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현재의 바알은 처음의 바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까, 까마귀가 이기고 있는 건가?”
“그런 거 같은데?”
“저 염소가 바알이면 그럼 우리 살 수 있는 거죠?”
고오오오오!
검은 태양의 피가 바닥을 적실수록 바알의 신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몸부림치며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흉조가 바알을 압도하는 모습.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아······!” “뭐, 뭐야!”
사람들은 기겁했다.
쩌적!
갑자기, 바알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서걱!
찰나와 같은 시간.
순식간에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흉조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쿵!
쿠우우웅!
······ 머리를 잃은 흉조가, 비틀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한 순간의 일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예상할 수 없던 상황.
“······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둘 다 쓰러졌어?”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갑자기 흉조가 머리를 잃고 쓰러진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게······.’
그리고 그건, 그라시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흉조, 오주력만이 아니다.
바알마저도 죽은 듯이 쓰러진 채였다.
하지만 흉조와 달리 바알의 신체는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더 깊은 심연’으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순간 떠오른 메시지를 본 그라시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미친······.”
욕을 내뱉었다.
여기서 더 진화한다고?
저 괴물같던 오주력도 막지 못한 괴물을, 인류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나.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 외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멸망의 조각’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Game Over》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앞에 떠오른 두 줄의 글귀.
사망, 그리고 게임 오버.
어디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다.
게임을 할 때.
보통 누구에게 죽었고, 그래서 끝나는 장면을 자주 접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분명히 바알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알을 수세로 몰아넣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설마 또······.’
마왕을 죽였을 때처럼, 강제로 버그라도 일으킨 건지.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현실이다.
게임 속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진짜의 세계였다.
“······진짜 뭐 이딴 쓰레기 같은 게임이 다있냐.”
설마 이 말을 다시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심지어 이번엔 게임조차 아니다.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멸망의 조각.
저것도 마왕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일 터.
이래서 문제다.
이놈의 세계는 잠깐 방심하면 목을 날려버리는 변수로 가득했다.
설마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까지 썼는데도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럼 여긴 사후세계인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 순간이었다.
《Game Ove》
눈앞에 있는 창.
거기서 갑자기 글자 하나가 지워졌다.
처음엔 잘못 본 건 줄 알았으나.
《Game Ov》
《Game O》
······ 그게 시작이었다.
모든 글자가 지워진다.
게임 오버도,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대신 그 빈 공간에, 다른 글자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생명의 불’을 소모합니다.》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가 발동합니다!》
123화. 영원(永遠)의 란돌프
화르르륵!
동시에 가슴팍에서 타오르는 불길.
순식간에 불길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 불은······.’
다만, 의아했다.
불길의 정체. 소모하여 나를 태우고 있는 이것의 진실이.
그도 그럴 게, 이것은 분명히, 사신들이 죽이고 빼앗은 영혼의 총아였다.
일명 ‘죄인의 불’이라 일컫던 것.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글귀는 그 죄인의 불을 ‘생명의 불’이라고 칭했다.
죄인의 불이 생명의 불이 될 수는 없다.
성질 자체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설마 헬이 먹고 뱉어서?’
······ 유추가 가능한 이유는 헬의 영향밖에 없었다.
헬이 먹고 뱉자, 다른 정통들은 그 불을 혐오하며 멀리했다.
단순한 ‘먹뱉 논란’이 아니었던 게다.
더러워서 못 먹은 게 아니다.
아예 그들이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성질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한 불을 소모하여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가 발동했다······.
‘신비 파괴, 철혈 군주의 심장을 영원 군주의 심장으로 진화시켰지.’
영원의 란돌프가 가진 기능.
이게 전부일 줄 알았다.
솔직히 이 두 가지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까.
모든 괴물의 신비를 등급에 상관없이 파괴하고, 영원 군주의 심장은 던전에서의 ‘조건 삭제’를 해주지 않았나.
당연히 무언가가 더 있으리란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 한데 그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니라, 세 번째 기능이 있었다.’
그것도 죽어야 발동되는 세 번째 기능이.
왜 하필 ‘영원(永遠)의 란돌프’였는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생명의 불에 의해 전신이 타오르고, 마침내 나는 재가 되었다.
그 직후.
꿈틀!
검은 재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천상(天上)’이 머리를 듭니다.】
【‘돌연변이’가 눈을 뜹니다.】
【’대현자‘가 바라봅니다.】
【‘허무’가 코를 벌렁댑니다.】
【‘비스트 로드’가 냄새를 맡습니다.】
【‘대식가’가 입을 엽니다.】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노래합니다.】
【‘손재주’가 손을 뻗습니다.】
【‘웨폰 마스터’가 심장을 쥡니다.】
【‘영원군주의 심장’이 격렬하게 뜁니다.】
【‘거인의 항마력’이 일어납니다.】
【‘올 마스터’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황금의 은총’이 중심을 잡습니다.】
【‘영원의 란돌프’가 영원(永遠)을 시작합니다.】
*
제주도를 둘러싼 검은 장벽.
영역 전체를 삼켜버린 그 주변으로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영웅 연합의 장, 박태우 역시도.
커다란 선박의 위.
“‘투영’ 능력자도 안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연합장님.”
“‘뚫어보는 거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곳에서 박태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16일 차.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 뒤, 워프가 제주도를 덮친 이후로, 아무런 진전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은 끊겼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지켜만 봐야 하는 건가?’
젠장 할.
아무리 제주도를 포기하자 했다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구출대를 꾸려서 할 수 있는 한 구조할 셈이었다.
그런데 구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 꼴이라니.
‘내 불찰이다.’
자신의 불찰이다.
숨겨선 안 됐다.
붉은 워프를 발견했을 때, 공개하며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때 내가 숨기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제주도를 빠져나갔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현실이 달라질 리 없으므로.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나?”
박태우가 묻자, 부연합장이 답했다.
“그게······ 저희 쪽에선 접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라시아의 관계자들이 한국의 링크 자체를 차단해놨습니다.”
링크 차단.
한 마디로 접근 자체를 막았다는 말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답을 들을 수도 없다?”
“예······ 관련된 발표도 없었습니다.”
박태우는 그라시아의 생사만 묻고 싶었을 따름이다.
카르텔에 공식 출전하여 심연에 가라앉은 그의 ‘본체’가 살아있다면, 제주도의 사람들 역시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다른 사람은? 카르텔에 참전했던 플레이어는 그라시아만이 아니지 않나?”
“저희가 파악한 12명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
절망적이었다.
지구의 본체가 사망했다는 뜻이었다.
심연에 가라앉으며 죽은 것이다.
부연합장이 말했다.
“다른 루트로도 해외의 경우를 찾아보곤 있습니다만······.”
“쉽지 않나 보군.”
“예. 그런데 ‘김하나’ 기자로부터 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하나.
디맨션 워리어와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기자.
그라시아와의 인터뷰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란돌프’를 언급한 사람이었다.
플레이어로선 괜히 껄끄러운 존재인지라 최대한 접근은 자제하고 있었건만.
“말해봐라.”
“‘은둔자’가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고요. 제주도 사람들이 살아있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계속 저희 쪽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은둔자’가 누군데?”
“그걸 밝힐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말인가?”
“‘은둔자’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답니다.”
맹세라니.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단 말인가?
하지만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면, 증거 없이는 음모론과도 다를 게 없었다.
“··· 연합장님. 정부에선 슬슬 물러나라는데요.”
“······ 벌써?”
“예. 완도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랍니다.”
“제주도에 가망이 없다고 보는 거로군.”
입안이 썼다.
제주도를 버리고 후퇴하라니.
16일간 거의 밤낮을 지새웠지만, 박태우의 눈은 단 한 번도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허나, 아직이다. 물러날 땐 나더라도 그 전에 김하나 기자부터 만나봐야겠어.”
그 은둔자만 확인할 수 있으면, 제주도 사람들도 살아있다는 뜻이니.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부연합장이 고개를 숙였다.
“예. 김하나 기자를 조용히 불러오겠습니다.”
*
김하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군인과 디맨션 워리어를 제외한 민간인 모두가, 제주도에 접근하는 건 금지된 일.
설령 기자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태우가 몰래 김하나를 들여온 것이다.
“‘은둔자’가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고?”
커피를 타준 박태우가 묻자.
“······ 예. 그리고 제주도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살아있어요.”
김하나는 확답했다.
살아있다.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박태우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정부는 우리더러 물러나라더군.”
순간 김하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정부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사라진 제주도보단, 살아있는 한반도가 더 중요하니 말이야.”
“······.”
김하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16일 차에 정부가 그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만에 하나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살아 나와도 빠르게 구조할 팀은 필요할진대.
그걸 전부 뒤로 물린다고?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도 제주도가 ‘소실’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정부의 판단은 어찌 보면 현실적인 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의 소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건 박태우뿐이었다.
박태우가 슬며시 던졌다.
“······ 그 ‘은둔자’를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 모를까.”
그러나 김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요.”
“왜지? 은둔자의 생사를 확인만 시켜주면 제주도의 전선을 물리지 않아도 되는데?”
판게니아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다.
만약 그 은둔자가 바알과 함께 심연에 가라앉은 상태임에도 살아있다면, 지구에서의 본체 역시도 살아있을 터.
그걸 증거로 전선을 유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다른 정보를 드리죠.”
“··· 그보다 혹할 정보가 있나?”
김하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굳은 표정으로 품에서 ‘책’을 꺼냈다.
“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지금 전선을 물려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요.”
······ 저 책에 무엇이 적혀있기에?
건네준 책을 받아든 박태우는, 일기의 형식으로 적힌 그것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
-1일 차
거대의 괴수가 격돌하고 그 다음날. 사람들은 똘똘 뭉쳐,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아직 소수의 ‘저주의 종’이 살아남아,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2일 차
일어나자 모든 ‘저주의 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황량한 땅 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해하고 있었다.
머리를 잃고 쓰러진 흉조의 몸통이 ‘바알’에게 흡수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 탓에.
-3일 차
살아남은 전사들이 모여 바알을 공격했다.
그라시아를 선두로. 그러나 바알의 외피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4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