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지금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상상을 초월한 일.
어쩌면 인류가 여태껏 겪어온 재해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공포가, 저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라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심연 전체에 셀 수 없이 많은 워프가 열리더니,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수만명.
심연 전체로 따지면 수십만 명은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지구인이었다.
왜 갑자기 지구인들이 이곳 심연에 나타난 걸까?
그것도 저만한 숫자의 지구인이.
“잠깐. 저거 그라시아 아니야?”
“어? 그라시아님!”
“뭔지는 몰라도 살았다!”
그들은 그라시아를 알아보곤 몰려들었다.
죽었다고 전해진 그라시아가 살아있었으니.
다만, 그라시아는 의아했다.
‘왜 아무도 미치지 않는 거지?’
대부분이 동양인들.
차림새나 옷에 적힌 글자로 보아, 한국인들이다.
한데, 그들은 모두 심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정신을 나가게 만들었던 강력한 저주가, 지금 나타난 사람들에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라시아님. 살아계실 줄 알았습니다!”
“지금 여기가 어딥니까?”
“우, 우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거죠?”
그라시아를 장벽처럼 둘러싼 사람들.
-카아악?
-카아아악!
동시에, ‘저주의 종’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허억!”
“괴, 괴물이다!”
사람들은 기겁했다.
지구인들은 아직 괴물 자체에 적응하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궁금증을 풀거나 답변을 해줄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천검이여.”
그라시아가 천 자루의 검을 꺼내었다.
체력이 달리지만 아직 그는 살아있다.
자신이 해야할일을 할 정도는, 남아있었다.
-카아아아악!
-키에엑!
그렇게 달려드는 저주의 종을 모조리 도륙하자.
“역시 그라시아님!”
“괜히 영웅이라 불리겠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더욱 열렬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에 그라시아는 구원자, 진짜 영웅처럼 비췄으니까.
하지만 열광은 길지 않았다.
쫘아아악!
검은 고치가 갈라지더니.
고오오오오오오오오!
······ 그 안에서 바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보다 더욱 진화한 형태로.
펄럭! 펄럭!
몸집도, 날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한 번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거친 바람이 심연 전체를 누볐다.
“저, 저렇게 큰 괴물도 있었어?”
“미친! 63빌딩보다 큰 거 같은데?”
“괜찮아! 우리한텐 그라시아님이 계시잖아!”
내가 있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설마, 나보고 다시 저 괴물과 싸우라고?
그라시아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하며 들어갔던 황금 염소는 죽은 건지.
하기야, 저걸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라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후 천천히 내뱉으며 다짐했다.
비록 한 번 패배했으나, 이번에야말로 영웅의 면모를 보일 차례였다.
죽더라도 영웅답게.
적어도,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지 않겠나.
고오오오오오오!
그런데 바알의 상태가 이상하다.
나타난 지구인들을 마저 죽이려고 하는 건줄 알았건만.
계속해서 고치 안쪽을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안에 뭐가 있기에?’
다르칸 영주를 비롯한 병사들이 대거 고치 안으로 들어가긴 했다.
설마 그들이 바알을 고치에서 쫓아낸 건가?
그들을 비롯한 수호기사 파멜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그라시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바알을 고치에서 밀어낸 것.
바알이 쫓기듯이 튀어나오게 한 원인.
고치의 안에서, 바알을 쫓듯이 튀어나온 존재.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그라시아는 최근 많은 것들을 보아오며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고룡 라일이와 특이한 사신들, 성각자, 바알까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 존재들을 연달아 만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타난 저것은, 그것들과도 조금 다르다.
“······.”
“······?”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알이 나올 때와도 명백하게 다른 반응.
절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으니.
결국 고치에서 튀어나온 것을 본 그라시아는 인상을 구긴 채,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뭐냐, 저것은.”
122화
마왕, 붉은 옥탕에 몸을 담그던 그가 불현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실로 이상하다.
이 이상 이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은 한 그가 의아함을 느낄 일은 없을진대.
‘네 개의 봉인 중 하나가 제멋대로 풀렸다.’
네 개의 봉인, 아직은 풀릴 때가 안 된 족쇄들.
그중 하나가 제멋대로 풀렸다.
하지만 지금 풀리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다.
그러한 ‘안배’가 아니었다.
그것을 누가, 무슨 의도로 푼 걸까.
‘··· 알고 풀었다면 사흉의 봉인에 숨겨진 의도를 안다는 것인데.’
툭, 툭.
마왕은 턱을 쓸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느덧 주변을 가득 메운 ‘마종(魔種)’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강해진 것만큼이나, 마종들 역시도 이전과 질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두 번째 ‘침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이미 끝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의 강화로 인한 감흥보단 ‘사흉’의 봉인이 깨진 게
더욱 걸린다.
그 봉인들은 침식율이 더욱 높아진 뒤에 깨져야했기 때문이다.
‘허나 무언가를 알고 풀었다고 한들 이제 늦었다. 바알은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었으니, 그 무한히 진화하는 짐승을 막을 수 있는 건 존재치 않아.’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우연히 풀었든, 알고 풀었든, 이제 사흉을 잡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알은 본능처럼 양쪽의 세계를 박살 내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먹어치우리라.
녀석이 만족할 때 즈음엔 적어도 수십 개의 도시가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만에 하나 사흉이 잡힌다면? 그
리하여 사흉의 안에 있던 ‘숨겨둔 것’이 예정보다 빠르게 세상에 나온다면?
‘······ 그럼 조금 귀찮아지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쯧. 마왕은 작게 혀를 찼다.
*
《‘가장 찬란한 광명’을 사용합니다.》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
특급 경매장에서 구매한 물건들, 엄청난 가치를 제물로 바쳐 띄운 ‘가장 찬란한’ 접두사는
나로서도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찬란한 빛의 옥좌로 말미암아 라일리를 소환해,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으니
‘가장 찬란한’은 어느 선까지 또 다른 영웅을 소환할 수 있을지.
‘다른 6각의 영웅 정도로는 바알을 이길 수 없다.’
누구를 소환해야할까.
물론, 지고룡과 하나가 된 라일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은 수에 모험을 걸 수는 없었다.
6각의 영웅을 뛰어넘는 존재를 소환해야만 한다. 혹은 나 스스로가 가장 찬란했다 여기는 자가 되거나.
‘드디어 빌헬름을 소환할 수 있는 건가?’
어쩌면 이제야말로, 기사왕 빌헬름을 소환할 수 있지 않을지.
단순한 황금률 조각이 아닌 ‘온전한 황금률’마저도 사용하지 않았나.
《사용자가 현재의 상태에 걸맞은 ‘가장 찬란한’ 형태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가장 찬란한 광명’은 소환의 형식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의 가장 찬란한 모습을 갖추는 것.
그럼 란돌프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걸까?
《‘시체 까마귀의 왕’이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화합니다.》
《‘끔찍한 흉조(凶兆), 란돌프’》
······ ?
란돌프는 란돌프인데, 맥락이 달랐다.
예상을 뒤엎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시체 까마귀의 왕을 초월하여, 그 극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끔찍한 흉조.
불길한 조짐, 징조 그 자체보다도 더욱 끔찍한 형태!
단순한 시체 까마귀를 넘어 아예 ‘현상’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 내 상태에 걸맞게 완성된다는 게 이런 거였군.’
아마도 나의 상황에 맞춰 진행된 모양인데.
이게 바알 세트의 영향인지, 아니면 인간일 때보다 시체 까마귀의 왕이 더 강하다고 판단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끔찍한 흉조’는 주변의 저주와 불길함을 먹고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럼에도, 훌륭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만큼.
이곳보다 더욱 불길한 장소가 없다.
또한, ‘바알’만큼이나 강력한 저주를 지닌 존재가 또 있겠는가.
그런데 ‘강력해진다’는 말의 뜻이 내 생각과는 약간 달랐다.
점점 비대해지는 몸.
이내 ‘바알’에 견줄 만큼 전신의 크기가 불어난 것이다.
‘······ 웬만한 거인은 명함도 못 내밀겠군.’
강해진다는 게 이런 거였나.
이윽고 거대 괴수 두 마리가 서로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본능적으로 ‘끔찍한 흉조’의 불길함을 읽어낸 바알이 위협하듯 날개를 펼친 채 달려들었다.
이 정도로 큰 몸을 움직여본 적은 없으나, 기선을 잡는 싸움에서 밀릴 수는 없는 노릇.
나 역시 목청껏 기합을 내질렀다.
까아아아아아악-!
*
초거대 괴수 두 마리가 허공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심연에 가라앉은 모두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저게 뭐냐.”
“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진짜 현실인가······?”
제주도에서 소환된 사람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염소의 얼굴을 한 괴수와, 까마귀처럼 생긴 새까만 새가 서로 격돌하고 있었다.
꽈아앙-!
부딪힐 때마다 지진이 일었다.
지각이 흔들리며 마치 태풍처럼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 검이여.”
그라시아가 천검을 펼쳤다.
방어의 기세.
곧이어 천자루의 검이 사방에 펼쳐지며 그 사이사이로 방어벽이 생성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미친.
그저 파장을 막아서는 것만으로도 손에 저린다.
얼굴 곳곳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체 저 거대한 까마귀는 뭐지?’
그라시아도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다.
생김새는 까마귀와 비슷하나, 실상은 까마귀의 형태를 한 ‘검은 불’과도 같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불길로 바알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바알이 만든 심연.
심연에 바알과 같은 존재가 또 있다고?
‘설마 다른 심연의 주인인가?’
심연의 주인들이 영역다툼을 할 때도 있다는 걸 들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들어온 심연 영역은 하나뿐이다.
소생한 자들의 심연.
오직 바알의 영역이며 다른 영역이 겹쳐있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오주력?’
저만한 괴이(怪異).
심연 미궁에서 라일리를 죽였다는 그 오주력이 아닐는지.
시체 까마귀의 왕이라 불렸던, 백왕이 직접 비호했던 자.
그라시아는 항상 실체가 궁금했다.
자신이 죽이지 못한 라일리를, 단번에 꺾어버린 오주력의 존재가.
하필이면 ‘란돌프’의 이름을 갖고 있는 그 까마귀가······ 설마 저 거대 괴수라고?
그렇다면 자신이 아는 ‘란돌프’와 저 ‘란돌프’가 이름만 같은 다른 존재임은 확실하다.
“사,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아아아앙!”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전부가 아니었으니.
“······ 저, 저건 또 뭐야?”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야······?”
사람들의 경악어린 음성과 함께, 그라시아도 시선을 옮겼다.
격돌하며 흉조에게서 떨어진 타오르는 깃털들.
그 깃털들이 꿈틀대며 변하더니, 마치 도사마냥 도사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까마귀로 모습이 바뀌었다.
까악!
까아악!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도사 까마귀의 군단.
그것들이 한꺼번에 합장하며 까악대자 흉조의 위로 불길한 ‘검은 태양’이 생성되었다.
‘검은 태양’에선 피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피가 심연을 적시자.
고오오오오-!
갑자기 바알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라시아를 포함한 수많은 자들이 공격했음에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
저 검은태양이 뭔지는 몰라도, 무엇을 위해 있는 건지는 알겠다.
【죽음】
······ 저건 죽음 그 자체였다.
바알의 영역이 저 검은태양의 피로 전부 물든다면, 바알은 죽고말리라.
덜덜덜덜!
검은태양을 마주하자 몸이 떨렸다.
저것은 절대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권능이다.
자신이 갖고 온 ‘독’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본질적인 죽음 말이다.
‘······ 진짜 괴물이 따로 없군.’
저게 오주력이라니.
미궁의 주인이 저런 괴물일 줄이야.
‘백왕이 미궁을 공식천명한 이유가 있다.’
오주력을 감싸고도는 이유가 뭐겠는가.
하여, 그라시아는 다짐했다.
‘오주력의 미궁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의 땅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궁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지고룡 라일리를 죽이고, 흉신 바알을 압도할 정도라면, 더 설명은 필요 없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