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라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콰르릉!
순간 벼락이 쳤다.
하늘을 배회하던 천 자루의 검 중 하나가 벼락처럼 주변에 꽂힌 것이다.
반으로 쪼개져 죽은 시체를 보면, 겁을 먹고 물러날 터.
“고, 고기 냄새!”
“저······ 저 고기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 아아.
미쳐버렸다. 진짜로 미쳐버린 거다. 심연이 저들의 정신을 나가게 했다.
그라시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전부 죽인들, 끝이 날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선 절대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건 지도력에 금이 갔다는 뜻.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겠구나.’
-버러지처럼 죽든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그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버러지처럼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 인간으로서 죽기 위해선.
서로가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라시아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볼 수 있게끔, 이들을 모조리 도륙할 작정으로.
“아, 알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달려와 그라시아에게 보고했다.
“알?”
“예! 검은 알 말입니다!”
이맛살을 구긴 그라시아가, 빠르게 이동하였다.
바알의 배에서 나온 검은 알.
그것에 금이 갔다면 곧 부화한다는 의미였으니.
이어 심연의 중심부로 다가간 그라시아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쩌적!
······ 정말로 검은 알에 금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안에서 대체 무엇이 부화하는 것일까.’
완성된 바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는지.
알 수 없다.
예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존재는 아닐 거라는 것.
그라시아와 주변의 모든 이가 잔뜩 긴장한 채, 알의 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125화. 심연의 지배자
“오오!”
“깨어난다!”
“신께서 깨어나신다!”
초췌해진 몰골.
앙상한 몸을 한 수많은 사람이 ‘검은 알’의 탄생에 대해 떠들었다.
‘검은 알’에 대한 의견은 처음부터 분분했던 탓이다.
바알의 진화 형태, 혹은 바알을 죽인 신.
부화하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검은 알’에 무릎 꿇으며 ‘기도’했다는 것이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게 무엇이든, 제발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한 달이 넘도록 심연에 갇힌 사람들은 간절했다.
느닷없이 끌려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나마 그라시아가 강력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이미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리라.
서로가 물어뜯고, 죽이며, 잡아먹는.
이미 ‘검은 알’은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추앙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저 검은 알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양손을 합장한 채 검은 알을 둘러싼 수십만의 광신도들.
굶주림과 피폐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라시아도 이 광적인 물결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라시아님. ‘더 깊은 심연’의 존재가 나올까요?”
한 플레이어의 물음에 그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게 뭐가 됐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
60만의 목숨이 그들의 손 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라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었다.
그리고.
‘천검이여.’
천 자루의 검을 허공에 띄워, 검은 알의 주변에 수놓았다.
깨어난 상대가 바알이라면 그 즉시 공격할 수 있도록.
치직. 치지지직!
천 자루의 검에서 청색의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라시아의 두 눈에서도 마치 번개와 같은 안광이 넘실댔다.
그라시아가 가진 최강의 스킬, 천벌(天伐).
천 개의 벼락을 꽂혀 상대를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공격.
촤르륵!
촤르르르륵!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마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필살기다.
준비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한 번 사용하면 근 일주일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기에, 그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최후의 비기였다.
“······ 설마 ‘천벌 모드’인가?”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저걸 맞고 살아난 자가 없다던데.”
일명 ‘천벌 모드’라 불리는 것.
플레이어들은 그 모습에 감탄하고 경탄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바알과 싸울 때도 저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과 달리, 그라시아는 더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땀이 맺히자마자 증발해서 그렇지, 너무 긴장한 탓에 정말 미친 듯이 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여러분!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최대한 물러나십시오!”
그러는 와중에도 시민들을 챙기는 자가 있다.
아름다운 여인.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녀만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곧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함께하던 염소탈은 고치 안에서 죽었을 텐데도.
‘아름답군.’
그라시아는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곧은 심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다 잡혔으므로.
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혹, 이게 사랑인가?
허나 그녀는 판게니아의 존재.
이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니, 그저 바라만 봐도 충분했다.
쩌저적!
“아···!”
“금이······!!
알에 가기 시작한 금이,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떠들던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침묵한 채, ‘검은 알’의 부화를 지켜봤다.
그리고.
스으으으으으으으.
검은 알에서 연기가 뿜어졌다.
연기는 곧 형태를 갖추어, 검은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유령. 아니······ 저건.
“사신······.”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사신이다.
그라시아를 지구 끝까지 쫓아오던, 그리하여 젊음까지 뺏어갔던.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
여태껏 보았던 사신과는 뭔가가 다르다.
“저, 저게 뭐야?”
“귀신? 부유령?”
“저승사자 아니야?”
“사신이잖아. 낫 든 거 안 보여?”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 그게 이상한 첫 번째 이유였다.
본래 사신은 ‘씐 자’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라시아를 쫓던 사신들을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모습.
“··· 얼굴이 바알과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 날개도······.”
········· 그러했다.
사신의 형태를 갖췄으나, 묘하게 바알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신의 등 뒤로 난 세 장의 날개 중 하나가 바알의 날개와 일치하였다.
그럼 저게 ‘더 깊은 심연’의 존재인가?
그라시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
-캬.
······캬?
뭐라는 거지?
-캬캬캬캬컄!
사신이 경쾌하게 웃으며 낫을 휘둘렀다.
공격인 줄 알고 그라시아가 맞받아치려 했으나.
그 사신이 낫을 휘두른 방향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허공에 낫을 휘둘렀다? 왜?’
곧이어 그라시아와 모두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쉬이이익!
쩌적!
강한 충격에 부딪히는 소리.
이어 단단한 외피가 깨지는 소리.
쿠르르릉!
······ 저 멀리서, 심연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미친
아무리 발악해도 꿈쩍하지 않던 벽이었다.
심연의 끝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장막 말이다.
그게 지금 무너지며, 그 너머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머의 공간. 거기엔, 또 다른 ‘심연’이 있었다.
“뭐··· 뭐야 저것들은.”
“아니······ 뭐야······.”
“아··· 아아······.”
동시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당연하다.
그라시아도, 플레이어들도,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공간의 너머. 어둠 위로 떠 오른 것들.
수많은 심연 속 괴물들의 ‘눈’이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 저 눈은 전부 심연의 지배자들이다.’
그라시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심연의 지배자들, 그들이 이곳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심연의 지배자’는 그 하나하나가 막강한 괴물이다.
이곳 바알조차도 심연의 지배자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다만, 그 숫자가.
······ ‘눈’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저게 전부 심연의 지배자라니.
대체 심연 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왜 그들은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건가?
그리고 저 사신은 어떻게 심연의 장막을 가른 것일까.
지잉.
지이잉.
지이이이잉.
그 순간이었다.
의문을 느끼고, 풀 사이도 없이.
사람들의 발밑에 수많은 ‘워프’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한 명당 하나씩.
족히 60만 개가 넘는 워프가 말이다.
“뭐, 뭐야 이건?”
“우리가 소환됐을 때랑 같은 거잖아!”
“워프! 워프다!”
“돌아가는 거야?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저 ‘검은 알’의 사신께서 우리를 돌려보내 주시는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검은 알의 사신님 만세!!!”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이 이곳에 소환됐을 때도 같은 워프가 생성되어 그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워프는, 그들을 강제로 재차 송환하고 있었다.
빠르게 사람들이 사라져간다.
워프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떨어진 사람들.
쩌적!
··· 알은, 분명하게 부화하고 있었다.
‘확인해야만 된다.’
저게 뭔지.
저 안의 존재가 무엇인지.
장벽을 부순 ‘사신’은 부속물 같은 것이다.
아직 진체(眞體)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라시아가 워프를 피해, 허공에 떠올랐다.
‘반드시 확인해야만 된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알에서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인류의 미래를 알 수 있노라고.
적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어떻게 생겼는지 라도 파악해놔야만 한다고.
지이잉!
하지만 워프는 집요하게 그라시아를 쫓아왔다.
지잉! 지이잉!
심지어는 더 많은 워프가 생성되며 그라시아를 강제로 송환시키려고 하였다.
그라시아는 입술을 깨문 채 전력을 다해 워프를 피하며 ‘검은 알’의 부화를 어떻게든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다.
이미 주변에 사람들은 없었다.
60만이 넘는 자들 모두가 워프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그라시아뿐.
그리고.
쩌저적!
마침내, 알이 완전하게 깨졌다.
‘저 모습은 분명히······!’
알에서 깨어난 존재를 본 그라시아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동시에 그라시아 역시도 워프에 발을 디뎌, 추락한 것이다.
*
“······.”
웅크리고 있었던 자세를 편다.
허리를 곧게 뻗고, 하체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보았다.
손바닥을 쫙 편 채, 어깨와 목을 돌리곤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군.”
-캬캬캬!
헬이 웃었다.
아까의 사신으로서 커다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작아진 채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일단 몸은 정상이었다.
···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났다.
‘영원의 란돌프.’
영원의 란돌프가 작동하자, ‘죽은 잿더미’에서 ‘13개의 히든 특성’이 일어났다.
이후 바알을 포식하고 ‘멸망의 조각’을 굴복시키며 육체가 다시 조립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나는 란돌프다.
외견적인 변화는 크게 없었다.
‘나는 나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된 것은 아니다.’
또한 영혼적인, 정신적인 면에서도 멀쩡하다.
그러나 틀림없이 나는 달라졌다.
성장했다.
······어쩌면, 진화라고 봐야 할지도 모를 만큼.
‘상태창.’
내 변화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창.
그것을 띄웠다.
<상태창>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직업(Class) : 지고의 검성
<능력치>
레벨 : 8
힘 : 117(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