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흉 중에 바알이 깨어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음. 어차피 사흉의 봉인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흉은 사방, 동서남북의 끝에 봉인되어 있다고 알려졌지. 그리고 최근 흑왕이 남쪽에서 무언가를 깨운 것 같더군.”
“그게 사흉이라는 말씀인가요?”
“글세. 뭐가됐든, ‘그’가 죽은 이후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사흉의 부활, 흑왕의 준동, 가라앉았던 ‘심연 미궁’의 출현 등등.
판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개로.
새로운 게임.
세상 곳곳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됐다.
“그······ 라니요?”
“기사왕.”
“아, 들어봤어요. 그런데 그의 죽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뜻인가요?”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것이 그가 죽은 이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기사이자 대원정을 일으킨 최강자.
그가 이룩한 전설을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빌헬름을 진즉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여겨만 볼뿐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치부가······.’
빌헬름.
아니, ‘그 녀석’은 본래 황실의 사람이었으므로.
그것도 황실이 감추었던 치부와 같은 존재.
어느날 갑자기 ‘신병’에 걸리며 사라지더니, 빌헬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곤 수많은 전설을 이룩하며 대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물론, 대원정은 실패했다.
그곳에서 빌헬름은 죽었고, 황실의 치부는 영원토록 사라졌다,
아니, 아니다.
황금가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죄인. 빌헬름의 몸을 움직인 그놈이 아직 살아있다.’
란돌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극한 자.
모두가 그를 ‘빌헬름’의 전인으로 보고 있었다.
놈이 존재하는 한, ‘치부’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바알이 죄인들의 고향인 지구를 침략한다. 우리로선 환영할 일.’
죄인들이 모여있는 곳, 지구.
카르텔을 무너트리면 사흉 바알이 지구를 침략하게 된다는 사실 역시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었다.
다르칸 영주가 멋대로 토벌대를 꾸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바알만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될 테니.
‘전부 불태워라.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현실을 경험케 해주거라.’
*
바알 세트, 통칭 ‘바셋’을 완성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만 있었던, 하지만 완성한 사람은 전무하였던 신화급 세트 중 하나.
본래는 바알 갑옷과 투구, 탈리스만 셋으로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바로 검선일기.
그리고 검선일기 최후의 장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나는 바알의 ‘제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바알을 연구하여 드디어 이 괴수를 제어할 방법을 찾았다.
-바알의 피와 가죽, 뼈와 심장을 사용해 만든 바알의 무구들. 그리고 여기 검선일기에 담긴 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완성자여. ‘생명’을 바쳐라. 그리하면 바알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제어 방법.
그것은,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
하지만 굳이 ‘제어’하지 않아도 된다.
바알과 맞설 방법이 있었으니.
‘초월한 바알.’
히든 옵션, 초월한 바알.
모든 장비가 ‘초월 신화’등급으로 격상하며 나타난 숨겨진 옵션 말이다.
【바알 갑옷(초월신화)】
-먼 옛날,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사흉(四凶)’ 중 하나인 ‘바알’의 정수가 담긴 갑옷.
-‘바알 세트’를 완성하여 등급이 격상했습니다.
-히든옵션 : 특성값이 ‘1,000’을 넘어, 착용자가 ‘초월성’을 지닙니다.
-초월성(초월한 바알) [1] : ‘사흉(四凶)’을 상대할 때 ‘바알장비’의 성능이 100% 상향됩니다.
-초월성(초월한 바알) [2] : 바알을 발견합니다. 바알이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리내성 : 30%
-자연재생력 : 100%
-마력 : 10
-귀속
-파괴불가
-적용 제한(1) : ‘신화를 완성한 자’ 이상의 칭호 보유자
-적용 제한(2) : 모든 능력치 90 이상
-세트 무구(3/3)
내가 가장 약했던 부분이 물리내성이다.
마력에 의한 공격은 ‘거인의 항마력’으로, 정신에 의한 공격은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막을 수 있지만, 유일하게 물리적인 공격을 막는 히든 특성이 없었다.
‘물리내성 30%에 재생능력까지. 미쳤군.’
단일 갑옷이 물리내성 30%를 주는 경우는 없다.
유일급 갑옷도 25%가 최대였다.
대신 다른 옵션이 유일급에 비해 살짝 부족하지만 재생능력 100%에 마력10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어지간한 신화급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
특히 재생능력은 1,000%가 넘어가면 절단된 신체가 자라나기도 하니까.
‘거기다 투구와 탈리스만의 옵션도 강화됐다.’
이 정도면, 해볼만하다.
나는 즉시 초월성을 이용해 워프를 열고, 바알에게로 향했다.
*
콰직!
본능적으로 마족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 순간.
《‘초월성’이 발휘됩니다.》
《‘소생한 자들의 심연’, 이곳은 사흉 바알의 영역입니다. 바알 장비의 성능이 100% 향상됩니다.》
《저주관통 30%, 저주반사 60%, 저주 유지시간 60%가 증가했습니다.》
《자연재생력이 200% 증가합니다.》
《성력이 40 증가합니다.》
《성력수치가 120을 초과하여 모든 공격에 ‘전체관통(12%)’이 부여됩니다.》
《바알이 만든 ‘저주의 종’을 사냥했습니다.》
《기여도가 15 올랐습니다.》
《다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빠르게 떠오르는 문장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하여 상향된 옵션에 2배.
역시 바셋이다. 미쳐버린 성능이었다.
무엇보다.
‘전체관통이라니······!’
능력치는 120을 넘어서면 관련된 효과를 추가시킨다.
예컨대 마력은 ‘마력관통’을, 속성력은 ‘속성력 관통’을 더 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별계승자가 되며 바뀐 ‘성력’은 아예 전체관통 효과를 추가시켰다.
물리공격도, 저주에 의한 공격도 모두 12% 추가관통을 준다는 의미.
··· 어쩐지 손맛이 착착 감기더라니.
“후계자님!”
지척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음성.
세렝게티··· 아니, 저건 허드슨인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발테는?”
“그게··· 영주성에 함께 있었는데 다르칸 영주가 강제로 끌고왔습니다. 그리고 발테는 이상징후를 느끼곤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이상징후?”
“예. 심연에 가라앉자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미쳐버렸습니다. 악귀에 들린 것처럼 말입니다. 후계자께선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괜찮다. 너는 괜찮은 건가?”
“예. 왠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합니다.”
유일하게 허드슨만 바알의 공간에서 저주를 버티고 있다.
혹시 성녀에 의해 축복을 받아서일까?
그 외엔 딱히 허드슨만 멀쩡한 이유를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이어 나는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그라시아’는 아니겠지?”
“······ 맞습니다.”
시선의 끝.
“천사여, 나를 두고 어딜 가느냐!”
“······ 무시하십시오. 헛소리입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그라시아가 그곳에 있었다.
백발의 머리.
늘어난 주름.
실시간으로 그는 노쇠하여 약화되는 중이었다.
그만한 강자가 바알의 저주를 견디지 못한 건 역시 ‘젊음’을 빼앗겨서이리라.
생명력이 죽어가는 그는 생명과 의식을 다루는 바알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다가, ‘죄인의 불’을 꺼냈다.
“아······ 아아······ 그건, 그건 나의 젊음이 아니느냐!”
죄인의 불, 그 가운데 있는 그라시아의 모습.
그것을 본 즉시 그라시아가 손을 뻗어 발악했다.
“되찾고 싶나?”
“되찾고 싶다. 황금 염소여! 그건 내 것이다!”
“그럼 일어나라. 일어나서 검을 들고, 싸워라.”
“바알과 싸우란 말이냐? 저 괴물은 이길 수 없다. 저 괴물은 ‘우로보로스의 독’을 흡수해 더 강해졌단 말이다!”
덜덜 떠는 모습.
그간의 그라시아 답지 않은 모습이다.
겁에 질린 걸 보면 여전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라시아. 네가 할 일은 네가 지켜야할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다. ‘영웅’의 칭호를 달았다면 네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
“나, 나는······ 나 따윈 영웅이 아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천하의 겁쟁이가 다 됐군.”
“내, 내가 나선들 의미가 있느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지속해야할 이유가 있느냐?”
허.
정신이 나갔다지만, 솔직히 실망이었다.
그간 제잘난 맛에 으스대며 오직 자신만이 1등이니 뭐니 하던 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한 모습.
이래서야 상대할 맛도 안 난다.
하지만, 이곳 심연에 도착한 즉시 나는 눈치챘다.
다섯 도시가 함락되며 사람들 모두가 죽은 게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 이곳에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하나 그들을 구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바알이 진화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했으니까.
이 일은 그라시아가 제격이다.
그러니, 너는 사람들을 구원해라. 진짜 영웅처럼.
“걱정하지 마라. 바알은 내가 죽일 것이니.”
······ 나는 바알을 멸할 테니.
제주도
황금 염소 탈을 쓴 남자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 둘이 떠나간 뒤, 그라시아는 홀로 남았다.
-버러지처럼 죽던가,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귓가에 맴도는 음성.
하지만 그보다도 뇌리에 계속해서 재생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자일진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라시아는 전율했다.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그라시아는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당한 것이다.
라일리를 눈앞에 뒀을 때도 흔들린 적이 없었건만.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생소하나, 익숙한 느낌이다.
어딘가에서 스치듯이 본 것만 같다.
애초에 그런 압도적인 눈빛을 가진 자는 많지 않으니, 봤다면 잊을 리가 없건만······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한번 마주한다면 확실히 알 것 같은데.
‘버러지라.’
죽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시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업신여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최강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패배자의 말로 아닌가.
업신여겨져도 당연하다.
‘······ 연이은 실패가 나를 망가트렸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바알과의 전투에서의 패배?
사신들에게 젊음을 빼앗긴 것?
심연 미궁에서 도망친 일?
수세에 몰리고, 상황에 몰리며, 그라시아 결국 망가진 것이다.
정신을 놔버리고 치욕을 보였다.
‘나는 버러지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벌레가 아니다.
그라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뒹구는 ‘푸른 서광’을 쥔 채.
-캬아아아아악!
촤륵!
달려드는 마족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이어, 그라시아가 심연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라시아. 검성이라 불리는 최강의 전사이며 영웅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
검은 고치.
바알로 향하는 길은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
다르칸 영지의 수많은 병사와 ‘저주의 종’이 뒤섞인 채 죽어있었다.
시체의 길은 고치까지 이어졌으며,
“······ 도움이 안 되는군.”
고치의 내부로 들어서자, 그 안은 더 가관이었다.
일단 다르칸 영주가 목이 돌아간 채 사망해있다.
기세좋게 시작한 것치곤 너무 허망한 죽음이다.
죽은 모습 역시도, 그다지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경악과 놀람이 가득한 표정.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눈빛.
주변의 시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
다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고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도망친 게 아니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도망치다가 죽은 자들이 상당 수 있었다.
···이상하다.
보통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도망치지 않나?
바깥에서 뭘 보고 더 위험한 고치 안쪽으로 도망친 건지.
하지만, 궁금증은 길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척. 척.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존재.
그 존재의 머리 위로 떠 오른 글자.
【바알의 종 – ‘수호기사 파멜’】
【Lv.13】
······ 바로 다르칸 영지의 수호기사, 파멜이었다.
가장 강력했던 그가, 저주의 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파멜이 갑자기 공격해오면 그야 주변 병사들은 안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아마도 고치 내부에서 바알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은 탓에 변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강자가 멀쩡하다가 갑자기 그럴 수가 있을까?
‘저 녀석은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었지.’
파멜은 처음부터 별을 먹어 초월한 게 아니라 인간임을 포기하고 레벨을 올려서 강해진 자였다.
말인즉슨.
놈은 원래부터 ‘괴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알의 고치에서 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저 모습을 보아하니, 어떻게 인간을 포기한 건지 알 것 같았다.
“··· 데몬.”
흰자위 없이, 먹물같이 새까만 눈.
까맣게 물든 전신, 몸통보다 큰 두 장의 검은 날개, 양쪽에 나 있는 거대한 뿔과 도마뱀의 꼬리, 짐승 같은 하체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괴물.
저 모습은 ‘데몬’ 그 자체다.
여신을 배척하는 악마추종자들.
그 추종자들이 추앙하는 존재!
막심은 그저 데몬 하트를 이용해 강해졌을 뿐이지만, 수호기사 파멜은 처음부터 ‘데몬’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데몬이 되었거나.
‘제국은 알고도 묵인한 건가? 아니면?’
왜 악마추종자들의 전신과도 같은 데몬이 제국의 영지에 있던 걸까.
그것도 어떻게 수호기사로 있을 수 있는 건지.
제국이 제아무리 플레이어를 싫어한다지만, 그렇다고 여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못 알아본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눈앞의 괴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가 더욱 중요했다.
파멜은 바알의 종이 되어 그 저주로 더욱 강화된 상태.
정면에서 맞붙는다면 자살행위다.
막심과 같은 잡종이 아니니까.
당연히 비교도 불가능한 이적을 몸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