체 무슨 특혜를?”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우리가 맡고 있는 ‘상점’을 이용한다면, 어떠한가?”
*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서진 황금률의 아주 큰 조각(300h)’을 획득했습니다.》
《‘온전한 황금률’을 획득했습니다.》
《아래의 보상 중 한 가지 보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소생 인형》, 《저주받은 탈리스만》, 《다크 레이스》, 《신봉자의 촛대》, 《고의 갑옷》, 《쌍둥이 흉조》, 《질척이는 자의 신발》
《보상을 선택하면 ‘모든 상점 10% 할인’의 추가혜택이 주어집니다.》
··· 뭐냐, 이건.
보상목록은 여전했지만 그 아래, 추가혜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저런 게 나타난 걸까.
‘모든 보상이 신화 등급 아이템이긴 하지만, 바알 사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27명의 성좌가 빛을 잃었을 정도다.
그만한 보상이라면 정말 유일급이라도 내놓아야 되는 게다.
하지만, 그것만은 힘들었는지 다른 추가적인 혜택을 논의하고 있었다.
‘상점이라면 황금률 상점을 말하는 거겠지.’
설마 백성전의 성좌들이 황금률 상점과 연계되어 있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 앞으로 메인 퀘스트를 밀면 또 다른 상점이 나온다는 뜻이군.’
‘모든’이란 수식어가 붙은 걸 보면, 황금률 상점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
퀘스트를 진행하면 더 나타나는 상점이 있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10%의 할인은 엄청난 혜택이 맞다.
당장 황금률 상점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거절한다.”
아무리 그래도 10%는 좀 적다.
‘어딜 날로 먹으려고.’
바알을 사냥하고자 쏟아부은 게 얼마인가.
40억 골드의 가치로 ‘가장 찬란한’ 접두사를 붙인 빛의 옥좌와 온전한 황금률, 거기에 부활의 기회까지 갈아 넣었다.
신화 등급 아이템 하나와 10% 할인만으로 퉁 치기엔 많이 부족하다.
《보상을 거절하시겠습니까?》
《거절하는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백성전에 전달됩니다.》
“내가 호구로 보이나?”
《백성전에 전달 완료되었습니다.》
《‘성좌 회의’가 진행됩니다.》
··· 역시나. 백성전이 내게 ‘거래’를 제안한 건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이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듯싶었다. 모조리 빛을 잃고 증발한다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은 이뤄져야겠지.’
백성전은 단순히 보상만 올려주는 곳이 아니다.
앞으로의 진행에서 어떠한 역할을 추가로 하여 도와줄지 모르는 곳이었다.
괜히 적대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거래하면 될 것 같았다.
‘물론, 적당한 선은 내가 정한다.’
다만, 그렇다고 염가로 후려쳐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워프를 넘었다.
그러자 눈앞에 괴물의 도시, 크람델이 펼쳐졌다.
미궁 도시와 연결된 특별한 워프.
예전에 이 워프를 통해 넘었을 땐, 사왕이 나를 맞이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왕이 없었다.
“넌 뭐냐. 어떻게 이 워프를 넘어왔지?”
“이 워프는 ‘오주력’만 넘을 수 있도록 설정된 워프인데?”
붉은색 투구를 쓴 괴물쥐들.
크람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관리자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워프를 지키도록 명을 받은 상태였다.
이곳, 미궁과 연결된 이 워프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소실됐다.’
대식가 특성은 하나의 특성만을 유지할 수 있다.
시체 까마귀의 왕으로 지녔던 모습을, ‘어둠을 피우는 자’가 되며 소실한 것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허. 정말 끔찍하게 생긴 놈이로군.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죽이겠다.”
적대적으로 나온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품에서 ‘인장’을 꺼내들었다.
“··· 오주력님의 인장패?”
“서, 설마?”
까마귀의 인장이 새겨진, 백왕이 직접 만들어 건네준 증명패.
이것을 본 괴물쥐들은 더욱 적대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주력님을 죽인 거냐?”
“다른 주력님들께 보고를······!”
그 순간 일사분란하게 괴물병단이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오주력을 죽인 괴물이 크람델을 습격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오주력이다, 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