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23화 (123/317)

심연의 끝을 확인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 역시도. 

-6일 차 

황무지.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 곳.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대로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알이 흉조의 몸통을 모두 흡수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8일 차. 

고오오오. 

이른 아침. 묘한 소리와 함께. 

··· 바알이 깨어났다.

흉조의 불길함을 더 끼얹은 채로.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깨어난 바알은 한참을 심연 속을 서성거렸다. 

-9일 차 

어제부터 바알이 자해를 하거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라시아가 용감하게 접근하여 바알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서 서로 무언가가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자아분열이라도 일어난 걸까? 

-15일 차 

한참 발악하던 바알이 다시 멈췄다. 

쓰러지곤, 숨을 헐떡이더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죽은 건가? 

하지만 죽은 게 아니었다. 

진화를 끝마친 것이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더 깊은 심연으로. 

······ 그런데 저건 뭐지? 

바알의 배가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색의 알이 나타났다. 

설마 저게 깨지면 진짜 끝나는 걸까? 

분명한 건, 저 알이 나타난 뒤 심연을 둘러싼 ‘장막’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탈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사흉 바알. 

흉신이라 불리며 재앙과도 같았던 그 존재가. 

지금, ‘먹히고’ 있었다. 

-어그적! 어그적! 

불길한 형상을 한 무언가에.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알은 죽을 만한 위협을 느끼면 ‘숨겨둔 것’이 튀어나와 상대를 죽이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죽였건만, 어떻게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바알은 저항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 처음 마주한 이후 ‘그것’은 자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 

바알조차도 처음 접해본 그것이. 

접한 순간, 바알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과도 같았으나 더욱이 두려운 것이었다. 

생명과 저주 그 자체라 불려지던 자신보다도, 흉신보다도 더더욱 흉흉한 것. 

바알은 그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대식가가 ‘흉신 바알’을 포식했습니다.》 

《대식가가 ‘바알의 핵’을 포식했습니다.》 

《포식을 완료했습니다.》 

《‘특성 진화’가 시작됩니다.》 

포식 완료.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되어, 지금의 끔찍한 흉조가 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바알의 특성을 모두 가져왔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직 바알의 전부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바알의 혼’, 그 거대한 영혼의 불길을.

-캬캬캬캬캬컄! 

헬이 맛있다는 듯이 빨아들였다. 

전부. 조금의 낭비도 없이. 

《식사를 끝마친 ‘헬’이 진화를 시작합니다.》 

《진화를 완료했습니다.》 

《‘흉신의 사신력’을 획득합니다!》 

이윽고 헬의 등 뒤로 한 짝의 날개가 돋아났다.

124화. 부화

한국의 제주도 소실. 

보름이 지난 현재 그곳의 소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만이 아닌, 해외의 수많은 ‘눈’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스터는 공공연하게 ‘제주도에 희망은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 마스터. 한국의 제주도가 사라진 지 30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제, 마스터는 제주도를 포기하라고 SNS에 공식적으로 글을 올렸죠. 왜 그러셨나요?” 

그리고 오늘, 미국의 유명한 TV 쇼에 마스터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잠적해있던 그가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그의 출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스터는 예와 다를 바 없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진행자를 마주했다.

“저곳은 ‘심연’이라 불리는 장소입니다.” 

“‘심연’이요? 그게 뭐죠?” 

“죽은 땅. 가라앉은 땅. 들어서는 순간,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땅.”

“······ 와. 듣기만 해도 살벌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심연’에 대한 정의가 궁금하군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뜻은 아닌 듯한데요?” 

진행자의 예리한 지적에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세계에서 심연은 지옥을 뜻합니다.” 

“지옥······ 이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수많은 악마와 지옥왕이 있는 곳이죠. 아무리 위대한 전사라도 심연에 20일 넘게 있으면 죽습니다. 예외 없이.” 

예외는 없다. 

약간의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제주도는 소실됐고, 제주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마스터가 직접 실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지.’ 

판게니아의 심연은 미지의 장소다.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때도 있고, 절대 이길 수 없는 괴수가 도사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심연을 자유로이 탐구할 수만 있다면 제국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최강의 세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스터는 심연을 탐구했다. 

수십, 수백 번. 

그리고 모조리 실패했다. 

‘실패는 했지만 데이터는 얻었다.’ 

완전히 무의미한 실험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얻기 힘든 정보들을 얻었으니까. 

예컨대. 

‘우선 심연에 들어가면 명예의 전당에서 사라지지.’ 

랭커가 심연에 가라앉으면, 명예의 전당은 순간적으로 해당하는 사람을 ‘사망’ 처리한다. 

아예 순위권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 심연에 가라앉은 랭커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명예의 전당에서 이름을 감춘 하이랭커는 팬텀 란돌프, 검성 그라시아, 은둔자 민트초코맛있어요, 용살자 바르무슈.’ 

현재까지도 전당에 이름이 올라오지 않는 넷의 이름. 

모두가 ‘위험도 9’ 이상을 기록하는 강자들이다. 

‘심연에서 4일 이상을 지내면 정신이 망가진다.’ 

심연을 지옥이라 설명한 이유는 또 있다. 

그래서 심연을 공략할 땐 ‘단기전’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저 정신만 망가진다면 모르겠지만. 

‘10일이 지나면 몸 전체에 멍이 들고, 신체변형이 시작되지. 

그런데도 본인은 인지를 못 해.’ 

마치 방사성 물질에 피폭이라도 된 것처럼 멍이 들고 피를 쏟는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모른다. 

죽어가는 육신을 자신의 몸이 아닌 듯이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사람이 아니게 되어간다. 

‘20일이 지나면 죽거나, 심연의 주인을 따르는 괴물이 된다.’ 

예외는 없었다. 

20일을 넘긴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위에 열거한 넷은 조금 더 버틸지도 모른다. 

그만한 강자들로 실험을 해본 적은 없었으니. 하지만, 그래 봤자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따름이다. 

확신하건대 한 달이 지난 지금쯤이면 끝났으리라. 

자신을 잊고 괴물이 됐거나 이미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들도 그럴진대, 지구의 인간이 심연을 버틴다? 

아서라. 

‘그게 내가 이곳에 나온 이유이기도 하지.’ 

란돌프도, 그라시아도, 계속 신경 쓰이는 나머지 두 놈도 죽었다. 

이제 이 세상은 대안이 없다.

“······ 제주도는 심연이 됐습니다. 입장도, 퇴장도 불가능한 지옥 말입니다. 그러나 절망하긴 이릅니다. 바알이 다음 침략을 개시할 수 없도록 제가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자신 말고는.

대식가가 바알을 포식하자, 온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다. 

본디 바알은 시체 까마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격을 지닌 괴물.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처럼 부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시체 까마귀는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고, 흉내 내며, 인간을 유인해 잡아먹었다. 

인간으로서의 이해와 형질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반면 바알은, 태초부터 그럴 필요가 없는 괴수였다. 

멸망이 만든, 세계를 멸하고자 창조된 ‘악의’의 집합체와 같은 것. 

무엇보다······ 바알 내부에 숨겨진 ‘멸망의 조각’은 히든 특성으로도 결코 분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형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대식가는 ‘바알’을 먹어치웠으나, ‘멸망의 조각’까지 소화하진 못했다. 

멸망의 조각은 오랫동안 바알을 움직인 ‘악의’ 그 자체. 

-이 몸은 뛰어나구나. 내가 갖겠다. 

하여 ‘멸망의 조각’은 도리어 이 몸을 자신이 차지하고자 하였다. 

바알은 이 인간의 특성에 굴복했으나 ‘멸망의 조각’인 자신은 다르니까. 

세계의 균형을, 규칙을 어느 정도 일그러트릴 수 있는 존재. 

일종의 버그와도 같은 것이 바로 ‘멸망의 조각’이었으므로. 

-13개의 ‘모든 열쇠’를 가진 인간. 하지만 문을 열지 못한 ‘열쇠’는 쓸모없는 법이지. 

열쇠를 사용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하나도 제대로 소모되지 않았다.

하기야 인간이 ‘문’의 위치를 알 리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멸망의 조각은 천천히 몸의 주도권을 빼앗아갔다. 

주도권을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이 몸의 가능성에 ‘멸망의 조각’은 만족하였다. 

멸망이 창조한 바알보다도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육체. 

하지만, ‘멸망의 조각’의 뜻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진 않았다. 

《시크릿 옵션이 발동합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여 ‘초월한 바알 세트’가 신체와 융화됩니다.》 

《‘바알의 완전한 제어’를 시작합니다.》 

《바알의 내부에서 ‘멸망의 조각’이 저항합니다!》 

《제어를 시작합니다.》 

《저항이 약해졌습니다.》 

······ 주도권을 모두 쥐려 하는 순간. 

초월한 바알 세트가 육체와 융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숨겨진 옵션이다. 

바알의 ‘완전한 제어’를 위한 마지막 수. 

구제국의 사람들은, 바알의 속에 존재하는 저 ‘악의’를 알고 있었다. 

후대를 위해 마지막 한 수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니 이 ‘완전한 제어’는 오직 ‘멸망의 조각’을 속박하려는 방법이었다. 

-그래 봤자 5:5다. 내가 절반을 유지하는 한, 너는 깨어날 수 없다. 

영원히 잠든 채로 서서히 잠식되어라.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 

다소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그러나 ‘멸망의 조각’은 간과한 게 있었다.

초월한 바알 세트가 녹아들고, ‘멸망의 조각’과 줄다리기를 하며. 

《경험이 축적되어 레벨이 올랐습니다!》 

···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치가 축적 돼, 레벨이 오른 것이다. 

화아아아악! 

-······. 

‘멸망의 조각’은 어이가 없었다. 

레벨이 오르다니. 

레벨이 오르면, ‘모든 이상’을 회복한다. 

모든 경험치를 사용해, 격을 올리며 한순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멸망의 조각’이 제어하고 있는 이 ‘이상’은 단순히 레벨업 따위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몸은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축적해야만 겨우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극악의 몸뚱이였다. 

그것이 레벨업을 했다. 

방대하기 그지없는 경험치가, 마치 활화산처럼 터져나가며.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이 데일 듯한 수많은 축복이, 계단을 하나 오르는 수준이 아닌 공간 자체를 넘어선 격의 초월이 일어났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필요 경험치’가······! 

허나 ‘멸망의 조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여덟 번째 빗장을 풀었을진대, 이만한 ‘필요 경험치’라니? 열 개의 빗장 중, 겨우 여덟 번째 빗장이 풀렸다.

13개의 모든 열쇠를 지녀, 올려야 할 경험치의 절대적인 양이 늘었다지만, 도저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이었다. 

고작 7레벨에 이만한 ‘필요 경험치’라니? 그런 것치곤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정말 우주처럼 광활했다. 

다른 무언가가 있다. 

필요 경험치를 늘려버린 또 다른 것이. 

-봉인이라도 풀고 있는 것이냐? 마치 봉인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만 같다. 

그럼 열 번째 빗장을 풀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진정 무언가가 봉인이라도 되어있는 것이라면 ‘멸망의 조각’인 자신이 못 알아차릴 리 없지 않나. 

그럼 저만한 ‘경험치의 양’은 뭐로 설명한단 말인가. 

모든 게 불가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후, 레벨업으로 인해 모든 ‘이상’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리고. 

“웃기는 놈이로군.” 

··· 나는 눈을 떴다. 

더, 버틸 수 없다. 

버티고 싶지 않았다. 

심연에서의 기나긴 방황. 

그라시아는 슬슬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라시아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60만 명 전원이. 

“······ 그라시아 님. 장벽이 무너지던 현상이 멈췄습니다.”

“알고 있다.” 

장벽. 심연의 끝이 무너지며, 모두가 탈출이라는 희망을 꿈꿨다. 

하지만 그 현상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먹지 못해 초췌해진 얼굴과 몸. 

그나마 ‘전사’들은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지만, 문제는 지구의 사람들이었다. 

장벽이 무너진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게 멈췄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대로 저희는 다 죽는 걸까요?” 

플레이어들. 그들 역시도 한계였다. 

그라시아가 눈치를 주어 비밀은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 이상’ 같은 현상은 아직 없다는 것 정도일까. 

“······ 죽지 않는다.” 

그리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곳 심연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그래도 버텨온 건 플레이어들이 갖고 있던 물과 식량 등을 모두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벤토리를 통해 상당한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마저도 동난 지 오래다. 

애초에 60만 명이 먹을 식량을 갖고 다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선 아무것도 자랄 수가 없다.’ 

‘씨앗’을 바닥에 심어, 여러 방법으로 빠르게 성장시켜봤지만 모두 싹을 피우기도 전에 죽었다.

“최후까지 남겨둔 식량도 이제 없습니다. 이대로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허락하지 않는다.” 

“······ 이미 죽은 사람은 먹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한 플레이어가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 그들을 먹이 삼는 건 괜찮지 않으냐고. 

문제는 이게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맞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저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까?” 

“우리는 힘이 있습니다. 입을 줄여야,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대로면 저희가 죽습니다!” 

“모두 죽으면 이런 고고한 짓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들 미쳐버렸다. 

그라시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혹시 혼자 몰래 ‘식량’을 먹고 계시는 건 아닙니까?” 

“······ 헛소리를 하는군.” 

“그거야 확인해보면 될 일! 우리는 당신처럼 고고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도 힘들고요.” 

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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